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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한 자가 강한 이유 (대하 1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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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자가 강한 이유 (대하 13:1~22)


<세스 고딘>이 지은 <보랏빛 소가 온다>는 책의 추천의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저자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 초원을 여행했다. 수백 마리의 소떼를 보면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하지만 20분이 지나지 않아 창 밖의 풍경을 외면했다고 한다. 아마 그도 나처럼 지루했으리라. 그런데 소 떼 가운데서 보랏빛 소(purple cow)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고 몸을 벌떡 일으킬 것이다.> 사람들이 보랏빛 소에 깜짝 놀라는 이유는 그것이 놀라운 <파격>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파격을 찾고 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약자들은 날마다 똑같이 전해지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눕혔다>는 소식에 너무도 실망하고 있습니다. 약자는 백 번, 천 번을 싸워도 언제나 패배한다면, 약한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가끔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도 해야 세상이 살맛이 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격투기 경기가 열린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출전선수가 한 쪽은 우람한 어른이고, 한 쪽은 연약한 어린이라면 사람들이 올까요? 아무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과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광고 끝에 <어린이가 어른을 눕히는 놀라운 광경을 보시라!>는 내용이 붙어 있다면 다를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린이가 어른을 이기는 것을 보려고 몰려올 것입니다. 그것은 파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파격을 보여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광고를 내고 사람들을 모으고 계십니다. 그 광고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어린이가 어른을 이기고, 소년이 장군을 쓰러뜨리고, 약자가 강자를 눕힌다. 어리석어 보이는 자가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자를 이기고,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더 행복하다. 자, 와서 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펼쳐 놓으신 무대인 성경에는 이런 파격적 사건들이 무수히 많이 있었습니다. 소년 다윗이 장군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팔려온 노예인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파격으로 가득합니다. 상식이 무너집니다. 

여러분, 우리의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게 아닙니다. 싸우기도 전에 승패가 결정되어 있다면 출전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에게 말씀합니다. <와서 약자가 강자를 눕히는 것을 보라! 그리고 너도 링 위에 올라와 강자와 한 판 붙어!>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링 위에 올라가야 합니다. <싸우나마나 결과는 뻔한데, 난 포기하겠습니다> 이런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파격을 기대하면서, 약자인 내가 강자를 눕힐 것을 기대하면서 링에 올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역사의 링 위에서 벌어졌던 놀라운 한 판 승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말씀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이 남 왕국과 북 왕국으로 분열되었을 때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될 무렵 이스라엘은 남 왕국과 북 왕국 둘로 갈라졌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대치하듯, 당시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르호보암은 남 왕국 유다의 왕이 되었는데, 유다에 남은 지파는 겨우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 뿐이었습니다. 반면에 나머지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고, 여로보암은 사마리아에서 통치했습니다. 지파의 숫자로 보아도 북 왕국은 남 왕국의 다섯 배였습니다. 영토도 북 왕국이 훨씬 넓었습니다. 그러던 중 르호보암이 죽고 그 아들 아비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아비야와 북 왕국의 여로보암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있었는데,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전쟁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누가 보아도 결과가 뻔했습니다. 우선 동원된 군사의 숫자를 보면 남 왕국의 군대는 40만 명이었고, 북 왕국의 군대는 그 두 배인 8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고대 시대의 전쟁은 첨단 무기를 동원한 전쟁이 아니라, 일 대 일로 맞붙어 창검을 휘두르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숫자가 많은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게다가 양쪽 왕을 비교해 보아도 남 왕국의 아비야는 북 왕국의 여로보암에 비해 너무도 약했습니다. 여로보암은 일찍이 솔로몬 시대부터 용사로 인정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28절에 보면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청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인정을 받고 있을 때, 아비야는 어린 아이였을 것입니다. 그 후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이 되어 17년을 통치하고 죽은 후 이제야 아비야가 왕이 되었으니, 여로보암과 아비야의 나이 차이는 수십 년 차이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여로보암은 인생의 경험이 풍부했습니다. 그는 솔로몬의 신하로 살던 어느 날 아히야 선지자로부터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솔로몬은 그를 제거하려고 했고,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1장 40절을 보면 이 일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많은 위기가 그를 지혜롭고 용맹하게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그는 돌아와서 열 지파를 규합하여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전쟁 경험이 많았습니다. 역대하 12장 15절을 보면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고 했는데, 항상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여로보암이 많은 전쟁 경험을 가진 역전의 용사임을 말해 줍니다. 그는 싸워 이기는 법을 아는 사람, 전술 전략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남 왕국의 아비야는 이제 막 왕이 되어 전쟁 경험이 없었습니다. 이 전쟁은 어느 모로 보아도 북 왕국 이스라엘의 승리가 뻔했습니다. 북 왕국은 우람한 어른과 같고, 남 왕국은 약한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더구나 아비야는 스마라임에서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전술을 펼치기보다는 상대방을 향해 전쟁을 그만 두라고 충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좋게 말하면 심리전을 펼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쓸 데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가 북 왕국의 군사들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본문 4절 이하를 보십시오. <아비야가 에브라임 산 중 스마라임 산 위에 서서 이르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무리들아 다 들으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일어나 자기의 주를 배반하고 난봉꾼과 잡배가 모여 따르므로 스스로 강하게 되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대적하였으나 그 때에 르호보암이 어리고 마음이 연약하여 그들의 입을 능히 막지 못하였었느니라> 

