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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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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10~12)


핍박(逼迫)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형세가 매우 절박하도록 바싹 닥쳐옴, 혹은 곤궁함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핍박은 모욕과 박해와 비방과 증오까지 확대 해석합니다. 본문 10절에 『 의를 위하여 』가 핍박의 이유였는데, 11절에는 『 나(예수)를 인하여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의로운 삶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당할 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환난과 고통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 『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 『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6-7절에 『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에 『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에 『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라고 했습니다. 

고난은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보상이 없다면 누가 고난을 받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이미 받은 상도 있고 장차 받을 상도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어느 교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앙 노선에 있느냐에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찬란한 한국 기독교 역사는 시대 시대마다 얼룩진 역사가 없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서 끝까지 굽히지 아니한 것은 한국교회의 자랑이요 면류관입니다. 반드시 이단이 아니더라도 환난 날에 신앙의 싸움에서 유감스럽게도 뒤로 물러난 단체들도 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웅변적인 변명이 있겠지만 단언하건대, 그 변명은 궁색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누구에게서 훈련되어지고 전수되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대합니다. 

Ⅰ. 일제는 신도(神道)와 신사(神社)를 강력 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구축했습니다. 

신사참배 강요는 처음부터 일제 정권하에 용의주도하게 준비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천황 숭배와 교과 과정 개편으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일제 치하의 대표적인 박해라고 하면 1911년에 105인 사건과 1919년의 3.1운동과 그리고 1930년대로 이어지는 신사참배 강요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사참배 강요는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것이기 때문에 다른 박해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이때 일본은 군대와 그 세력이 더욱 막강해져서 전 세계를 정복해 보려는 패권주의 야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입니다. 일제는 만주에 만주국이라는 정부를 세우는가 하면 중국을 대항하여 싸울 계획을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제는 국력을 증진시킬 목적을 가지고 신도를 부흥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국민, 특히 황족은 직접 '아마데라스 오미카미'라는 태양신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지구상의 종족 중에서 가장 우수한 백성으로 일본천황은 마땅히 온 세계를 다스려야 된다는 웃지 못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일본 천황은 신이 되고 이미 죽은 황제들과 황후들의 혼을 경배하기 위해 신사를 세웠습니다. 

그 후에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게 될 때 한국 전역에 신사를 세워서 일본인이나 공관원들이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친일파나 일본에 아부하는 자들이 동참했습니다. 일제는 세계 정복의 야망을 안고 국민 정신을 통일해야 된다는 이유로 본격적으로 한국 민족에게도 신도 신사를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신사라는 것은 일본의 토착적인 원시종교입니다. 우상 숭배적인 것으로 일본 초대로부터 있었던 종교입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는 신사참배를 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친일파 지도자들은 일본이 하라는 대로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좀 약한 자들 중에 이것은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민의례라고 생각하여 신앙 양심에 구애될 것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일부 지도자들 가운데 일본의 신도나 신사의 참배목적과 본질을 확실히 규명하고 한국교회 태도를 결정해야 된다는 신중론자들도 있었습니다. 신사참배가 종교 행위임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규정을 가지고 행정적인 조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에 보은하는 국민윤리라고 강조하면서 '신사 비 종교화'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래서 신사참배는 공공연하게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국가 신도로, 전국적으로 조직적인 행정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923년에 신사의 수가 40개소에서 1933년에는 215개소로 확산되면서 신사참배 강요가 노골화 되어 갔습니다. 

Ⅱ. 일제는 기독교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해 왔습니다. 

신사참배가 맨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안악사건과 105인 사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1918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사를 총공사비 157만원을 들여서 1925년에 완공했습니다. 그리고 동년 6월에 조선신궁으로 개칭하여 본격적인 신사참배 강요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통하여 민족 정신의 말살을 꾀하고 식민정치의 정치실현의 완성을 보려고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그들의 음모는 민족 정신을 해체시켜 한국인을 소위 일본 황국 신민(臣民)으로 만들려는데 있었습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통하여 한국교회의 신앙 생명을 송두리째 말살해 버리려는 의도가 공격적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신사참배 문제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민족정신을 고수하려는 애국지사들 역시 신사 앞에 굴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사참배 강요는 학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32년(소하 7년) 추계 황령제 날에 평양 서기산 충혼탑 앞에서 만주사변 전몰장병 위령제가 있었습니다. 이때 각 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일제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학교 책임자들은 기독교 학교로서 참석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제례 직후에 있는 국민의례만 참석해도 좋다는 것에 합의하고 숭실전문 및 숭실 중학교 학생들과 숭의여학교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국민의례라는 것은 제물이 가득 놓여 있는 충혼탑과 납골당(納骨堂)에 안치되어 있던 전몰장병들의 해골에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전국 각급 학교에 신사참배 명령이 내려 졌습니다. 

