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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 (왕상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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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 (왕상 17:8~16)

 
우리는 태산같이 버티고 있고, 때로는 파도처럼 몰려오는 수많은 인생의 시험 앞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뒹굴기도 합니다.  슬퍼하고 애통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기회와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무장하여 모든 시험도 시련도 일단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시험과 시련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시험이니 시련은 일단은 이기고 봐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목회를 오래 하면서 보니까 사람이 잘 살 때보다도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 영혼이 훨씬 더 아름다워집니다.  사람이 고통과 시험 가운데 있을 때에 사람이 훨씬 더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이니 시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태풍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러나 자연을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태풍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시련과 시험은 인간을 성장시키는데 필요합니다.  시험은 삶의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를 보십시오.  명색이 그래도 주님의 제자인 베드로의 생애를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인생의 무대에서 시험들 앞에 실패만을 거듭한 사람입니다.  어쩌다가 삶의 무대에서 크고 작은 유혹 앞에 무너지고 실패만을 거듭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결정적인 시험, 결정적으로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배신하리라"고 하는 너무도 정확하고 자세하게 가르쳐준 그 사실 앞에서도 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장소, 바로 그 때 그렇게 맥없이 넘어지고 맙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한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졌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장했고,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을 회개시켜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위대한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나면서부터 걷지를 못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능력 있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영적으로 성장했다면 나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능력 있는 제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나도 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베드로의 하나님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곤고한 광야 같은 세상 가운데서 지쳐 쓰러져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일으키신다고 하는 부활의 능력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붙들고 어떤 시험 앞에서도, 어떤 시련 앞에서도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실수와 실패가 반복되어도 하나님은 그 실패와 실수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꾼들을 성장시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업들을 성장시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정들을 성장시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도자들을 성장시키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 옆에 있는 분하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당신도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하나님 앞에서 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창의력이 경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남보다 뛰어난 창의력이 있는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창의력은 고독과 혼돈과 자유 가운데서 생성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깊은 고독 속에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혼돈도 경험해야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땅이 고독하고 혼돈 가운데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 속에서 혼돈을 만나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혼돈 속에도 하나님의 영만 운행하시면 비상구가 열리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고독과 혼돈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은 이중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고독과 혼돈이 없으면 사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고독과 혼돈이 없으면 인간은 한없이 교만해집니다.  그 교만이 하늘에다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 아무 혼돈도 없으면 그때는 내가 망하는 때인 줄 아시고 정신을 바짝 차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유일한 경쟁 상대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남과 경쟁한다?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의 과거와 경쟁합니다.  자기의 어제와 경쟁합니다.  내 사고가 어제의 사고보다 더 성장했는가?  내 말씨가 지난주보다 더 아름다워졌는가?  내 표정은 지난주보다 좀 늙긴 했어도 나아졌는가?

사실 진실한 인간의 경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경쟁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자고로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덕을 쌓아야 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 내면에서는 성숙되고 고상한 성품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도 독선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분쟁하고 다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쟁하십시오.  더 아름다운 자신을 만들기 위해서 경쟁하십시오.  더 아름다운 말씨와 표정을 만들기 위해서 경쟁하십시오.  더 풍요로운 자기 내면의 평화를 위해서 경쟁하십시오.  더 성숙된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만들기 위해서 경쟁하십시오.  더 깊고 더 높은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경쟁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만 그분을 섬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십시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자들의 90%는 자신의 약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실패의 길을 가게 된다고 합니다.  반면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약점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약점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바꾸어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를 싫어하거나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할 때 더욱 강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누리고 있는 많은 은혜와 축복들을 강할 때가 아니라 연약할 때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어리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소중한 영적 자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이 때 주셨습니다.  주님의 가슴속을 들여다보는 믿음의 눈도 이 때 주신 것입니다.

