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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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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주간 묵상을 통해 히브리서를 읽는 중에 이번 주에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자주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 중에 하나는 ‘대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히브리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계명과 제사법을 따라 아론을 첫 번째 대제사장으로 세운 이후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 가운데서 제사장을 세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매년 한 번씩 대속죄일에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 모든 백성들의 죄를 사함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이처럼 대단히 중요한 일을 맡은 대제사장은 그만큼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히브리서를 쓴 사람이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과 그분이 드린 새 언약의 제사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레위 지파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움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독특한 제사장 직분입니다.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  속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으니 근본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없는 혈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대제사장, 그것도 큰 대제사장이라고 불렀습니다(히4:14).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단 번에 희생제물로 드림으로 피 흘리는 제사를 완성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4:14)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그의 대제사장 되심 이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도리입니다. 이것을 믿고 동의하는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강조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고 합니다.   ‘사도’ 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보냄을 받은 아들이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대제사장’ 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희생제사로 드리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장과 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이지만 죄인을 구원하러 오시려고 자기를 낮추어 천사보다 조금 못한 모양으로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맛보신 분이십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조상 아브라함보다도 크시고 위대한 지도자 모세보다도 더 크신 분이십니다. 그런 크신 분이 우리와 동일한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또 우리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불러주셨습니다(히2:11, 13).   

그분은 우리처럼 혈과 육을 가진 사람으로 오셔서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매여 일생동안 종 노릇하는 우리 죄인들을 자유하게 하신 대제사장이십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우리 사람들처럼 되어 스스로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니 시험받는 모든 사람들을 또한 능히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여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 즉 우리 믿음의 고백의 사도시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합시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선포하는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나에게 예수는 누구신가요?  내가 고백하고 따르는 예수는 누구신가요?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방문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광야에서 복음을 외치는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등 위대한 선지자와 동급의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평가였습니다. 아니 대단한 존경이 담긴 평가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답을 들으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는 시몬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베드로를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때로부터 제자들에게 당신이 사람들에게 받게 될 고난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는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할 것이라는 제자의 도를 처음 말씀하신 시기도 제자들이 예수가 누구신 줄 올바로 고백한 그때부터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는 바로 예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며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도로서 이 믿음의 교리를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향하여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찬송가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가사에 작시자가 고백하는 내용이 잘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 그런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가난하고 슬프고 낮은 자에게 위로와 풍요와 존귀와 자유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고백이 1절의 내용에만 머무는 수도 있습니다.

그분은 다만 나의 서글픔과 외로움과 답답함, 나의 맺힌 한을 풀어주시는 분이시고, 내 위기 상황의 구원자이며, 나의 필요와 내 인생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러 오신 해결사 정도로만 계시는 분인가요?  어쩌면 우리들 가운데 1절의 고백에 안주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께 대한 우리의 고백은 그 다음 단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분은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의 생명이시며, 더러움을 정결케 하시고 멸망할 자의 구원이시며 교회의 머리와 만국인의 구주시고 모든 왕의 왕이요 심판하실 주님이며 우리의 영광입니다. 지금 나의 고백, 내가 믿는 도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대한 나의 고백은 어디에 와 있습니까?

히브리서를 주의 깊게 읽다보면 ‘생각하라’는 명령어가 여러 차례 반복되어 나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생각하라’로 동일하게 번역되었지만 영어 성경은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살려 상황에 따라 ‘consider’(3:1, 12:3), ‘remember’ (10:32, 13:3,7), 혹은 ‘think’(7:4, 10:29)로 번역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생각하라’는 말은 ‘consider’, 말 그대로 ‘깊이 생각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신앙고백 위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굳게 세워가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으로 복음을 오해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단언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예수가 누구신지 올바로 알지 못한 채 자기 편리한 이해와 해석에서 나온 잘못된 복음과 잘못된 예수 고백으로 살며 교회 출석도 곧잘 합니다. 그 중에는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는 믿음의 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함이요 잘못된 믿음을 굳세게 붙들고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진정 내 믿음 고백의 사도시고 대제사장이십니까?     

교회 출입을 오래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았다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임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얼마나 깊이 알고 그분을 본받아 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주로 올바로 고백하고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나의 삶이 오늘도 계속하여 변화되며 성장해가고 있는가?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만나고 또 성장하는 힘을 얻습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감정을 적절하게 자극하는 대중집회나 모임에서 콧물 눈물 흘리던 그 벅찬 감정을 내 믿음의 전부로 판단하지 말고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사람의 감정만큼 가볍고 간사하게 변하기 쉬운 것이 또 있을까요?