아비야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히 이스라엘을 주셨는데, 여로보암이 다윗의 가문을 배반하고 난봉꾼과 잡배들을 모아 북 왕국을 세웠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전쟁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어찌 보면 아무런 소용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비야가 이런 말들을 하는 동안에 여로보암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술대로 착착 진행시켰습니다. 그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쪽을 남 왕국의 군사 뒤쪽으로 돌아가 매복을 하게 했습니다. 아비야는 자신들이 포위를 당하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북 왕국의 군사들이 일어나 치게 될 때서야 자신들이 포위당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13-14절을 보십시오.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하였으므로 그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고 그 뒤에는 복병이 있는지라 유다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자기 앞뒤의 적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부니라> 

그들은 몹시 당황하여 부르짖었습니다. 다 죽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말 위기였습니다.그러나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파격이 등장했습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한쪽이 무너져 도망을 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도망하는 것은 숫자도 적고 포위당했던 남 왕국의 군사가 아니라, 수도 많고 포위를 했던 북 왕국이었습니다. 

그 날 북 왕국의 군사가 무려 50만 명이나 죽음을 당했고, 남 왕국 유다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약한 어린아이가 우람한 어른을 눕히는 파격적인 승리의 순간이었습니다. 북 왕국은 항복을 했고, 아비야는 북 왕국의 중요한 성읍들을 차지했습니다. 이 패전 후유증으로 여로보암은 소생하지 못하고 죽었고 아비야는 점차 강성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가 이런 승리를 거두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어린이가 어른을 이기는 놀라운 일이 있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랏빛 소를 보여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승리는 어떻게 가능하였습니까?
  

첫째로, 아비야와 남 왕국의 군사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비야가 두 배나 강한 북 왕국 군사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용기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10절 전반부를 보세요.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또 12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전쟁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 아비야가 한 가지 분명히 믿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사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은 아비야 왕만 보인 게 아닙니다. 백성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율법에서 가르친 대로 한 것입니다. 

민수기 10장 10절을 보면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들은 모두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비야가 믿는 대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15절 이하를 보십시오.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 앞에서 도망하는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므로 아비야와 그의 백성이 크게 무찌르니> 할렐루야! 남 왕국의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18절은 <이는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우리를 둘러싼 적은 너무도 강합니다. 그러나 이런 약한 우리를 진정으로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버트 머레이 맥췌인>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꾼들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무서운 무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무서운 무기처럼 강해집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께 붙잡혀 승리를 거둡니까? 처음부터 강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전에 우리교회에도 다녀간 전병욱 목사님의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여러 왕들이 있었다. 그 중에 외교에 능한 왕, 군사에 능한 왕들이 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외교에 능한 왕, 군사에 능한 왕은 하나같이 ‘악한 왕'이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여러 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사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야 31장 1절을 보면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라고 경고한다.....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잔재주‘가 없어야 한다. 

신앙교육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절박한 상황,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놓인다 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게 만드는 훈련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무능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만 의존하는 것이 우왕좌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은 현장에서 언제나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존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라면,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하나님의 무기일 것이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전쟁의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게 아닙니다. 사무엘상 14장 6절에 보면 요나단이 자기 수하에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약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전적으로 매달리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승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객관적으로 약세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늘 자신감에 넘쳐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교통사고로 여섯 식구가 모두 죽을 뻔한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1/100초를 빨리 갔어도 죽었고, 1/100초를 늦게 갔어도 죽었을 그런 사고였다. 경찰도 혀를 내두를 만큼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우리 집 여섯 식구는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 나는 그것을 절대로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으로, 치밀하고 정교하신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 가족과 사고를 낸 사람까지 보호해 주셨다고 확신하고 있다. ...... 나는 나의 무능함과 무지함을 안다. 때문에 나의 인생을 나의 마음대로 산다면 처음에는 조금 좋아 보일는지 모르나 결국에는 사망과 실패와 고통이 끊이지 않을 것을 나는 안다. 나는 나의 인생과 온 삶을 그 분에게 맡기고 살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그 분은 우리가 새 대가리라고 천박하게 놀리는 그 하찮아 보이는 새들에게까지 때와 시간을 가르쳐 주시고, 날아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시며 또한 목적까지도 날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 아니신가?>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약자입니다.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사실은 강한 사람입니다. 약한 사람이 강해지는 비결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강자가 됩니다. 여러분,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강자가 되십시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실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목회를 하겠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강단에 서겠습니다. 여러 교우님들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업을 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고 공부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녀를 키우십시오. 하나님만 의지하고 투병하십시오. 그런 믿음으로 봉사하고 전도하십시오. 인생을 살아나가십시오. 우리 그렇게 교회를 섬기길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상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아비야 왕이 거둔 승리가 어떻게 가능하였는가에 대하여 앞에서 “첫째로, 아비야와 남 왕국의 군사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둘째로“는 왜 말하지 않는가>, 의아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개봉박두! 그것은 다음 주일 몫으로 미루겠습니다. 약한 자가 강하게 되어 승리하는 비결을 배우시고, 그렇게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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