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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막 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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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막 11:12~14)
  

알프레드 테니슨의 ‘이녹 아든(Enoch Arden)'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영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 사는 이녹과 애니 그리고 필립은 어렸을 때 소꿉친구였습니다.
이녹과 필립은 똑 같이 애니를 좋아했지만 내성적인 필립보다는 적극적인 이녹이 애니와 결혼하게 됩니다.

행복한 7년의 결혼생활 동안 이녹과 애니 사이에 딸과 아들이 태어납니다.
가난하게 자랐던 이녹은 자식들에게만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돈을 벌기 위해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갑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녹의 생사가 묘연해지고 죽었다는 풍문이 돕니다.

생활고와 병약한 몸으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애니에게 필립이 청혼을 합니다.
애니는 남편 이녹을 기다리며 1년도 넘게 답을 주지 않다가 필립의 청혼에 못 이겨 그와 결혼하게 됩니다. 
애니는 필립의 아이를 낳고, 점차 정을 붙이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합니다.

한편 이녹은 돈을 벌어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파선하여 무인도에 정착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녹은 극적으로 구출되어 반백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고향의 여관집 주인 미리암으로부터 애니가 필립과 결혼한 사실을 듣게 됩니다.

이녹은 밤에 아내가 살고 있는 필립의 집을 찾아갑니다.
창문 너머로 행복한 가정의 모습과 아내의 미소를 보면서 이녹은 조용히 물러납니다.
그는 여관에서 1년의 시간을 더 보낸 뒤 죽음을 맞습니다.
죽기 전 여관 주인에게 자기가 애니의 본 남편 이녹이며, 이 사실을 자기가 죽은 다음에 애니에게 알려 자신의 사랑을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감동스럽지요?
우리는 문학작품이지만 이녹의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배웠습니다.
고전13: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사랑의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물러설 줄 모르고, 양보할 줄 모르고, 희생할 줄 모르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걸핏하면 싸우고, 미워합니다.
계절은 입추가지난 열매의 계절이건만 우리에겐 사랑의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한 본문의 이적은 생애 마지막 주간에 일어났습니다. 
일요일(주일)에는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날 저녁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밖 베다니에서 쉬셨습니다. 

월요일에 다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고난의 형장으로 다가가고 계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생애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던 예수님이 시장기를 느끼셨습니다. 
마침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있어, 열매가 맺혔을까 하여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3절입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실망하신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를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이 나무는 말라죽어 있었습니다.

무화과는 이스라엘 땅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과일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심은 지 3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1년에 두 번씩, 늦봄과 초가을에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가까이 가실 때는 유월절 절기 시작 5일전입니다. 
이제 며칠 지나 목요일이 되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게 되잖아요? 이 시기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히기에는 이른 초봄입니다. 

시기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무화과나무는 때도 아닌데 잎을 무성하게 낸 것입니다. 
혹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여러분, 나무는 달력의 날짜를 보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온도만 맞으면 시도 때도 없이 잎을 내고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초봄은 싹이 나서 연녹색의 잎을 내밀 때입니다만 이 무화과나무는 웬일인지, 햇볕이 잘 드는 양지 바른 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잎이 무성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목을 끌었는지 모릅니다.
무화과 열매는 보통 잎이 무성할 때 맺히기 시작합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열매를 맺힐 때도 아닌데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 
분명히 본문 13절 끝에 보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시장하신 나머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 

“예수님이 그동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비난, 몰이해, 그리고 편견에 시달려 오셨기 때문에 감정이 예민해져서 홧김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신 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교훈을 주시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상징행위라고 합니다.
뭔가 특이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로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요13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남을 섬기는 삶’을 가르치기 위하여 본인이 직접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이었지요.
그 당시 전통이나 관습에서 제자들이 스승의 발을 씻기는 경우는 있으나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징행위를 하신 다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13:14절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그러면 누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려고 무과화나무를 저주하는 상징행위를 하셨을까요?
두 종류의 대상에게 교훈을 주시려고 예수님은 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마디로 말하면 열매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책망하시고 그들의 종말을 예언하신 사건입니다. 
비록 시기적으로는 열매를 맺기에 이른 때였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봐선 열매를 기대할 만합니다. 
그런데 막상 찾아가보니 열매가 없었습니다. 

멀리서 본 나무의 외양과 가까이 다가가 본 나무의 실상은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것은 잎을 무성히 피웠으면서도 정작 있어야 할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마치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입만 열면 자랑하고, 잘난 체했지만 정작 있어야할 하나님 백성다운 열매는 맺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너희들이 달라지지 않으면 멸망당하고 만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역사적인 사실이 되었습니다. 
A.D. 70년에 이스라엘은 로마로부터 완전히 패망하고 맙니다.

