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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상-소명 그리고 사명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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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소명 그리고 사명 (눅 5:1~11)


1. 저희 집에 같이 사는 초등학교 1학년 여자가 한 명 있습니다. 이 여학생이 방학이 되기 전에는 방학이 빨리 되면 좋겠다고 노래를 하더군요. 그럼 너무 재미있는 일이 많을 거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방학을 해도 별로 신나지 않는지 왜 이렇게 지루한지 모르겠다고 종종 이야기를 합니다. 언젠가는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합니다. 할 말이 없더군요. 

이런 엉뚱한 딸의 일기장을 가끔씩 읽어보는 것이 요즘 저의 잔잔한 즐거움입니다. 언젠가는 친구와 더 놀고 싶었는데 그만 놀라고 해서 기분이 언짢은 것을 일기에 썼는데 하늘을 날아갈 것 같다고 적어놨더군요. 친구와 더 놀지 못해서 하늘을 날아갈 것 같다? 한참 배꼽을 잡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루하루의 일상이 행복하십니까? 

2.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4개의 복음서가 모두 베드로의 소명장면을 묘사하는데 가장 길고 독특한 묘사를 하는 것이 누가복음서입니다. 게다가 베드로의 소명장면과 베드로 장모를 치유하시는 내용의 순서가 다른 복음서들과 다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경우 예수님이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등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의 기록은 순서가 다르지요. 4장 38절에 먼저 베드로의 집을 찾아가셔서 그의 장모를 치유해주시는 것으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지는 겁니다. 즉, 누가의 설명을 따르자면 지금 바닷가에서 동료들과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만남은 처음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혹시 처음이라도 베드로는 적어도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장모님을 치유해주실 때 직접 목격을 했던지 아니면 출타 중인 관계로 후에 간접적으로 들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38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을 떠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을 앓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 여자를 두고 청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을 방문하신 것은 그의 장모를 치유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발견합니다.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가셨는데 마침 장모의 열병이 심하여 치유사역을 하신 것이지요. 저는 그것이 아마도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고자 하신 것이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베드로가 없어서 응답을 못했든지 아니면 장모님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음에도 망설이고 응답을 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리고 운명의 날, 베드로 생애에 잊을 수 없는 날이 밝았습니다. 그는 밤새 수고한 보람도 없이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채 한 숨을 쉬며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장모의 치유관계로 직간접적으로 마주한 적이 있는 예수님과 베드로! 이제 먹을 것을 걱정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는 베드로의 일터, 그의 일상에서 서로 마주하게 됩니다. 

3. 이번 여름에 휴가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시원한 산골짜기의 계곡으로 가셨습니까? 아니면 갈매기가 울어대는 바다 해수욕장으로 가셨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피곤하기만 하니까 그냥 집에서 여유를 즐기셨습니까? 

휴가와 관련해서 흔히들 일상탈출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일상을 탈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상이라는 것이 지루하고 따분하고 재미없고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그래서일까요? 휴가나 연휴를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할 때에는 언제나 연휴병과 같은 후유증이 있곤 합니다.

그런가 하면 몇 년 전부터 금융권에서는 10억만들기가 유행인데 이것도 순전히 현재의 내 일상을 인정하기 실고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잘 투영된 상품입니다. 왜 10억일까요? 지난 2006년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자료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 순자산으로 10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재산순위 상위 5%에 해당하더군요. 다시 말하면 10억만들기란 재산순위 5%에 들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이래저래 요즘 우리들이 하루하루라고 부르는 일상은 수난을 당하는 중입니다. 뭔가 경제적으로 대박이 터져서 벗어나야할 악의 수렁인가 하면, 피곤하기만 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니 빨리 휴가를 가서 일상적인 일들은 다 잊어버리고 싶다고 합니다. 이러면 일상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전혀 주목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일상에 대해서 관심을 잘 갖지 않습니다. 휴가에 막대한 관심을 갖지만 나의 일상이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별로 집중하지 못합니다. 

4. 일상과 휴가의 불편한 관계는 신앙생활의 경우에도 비슷한 분석이 가능합니다. 신앙생활은 예배와 기도 그리고 금식과 같은 특별한 시간이 있고 그 외의 일상생활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 그러면 예배, 기도, 집회와 같은 것만 떠올리지 일상을 생각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변화되는 특별 집회와 예배를 비롯한 영성추구는 뜨거운 불을 사용하여 만들어내는 금방 조리된 요리라면, 일상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지고 다듬어 가시는 생활신앙을 추구하는 영성은 오랜 발효시간을 거쳐서 비로소 제 맛을 내는 포도주, 된장, 고추장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영적 성장이나 신앙회복을 위해서 “특별산상집회, 특별치유집회, 특별말씀집회, 특별은사집회, 특별영성집회, 특별수양회 등!”을 떠올리고 참여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일상생활에 투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 우리 신앙의 결정적인 결단들은 언제나 특별한 집회 혹은 다양한 예배와 기도시간에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집회와 프로그램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지요. 지친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 특별한 휴가가 필요하듯이 신앙에도 특별한 계기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특별한 것, 즉 휴가 혹은 특별집회를 통해서만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점입니다. 일상생활은 문제가 그대로 있는데 그것은 무시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서 받는 은혜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옳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아도 현실 즉 일상을 변화시킬 의지가 없습니다. 삶이 변하지 않은 믿음의 결단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학생이 공부를 하면서 학기 중에 집중하지 않고 매일같이 방학만 기대한다면 그게 제대로 된 공부가 되겠습니까? 만약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이 휴가만 생각하고 거기에만 집중한다면 제대로 된 근무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리스도인이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집중하지 못하고 매번 특별집회 혹은 주일의 예배만을 기대한다면 그것이 건강한 신앙생활로 이어질 수 있겠습니까? 