저는 12년 전에 4천만원의 빚을 지고 집사람과 아이들 둘이랑 아무런 연고가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이곳에 언양영신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제 어머님은 이 못난 아들이 천명이 넘는 교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세계를 누비는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사실 저도 개척을 할 때에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늘 꿈에 부풀어 있었고 희망에 넘쳐 있었습니다.  제 어머님의 기도와 제 꿈대로라면 벌써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개척하고 십년이 지난 지금 저는 천명은 고사하고 백명의 반도 되지 않는 교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누비기는커녕 울산도 누비지 못하고 있습니다.  홀로 기도할 때면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불붙는 것처럼 아프기만 했습니다.  답답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올 때면 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러한 꿈과 계획은 하나님 앞에 거절되었지만, 그러나 저를 향한, 그리고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빈틈없이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임을 새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구경꾼이 아니라 교회의 지체요, 기둥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인 이 교회는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 하늘나라 인재양성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에서 성전이 되고, 기둥이 되고, 리더가 되는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그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는 이 꿈을 꾸게 됩니다.  "나도 리더가 될 수 있다!"  옆 사람과 다시 한 번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당신도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에 욕심을 내십시오.  하나님 앞에 서는 일에 욕심을 내십시오.  이 세상에서의 성공자가 아니라 하늘의 성공자가 되리라는 거룩한 욕심을 가져보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장막터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장막터를 넓히는 일에 욕심을 가져보십시오.  시간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의 터를 넓혀나가십시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런 거룩한 꿈을 안고 살아갈 때 우리 교회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쓰러지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어떤 권세도 무너뜨릴 수 없는 강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쉽게 붙고 떨어지는 포스트잇과 같은 힘없고 나약한 세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결코 떨어지지 않는 본드와 같이 강한 가족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의 부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부자가 되는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의 성공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성공자가 되는 꿈을 꾸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꿈을 꿀 줄 알 때 우리 교회는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강한 주님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집이라는 것은 원래 거기에 누가 사느냐에 따라서 가치와 이름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곳에 왕이 살면 궁궐이요, 강도가 살면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죄인이 살면 감옥이 됩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강하고 큰 교회는 건물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성도들이 있느냐가 말해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이 피 흘려 세우신 이곳이 적당한 타협주의자들과 안일주의자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각자 내 눈물이 묻은 자리, 내 희생의 자국이 난 자리에 앉아 예배하고 기도하는 그런 성전을 원하고 계십니다.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그런 힘있는 교회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초막이나 궁궐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기억하십시오.  여기가 넓은 곳이요, 여기가 좋은 곳입니다.  여기가 바로 하늘나라 큰 사람들이 모이는 큰 예배당입니다.  이곳에 모인 여러분이 바로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는 능력자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지금 수 만 명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하늘 성공자로 삼으시고, 어떤 사람을 불러서 큰 성전으로 삼으시는가 하는 모델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등대가 필요한 곳은 풍랑이 일어나지 않고 위험이 전혀 없는 곳이 아닙니다.  가장 험악한 항구, 쉽게 길을 잃어버리거나 파선할 위험이 많은 그곳에 큰 등대를 세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합 왕과 이세벨의 사악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죄악으로 가장 캄캄해졌을 그 때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지자 엘리야를 세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시대가 어려울수록 능력 있는 믿음의 사람을 세우십니다.  시대가 타락하고 혼탁할수록, 시대가 어두울수록 강한 빛을 발할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십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악한 왕 아합에게 이런 말을 하고는 유성처럼 사라졌습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엘리야의 이 말에 아합 왕은 한편으로는 대노하고, 한편으로는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에게 엘리야를 잡아오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을 좇아 아합 왕을 피하여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면서 마지막 몇 방울 남지 안은 시냇물을 마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는 그릿 시냇물도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방땅 사르밧으로 보냅니다.  어쩌면 엘리야는 마음속으로 사람을 그리워하고 살았던 터라 이곳에서 힘있고 부유한 어떤 사람을 만나리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마지막 한 웅큼 남은 가루로 떡을 만들어 먹고는 부득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약하고도 가난한 이름 없는 한 과부와 어린 외아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계속되는 가뭄으로 산과 들이 타 들어가고, 물 한 방울 얻을 수 없어서 산천도 인심도 메마른 때입니다.  더구나 가루 한 웅큼의 마지막 한 끼 밖에 남은 것이 없는 이 가난한 과부에게 그 남은 한 웅큼으로 떡을 만들어서 가져오라고 요청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을 벗어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남의 목숨을 끊자는 잔인한 행동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5절을 보면, 이 이름 없는 과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16절입니다.  본문 16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바로 거기에서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기적이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날 때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 속에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생각했던 이 여인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여기에서 여러 날은 3년이나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먼저'라는 말에 시선을 집중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은 나중에 해도 되는 어떤 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가장 먼저 해야 할 최우선의 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중에 들어도 되는 여러 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가장 먼저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우선 순위를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삶에서 우선 순위가 바뀌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 인생의 우선 순위를 확실히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한 마디로 내 신앙생활은 '먼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남은 찌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의 것을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먼저 드리고 있습니까?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머지를 드립니까?
자신을 위하여 풍성히 쓴 다음에, 자신을 위한 모든 계획이 다 끝난 다음에 그 남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십니까?