저는 어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열매를 맺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앙경력은 화려하지만 나는 신앙생활의 멋과 맛을 오래전에 상실하고 타성에 빠지지는 않았는가?’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아 위선적이 되어가고 있지 않았는가?’
‘입만 열면 하늘의 것을 사모한다고 해놓고서 땅의 것들을 쫓아다니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인정해주면 최고라고 말하면서 사람의 칭찬에 목말라 하지 않는가?’
‘영원한 것을 소망한다고 하면서 현재의 것에 웃고 울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이 먼저라고 얘기하면서 내 것에 집착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 교우들은 그렇지 않겠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의 타성과 위선은 새신자보다는 집사님이 더하고요, 집사님보다는 권사님이 더하고요, 권사님보다는 장로님이 더 하고요, 장로님보다는 목사님이 더 하답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예요! 

아니 저를 보면 그래요.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도대체 찬송을 불러도, 말씀을 들어도, 성만찬을 받아도 감격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되지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일반 백성들보다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더 책망하셨습니다. 다 이유가 있어요!

어제 우리 교회 청년부가 교회에서 1박2일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집회 마지막에 저가 청년들에게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한 사람씩 간단히 기도제목을 물어보고, 그 기도제목을 중심으로 중보기도했습니다.
11시 반에 시작했는데 새벽 1시 반에 끝났습니다.
대략 2시간 기도한 거지요.

저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많은 청년들의 기도제목이 ‘첫 믿음을 회복하고, 첫 감격을 회복하고, 첫 사랑을 회복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제목이 참 좋았습니다.
순수하잖아요?

어느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소경들은 손끝으로 점자책을 읽습니다. 
손끝을 많이 사용하다보면 손끝에 굳은살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굳은살이 생기면 점자를 해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면도칼로 자기 손끝의 굳은살을 도려낸답니다. 
그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의 타성과 위선을 깨뜨리고 벗겨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신비로움을, 신앙생활의 멋과 맛을, 새살이 돋듯이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성가-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2.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이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너희들에게는 강력한 기도의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무화과나무가 말랐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건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제자들은 그저 예수님만 졸졸 따라다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이 주간만 지나면 십자가에서 처형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은 목자 없는 양 같은 신세가 될 것입니다. 
의지할 대상도, 따를 대상도, 안내 받을 대상도, 의논할 대상도, 한 순간에 잃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낙심하게 될 것이고, 방황하게 될 것이고, 회의에 빠지게 될 것이고, 무력해질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인 ‘기도’가 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기도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다.’
2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면 그대로 되리라.” 
도대체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누구한테 물어보아도 미쳤다고 하지, 된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얘기지요! 
그런데,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그런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무화과나무가 마르는 사건을 통하여, “내가 떠난다 해도 걱정하지 말라, 너희들에게는 기도할 권세가 있지 않느냐?”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생활을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1)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22절 “…하나님을 믿으라.” 
23절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에 ‘믿음’을 뜻하는 명사 ‘피스티스’가 본문을 포함해서 모두 5번 등장합니다. 
막2:5, 4:40, 5:34, 10:52절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용례에서 믿음은 필연적으로 이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려면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약 1:6-7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금식기도를 한다.’, ‘철야기도를 한다.’, ‘산기도를 한다.’ 그런 얘기를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그런 특별한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도 꼼짝 못하시도록 세고, 강한 기도를 드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가 의지하던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을 포기하고 금식기도를 합니다.
자는 것을 포기하고 철야기도를 합니다.
세상에 의지하던 것을 내던지고 산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전적인 신뢰가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기도는 한번으로 족하고, 하루 4-5끼 먹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렸는데 뭘 그렇게 걱정해!”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능력에 대한 신뢰가 문제입니다.

2) 중요한 것은, 이 기도에 관한 말씀에 ‘즉시’라는 단어가 없음을 눈여겨보셔야 합니다. 

23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즉시 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로 되리라”(It will be done)

미래의 어느 시간에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때일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믿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인내와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합니다!
믿지 못하면 기다릴 수 없습니다.
군대에 간 남자 애인을 믿지 못하면, 2, 3년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그 남자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3년이 아니라 10년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말씀은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떻게 하다보니까 신앙생활에 타성이 생기고, 감격이 없어지고, 형식적이 되어 갑니까?
깨뜨리고 깎아내서 새살을 돋우십시오.

미루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의 맛과 멋을 회복하십시오.
우리에게 강력한 기도의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무화과나무를 말라죽일 정도가 아니라 산을 들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그대로 되는 능력 말입니다.
이 기도의 무기를 활용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인생의 열매가 풍성해지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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