5.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일상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한 현장입니다. 그들이 소명과 사명을 경험한 현장은 대부분 특별한 예배 혹은 집회의 자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지루하고 따분하며 걱정거리만 가득한 일상의 자리에서 믿음의 영웅들은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도망자의 신분으로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의 일상을 보내고 있던 모세! 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현장은 제사를 드리거나 기도하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며 호렙산으로 향하던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출3:1-2)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영웅 기드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심지어 조금은 부끄러운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지요. 당시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던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밀을 타작하다가 갑자기 조금은 황당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특별한 집회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기도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일상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삿6:11-12) 
12제자 중의 하나인 마태는 어떻습니까? 그는 자신의 직업이었던 세무공무원의 자리를 충실히 지키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 그 역시 자신의 일상의 일터인 호숫가에서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해 낙심한 채로 가족들에게 무엇으로 먹일까 염려하며 그물을 깁다가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소명장면은 거의 예외가 없이 그들의 아주 평범한 일상입니다. 매일같이 하던 일을 하던 중에 갑작스런 하나님의 침입해 들어오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경험은 흥미롭습니다. 일상에서 불러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사명자가 됩니다. 소명자가 곧 사명자가 됩니다. 그들의 일상에서 말이지요. 이것은 곱씹어 볼 일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베드로의 경우를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합시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를 일상 중에 찾아가셨을까요?

6. 첫째, 일상을 말씀으로 새롭게 질서를 잡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의 일상으로 찾아오십니다. 
본문 말씀 5장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는 베드로의 배였습니다. 그리고 요청을 하십니다. 육지에서 조금 떼어도 되겠소?”

이미 장모의 병을 치유하는 자리에서 만났거나 간접적으로 들은 적이 있는 선생님이 찾아오셔서 부탁을 하시니 허락을 하고 맙니다. 사실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데 다시 배를 물위에 띄우는 것은 귀찮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의 집요한 부르심은 여기서 그치지를 않습니다. 

다음 상황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십니다. 베드로가 집중을 했는지 아니면 흘려들었는지 모르지만 말씀을 들은 것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 말씀을 전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고 명령을 하십니다. 여기서 뭔가 예수님의 태도의 변화를 느끼셨습니까? 처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려고 할 때는 공손한 부탁이었습니다.(5:3) 그런데 이제 말씀 후에는 명령을 하시는 겁니다. 더 이상한 것은 혈기왕성한 뱃사람 베드로가 오히려 순종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말씀의 능력이 지금 가족들의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베드로의 생각 자체를 바꾸어 버린 것이지요. 말씀이 그 순간에 베드로의 일상에 강력한 운동력으로 임한 것이지요. 진정한 말씀의 파워가 나타나는 곳이 어디입니까? 예배의 자리입니까? 현장입니까? 우리의 일상! 현장입니다. 일상에 말씀이 제대로 먹히니까 거친 뱃사람 베드로도 꼼짝을 못하는 것이지요. 베드로를 보십시오.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말씀의 운동력이 베드로의 일상을 바꾸어 버리신 것이지요. 이게 주님이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시는 이유입니다.

최근에 한국 프로야구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선두다툼이 치열합니다. 현재 1위가 기아 타이거즈라는 팀인데 이 팀이 8연승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기아경기를 중계하는 분이 멋진 말을 하더군요. “고기를 먹어본 사람이 고기를 먹듯이, 이겨본 사람이 이길 줄 안다.” 그렇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진정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일상에서 순종해보십시오. 그 희열을 경험해본 사람이 말씀의 맛을 아는 겁니다. 처음 주님은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러나 일단 말씀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그 파워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에도 베드로가 경험한 이 신비로움이 펼쳐지길 축복합니다. 이것은 놀라움입니다. 일상이 전혀 새로워집니다. 말씀으로 지배를 당하고 주님의 명령이 강력하게 선포되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7. 둘째, 주님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갈 때 가장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곳에 찾아오십니다. 
본문 5장 8절을 보십시오. “주여 나를 떠나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일상으로 들어오심을 경험하면서 베드로는 말씀의 힘에 사로잡혀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을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합니까? 만선이라고 노래를 불러야 할 터인데 오히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떠나달라고 고백을 하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예수님의 신적인 위엄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5절과 8절을 비교하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물을 던지겠다고 할 때에는 예수님을 단순히 “선생님”이라고 칭하지만, 만선의 기적을 경험하고선 “주님”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엄청난 변화가 베드로 안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기 자신의 죄인됨을 확인한 것입니다. 자신의 부정함을 확인하는 순간 견디지 못하여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지요. 온전히 밝은 빛과 같은 예수님 앞에 서 있어 보니 자신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털썩 주저앉은 것이에요.