사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자면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토록 연약하고 가난한 사르밧 과부를 선택하셨는가?"
"최소한 국내 대신 오바댜에게로 엘리야를 보낼 수는 없었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대 재벌이나 권력자를 통해서 교회의 부흥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맡기셨더라면 좋았을텐데 우리처럼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큰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가?  대통령이나 재벌들, 잘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주님이 원하시는 그 엄청난 교회를 세우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부족하고 못난 우리에게 이 영광스런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오래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장 27절 이하에 보면 우리들의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류 창조 이래로 부하거나 위대한 자, 강한 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자를 물리치셨습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를 버리셨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하고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멸시받고 없는 자들을 택하셔서 세상에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는 잘난 사람들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역사가 아니라 못나고 가난한 사람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위대성을 드러낸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연약한 나를 들어서 쓰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를 모아서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름 없는 과부를 보십시오.  삶의 여유도 없이 살아가던 당대의 가장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녀에게는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요 의지할 수 있는 남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특별한 수입도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고 자식과 함께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지지리도 못나고 가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지막 남은 그것을 내어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교회는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나를 통해서 비범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의 피 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희생의 터전 위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애굽의 왕관을 내어버리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한나에게는 눈물로 얻은 아들 사무엘을 성전의 나실인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과부에게는 자신과 아들의 생명을 맡기는 각오로 마지막 남은 한 웅큼의 가루를 내어놓으라고 하십니다.

왜 그래야만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절대적인 희생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위탁과 전적인 사랑의 비밀을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로는 건설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로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한 웅큼의 가루를 바치는 그 정신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밤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의 순간에 더 큰 믿음이 빛을 발합니다.  시대가 영적으로 어둡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은 더욱 빛나는 사람들과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참으로 영적으로 어려운 한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이 안됩니다.  많은 개척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큰 예배당이 경매로 나오고, 이방 종교에 팔려갑니다.  불신자들을 향한 전도의 길이 막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나빠졌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결국 이 모든 일들이 주님께서 예언하신 종말의 징조들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처럼 영적으로 큰 가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요, 우리 언양영신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1788년의 영국은 지금의 호주 지역을 죄수들의 감옥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호주가 그렇게 큰 땅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남쪽은 사막 지대요, 북쪽은 늪지대요, 동쪽은 바다였습니다.  그리고 서쪽도 산이 아주 높고 울창해서 그곳으로 가기만 하면 다 굶어 죽고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변가에 감옥소를 지어 놓고 죄수들을 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인구는 자꾸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이 작은 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고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 명의 청년이 결심을 했습니다.  "저 험준한 산, 올라갔다가 내려오지도 못하고 다 죽은 저 산에 우리가 도전을 하자"  그래서 그들은 서쪽의 웅장하고 울창한, 그 불가능의 산에 도전을 했습니다.  세 청년이 힘을 합하여 산에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음식도 떨어지고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서 보니까 산너머 저편, 서쪽에는 광활한 평야가 쫙 펼쳐져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자기 조상들, 선배들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신천신지, 대평원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점차 호주는 각광받는 땅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21세기 지금의 호주는 기회의 땅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죽음의 산맥, 다른 사람들이 포기하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그 산을 넘었더니 상상할 수 없었던 큰 평야가 그들 앞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의 죽음을 극복하면 새로운 희망과 소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위험한 상황과 한계를 극복하고 일어서면 그 다음에는 새로운 땅,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늘의 보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위기의 큰 산맥을 넘어서면 넓은 평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힘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소망이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기적적인 축복이 필요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혹독한 가뭄을 만났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기 '사르밧'이라는 이름의 뜻은 '녹이는 집'이라는 뜻으로 시련의 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련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시련을 당하고 있는 지극히 가난하고도 연약한 한 과부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 시련의 땅에서도 자신을 희생하면서 순종하는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련의 땅에서 극한 시련을 당하고 있는 그 집에 하나님의 사람이 찾아온 것은 그의 남은 것을 빼앗고 더 힘들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가정을 축복하시고자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연단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모든 욕심을 다 녹이고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지금 당신은 시련의 땅에 던져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엘리야와 한 과부의 가정처럼 믿음으로 연단하고자 시련의 땅에 던져진 것입니다.  세상적인 모든 욕심을 다 녹여버리고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세우심을 받고자 시련의 땅에 던져진 것입니다.

어떤 시련일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가?  삶의 극한적인 어려움에 내던져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바라보겠는가?  먼저 하나님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우선주의로 살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시련의 땅에서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현실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내 현실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역사만 보지 말고, 내 역사의 뒤편에서 운행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우리가 나를 도우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 때문에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부요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면 나는 분명히 부요한 사람입니다.  내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나는 분명히 강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힘들어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현실의 상황 때문에 낙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의 심령에 희망을 불어 넣어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빈 잔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 여호와, 그분이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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