총회는 1934년 10월 1일 교섭위원들을 선정하여 조선총독부 사회과장 방문계획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상 위배되는 것이라고 쓴 청원서를 조선 총독에게 제출하려 했으나 일단은 철회 당했습니다. 
1936년 1월 16일 '야스다께' 평남지사는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교장 윤산온(G. S. McCune) 박사와 설립자 마포 삼열 선교사를 도청으로 소환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확답을 요구하였습니다. 

야스다께 지사는 동월 18일 오후 2시까지 기한부로 태도를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불 참배의 경우에는 사표를 제출할 것을 강력히 지시하였습니다. 한편 숭실전문학교의 이사회와 평양 교역자들은 회의를 갖고 신사참배 문제를 검토한 결과 반대론이 우세하였습니다. 
이에 윤산온 교장은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내용과 교장직의 사임도 불응한다는 답사를 1월 18일 오후 야스다께 지사에게 제출했습니다. 총독부는 1936년 1월 20일 부로 교장직 승인을 취소했습니다. 1월 21일에는 숭의여중학교 교장 스느크(Miss V. L. Snook)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했습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의 발발로 시국이 불안해졌습니다. 총독부는 동년 8월 21일부로 '시국인식의 철저'에 관한 통첩을 전국에 하달했습니다. 그 방책으로 9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각 학교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시행케 했습니다. 
여기에 강경한 반대의 태도를 보이던 광주 숭일남자중학교, 수피아여자중학교, 목포 영흥남자중학교, 정명여자중학교, 순천 매산학교, 전주 신흥학교, 기전 여학교, 군산 영명학교, 그 외 10여개 학교들이 모두 폐교되었습니다. 

1937년 10월 29일에는 숭실중학교, 숭의여자중학교, 숭실전문학교 등 그 뒤에 대구의 계성, 신명, 서울의 정신, 재령의 명신, 선천의 신성, 보성, 강계의 영실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도 같은 운명을 겪었습니다. 연희전문학교는 1941년까지 버티다가 1942년 9월 총독부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이용하여 기독교계 학교를 굴복시켰습니다. 일제는 불교, 유교, 혹은 신흥종교 단체를 교회에 대한 저항세력으로 보호 육성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기독교의 활동무대는 점점 좁아져 갔습니다. 

학교는 이미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 아니면 굴복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교회뿐이었습니다. 미나미 총독은 초대 총독 데라우찌의 통치를 그대로 계승하여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해 왔습니다. 미나미 총독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했습니다. 즉 내지인(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하는 말입니다. 
형식도 마음도 피도 육체도 모두가 일체가 되지 아니하면 내선은 융합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몸과 마음 공히 진실로 일치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신사참배 강요는 예외와 성역이 없게 되었습니다. 

장로교회도 처음과는 달리 날이 갈수록 많이 약화되어 갔습니다. 1935년 12월 4일 북장로교 선교부가 경영하는 경신중학교와 정신여자중학교는 선교부 실행 위원회의 양해를 얻어 시험적으로 명치신궁에 참배한 일이 그것입니다. 
신사참배 문제는 개인의 양심에 맡겨야 한다고 입장을 표명한 지도자들은 연희전문학교 교장 원한경(H.H. Underwood)과 캐나다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였습니다. 
일본은 얼마정도 남아 있는 강경한 교회들에 대하여 본격적인 탄압을 가해왔습니다. 

1938년 2월 총독은 다음과 같은 시정 명령을 각도에 하달했습니다. 
① 시국인식 철저를 위하여 기독교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하여 지도계몽에 힘쓸 것 
② 시국인식의 철저를 위한 지도 및 시설
ㆍ교회당에 국기 게양대를 설치할 것
ㆍ기독교인의 국기경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 제창을 실시할 것
ㆍ일반 신도의 신사참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려행(勵行)에 힘쓸 것
ㆍ서력 연호의 사용을 삼갈 것 

③ 찬송가, 기도문, 설교에 있어 내용 불온한 것은 엄중 취재(取縡)할 것
④ 당국의 지도에 따르지 아니하는 지도자는 법적 조치할 것
⑤ 국책에 맞는 기독교의 신 건설운동은 이를 적극 원조할 것을 각 도에 하달하였습니다. 

Ⅲ. 신사참배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입장은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신사참배를 하지 아니하고는 안 될 정도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1) 천주교의 태도
천주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일본에 대해 1932년 5월 26일자로 이미 신사는 국가의식으로 충성과 애국심의 표명이므로 참배해도 좋다는 통첩이 보내졌습니다. 
천주교는 당시 독일, 이태리, 일본 3국 동맹관계로 일본과 친선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조치로 신사참배를 허용했습니다. 조선에서도 1936년 5월 25일자로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는 교황청(당시 Pius 12세)의 공식 발표가 있었습니다. 