그렇습니다. 일상에서 주님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정직한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죄인 된 나의 고백이 진정으로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인됨을 발견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예배를 드릴 때가 아닙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오히려 포장된 나를 만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일터, 일상은 어떤 곳입니까? 내 본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나의 본래적인 기질, 성격, 감추어 두었던 욕망, 그리고 사업의 실패와 실연 등으로 찢어지는 마음이 고스란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곳! 그곳은 다름 아닌 일상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 그 뱃사람 베드로의 기질이 제대로 살아있는 일상의 현장으로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나의 일상의 현장에도 주님은 동일하게 오시기 원하십니다. 
“나는 상처받은 죄인입니다. 가난합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속물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상처, 죄책감, 욕망, 질병과 같은 멀리하고 싶고 버리고 싶은 대상들과 화해하도록 요청을 하십니다. 

아무리 10억만들기 계획을 짜도 지금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휴가를 떠나도 지루한 일상은 그대로입니다. 차라리 현실의 나의 모습과 화해하십시오. 인정하십시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상처를 껴안고 욕망을 일상 속에 찾아오신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 시작은 우리의 일상을 정직한 고백의 현장으로 만들면서 시작됩니다. 조금은 멀고 돌아가는 길일지라도 우리를 진정으로 치유하실 주님과 함께 그 길을 떠납시다.

8. 셋째, 주님은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을 진정한 소명의 현장으로 변화시키시고 새로운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베드로의 일상을 침투해 들어가신 예수님은 이렇게도 놀랍게 베드로의 일상을 흔들어놓으셨습니다. 뒤집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제자의 삶을 살도록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소명의 현장은 베드로가 평생 붙들고 나간 사명의 현장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상을 신앙의 눈으로 주목하지 못한 것은 일상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상이 하나님의 은혜의 현장이며 그것이 경험되는 곳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제 모세처럼, 기드온처럼, 베드로와 마태처럼 우리도 우리의 일상의 현장에서 생활신앙인으로서의 부르심을 확고하게 경험하도록 합시다. 

“주님! 저의 삶의 일상에도 찾아와 주셔서 베드로의 일상을 놀랍도록 변화시키셨던 것처럼 변화시켜 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우리 안에 울려 퍼지게 되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소명과 사명을 주님께 받은 것이 뭔가 대단히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일은 일상에 찾아오신 주님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일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신의 일상에서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 신비를 알고 경험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자신의 배를 다시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지요. 

참된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참되게 주님을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상이 변화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기적의 일상으로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9.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마13:44)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화는 보화인데 밭에 감추어진 보화! 으리으리한 궁궐이나 보석상 진열대에 있는 보화가 아닙니다. 농부가 땅을 일구고 땀을 흘려야 하는 지루해보이고 답답해 보이는 일상인 밭에 감추어진 보화가 있으며, 그것이 천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님은 친히 “밭에 감추어진 보화”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분뇨냄새와 구정물냄새로 진동하는 마굿간의 말구유! 우리네 이웃인 마부들의 일상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 일상의 터전 위에 우리 주님은 보화로 오셨습니다. 평범한 이들의 일상의 현장에 보화로 오셔서 천국을 선물하신 주님!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천국은 손에 흙을 묻히고 땀을 흘리고 정직한 노동의 댓가를 구하는 일터에 있습니다.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부모와 자녀가 함께 밝은 웃음소리를 만들어가는 밭과 같은 가정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일상이지요. 

이와 같은 일상에 진정한 보화가 되시는 주님이 오셔서 말씀으로 승리하는 기쁨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일상에서 정직한 나를 만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 일상에서 소명과 사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찾아와 주시는 일상! 부르시는 일상! 사명을 맡기시는 일상! 바로 그곳이 보화이지요. 천국이지요.

10. 일상을 그렇게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은 썬데이 크리스찬의 오명을 벗고 주님께서 갈보리산 위의 십자가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신 길을 동행하는 삶입니다. 일상을 주님께 맡기고 걸어가는 삶은 땀을 흘리고 땅을 개간하면서 추수의 기쁨을 기대하는 농부의 삶입니다. 깊은 맛이 우러나기 까지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묵은 장맛, 포도주, 고추장, 된장과 같은 삶입니다. 

그 맛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묵은 장맛이 일품인 것처럼, 일상에서 주님을 깊이 경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깊은 맛이 우러나는 진정성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으로 부르시는 주님을 기대하여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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