2) 성결교의 태도
성결교회는 끝까지 버티다가 1943년 12월 29일 해산하고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했습니다. 

3) 감리교의 태도 
감리교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신사참배를 시인했습니다. 1938년 9월 총리사 양주삼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연전에 총독부 학무국에서 신사 참배에 대하여 조회한 바를 인쇄, 배부한 일이 있거니와 신사참배는 국민이 반드시 봉행할 국민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라고 한 것을 인식하였을 줄 압니다. 그런고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는 교리의 위반이나 신앙에 구애됨이 추호도 없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리교 신학교는 해방 전까지 유지될 수 있었고 교회의 수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개인 양심으로 신사참배에 응하지 아니한 사람들도 각 교파에서는 적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4) 장로교의 태도 
1938년 제 27회 장로교 총회를 앞두고 다른 교파들은 모두 가결했으나 장로교는 총회까지 버티어왔습니다. 전국 23개 노회 총대가 선정되었을 때 전국 경찰서에서는 총대 포섭에 나섰고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목사 외 주동자는 이미 구속시켰습니다. 총회 전날 밤 평양경찰서는 평양, 평서, 안주 3개 노회 대표들에게 조치, 총회 통과 각본을 하달했습니다. 

평남노회장 박응률 목사는 제안을,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는 동의를, 안주노회 총대 길인섭 목사는 재청할 것을 합의하고 약속했습니다. 선교사 총대들은 총회 석상에서 침묵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그때의 선교사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년 9월 9일 오후 8시 신의주에서 계획되었던 노회장소를 평양 서문밖 교회로 장소를 옮기고 경찰의 경계 속에 임원 개선을 마쳤습니다. 

이튿날 평남 지사와 경찰서장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 공천부장 함태영 목사는 "평양, 평서, 안주 3개 노회 연합대표 박응률씨의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제안 건은 채용키로 한 것이 오며…"하자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가(可)는 묻고 부(否)는 묻지 않은 채 각본대로 가결을 선포해 버렸습니다. 
소하 13년 9월 10일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홍택기 목사의 이름으로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성명서가 발표되는 치욕적인 역사가 기록되는 순간이었습니다. 

5) 평양신학교의 태도
평양신학교는 교장 마포 삼열 박사를 중심으로 한 박형룡, 남궁혁, 이성휘 등은 반대 입장에 있었고 채필근, 김관식 등은 지지 입장에 있다가 1938년 1학기 종강과 함께 폐교되었습니다. 

평양신학교에서 일어난 반대운동은 사실상 1934년 주기철 목사가 평양신학교 부흥회에 행한 일사각오란 설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주목사는 신사참배 강요를 이겨내려면 예수 제자인 도마처럼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정신적인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주기철 목사는 학생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936년 1월 18일 야스다께에게 보낸 숭실중학교 교장 윤산온(G. S. McCune)의 편지는 당시의 비장함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나는 각하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드리게 됨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학교 교장인 나에게 요구한 행위를 한 개인으로서 양심적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개인으로서 신사에 참배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학생들에게도 그것을 하도록 강요할 수 없음을 알려드리게 되어 유감스럽게 생각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니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역적으로, 종족적으로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시고 계십니다. 신사참배를 통하여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신앙상태를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저울에 달아 보셨다는 데에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환난을 대처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양보를 조금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법을 조금 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허물과 연약의 대소에 있지 아니합니다. 

저는 오늘 이런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설교를 해야 하는 자신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변이되고 변종된 현대판 신사참배가 너무 많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정신으로 세운 학교들은 과연 건학 이념에 따라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얼마 전 혜림이가 미래 한국 칼럼에 "맹목적인 채플 반대에 정당성이 없어"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입학지원은 학교 특수조건 수용 전제'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기독교 학교가 건학 이념에 따라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미션스쿨(Mission School)이라 부르는 학교는 기독교 이념의 전파를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이다. 따라서 의무 시행은 학교가 가진 고유한 권한이다. 일부 재정적 지원을 국가로부터 받는 학교는 엄밀히 말해 국가의 사회적 공기(公器)인 것이다. 

그러나 대학이 의무교육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가 사립학교를 지원해 주는 것은 대학이 국가의 공기라는 차원이 아닌 대등한 상호교환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립대학에 지원을 함으로서 대학의 커리큘럼을 통해 국가적인 인재를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의 선택권은 원칙적으로 학생 스스로에게 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의 학교 설립자나 교장들은 사상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건학 이념에 위배되는 것을 요구해 왔을 때 폐교를 불사했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계시의존신앙, 계시의존사색이 저들의 삶의 궤도였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절대 환난을, 죽으면 죽으리라는 절대 신앙으로 바꾸며 살아갔던 신앙인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이자 신앙의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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