히브리서가 지적하는 것처럼 말씀의 초보,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머물러 젖을 먹는 어린아이로 머물지 말고 단단한 식물도 먹고 소화시키는 어른으로 성장하십시오(히5:12-6:1).  수십 년 교회를 출입해도 여전히 초보에 머물러 감정에 끌려 다니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날 그날 내  기분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내 기분이 좋으면 믿음도 덩달아 좋다고 느끼고 그날 기분 상하는 일이 있으면 믿음도 추락하는 느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초보 말고 오늘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들고 예수께서 원하시는 분량까지,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장성한 사람으로 날마다 자라가십시오.   

초보에 머무는 어린아이의 특징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내가 직접 깨닫고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임으로 고백하고 따르기 보다는 예수님에 대하여 대충 들은 정보와 지식을 전부로 여기고 그것만 의지하고 굳세게 사는 분들도 많습니다. 성경을 도통 읽지 않고 성실하게 배우지도 않으면서 관록과 체험만으로 믿음생활하려 듭니다. 처음 은혜 받았을 때 읽었던 성경, 주일 아침 설교시간에 읽고 들은 말씀 그것만 가지고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성경을 그정도만 알면 예수님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나의 관계는 이상무라고 자신만만합니다.    

건강한 믿음은 하늘로부터 매일 나에게 내리는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옛날에 먹었던 말씀, 일 주일에 한 번 먹는 영의 양식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시는 분들은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 신앙의 기초가 복음이 아니고 세월이나 직분과 세상 관록이 되면 머지 않아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무너집니다. 무너질 때는 먼지를 풀풀 날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교인이 되고 맙니다. 내가 말씀에서 그리고 나의 삶에서 만나고 교제하고 따르는 예수는 어떤 분이신지 깊이 생각하며 신앙생활합니까?    

앞에서 언급했던 잘못된 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가 교회 안에까지 밀려와 교인들을 잘못 인도합니다. 그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잘못된 교회와 교인은 이기적인 성공지향주의 집단  혹은 성공병에 들린 광신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한 때 노만 빈센트 필의 ‘적극적인 사고’ 가 미국 교회의 성공 복음처럼 전파되어 많은 목회자들이 그를 추종하였고 한국 교회까지 그 영향력이 대단하였습니다.  그후에 미국 크리스탈 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가 그의 영향을 받아 불가능은 없다는 ‘긍정적인 사고’ 를 선포하였습니다. 미국은 물론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이 그 교회처럼 대형교회가 되기를 꿈꾸며 미국까지 찾아가 소위 성공한 교회를 견학하고 로버트 슐러의 긍정적 사고를 배워 성공하는 목회를 하겠다고 열심히 세미나에 참석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사람들의 뒤를 이어 조엘 오스틴이 선전하는 ‘긍정의 힘’이라는 인간 냄새 솔솔 풍기는 사상이 마치 기독교의 복음인양 가면을 쓰고 교회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습니다.  ‘당신이 믿는대로 된다’고 말하는 그 사람은 마음으로 믿는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교회 강단에서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그런데 그의 책을 읽다보면 그가 믿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긍정의 힘’이라는 것이 금방 드러납니다.    

그 사람 말에 의하면  죄와 심판, 고난과 죽음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은 그리스도인들에 불필요합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긍정적인 생각’ 만 필요하며 그 결과로 얻는 성공이 구원으로 해석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없고 죄와 용서함이 없는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자기 최면술이고 복음을 가장한 거짓 교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다만 자기 주장을 보증받기 위하여 가끔 필요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라는 물음에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내 개인 고백이 없다면 그분은 그저 위대한 인물,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와 나를 어려움으로부터 이끌어주는 힘 있는 도우미 정도에 머물 뿐입니다. 그가 나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그분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그를 부리는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로자 또는 상한 감정의 치유자로 이해하고 의지하고 싶습니까?    좋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러 오셨고 그것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본 받는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슬며시 건너뛰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영광과 평안의 열매만 기대해도 될까요?    

찬송가 185장 ‘내 너를 위하여’ 에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사하여 살 길을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 주느냐?  내 너를 위하여 내 몸을 주었고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는 구절이 나옵니다.   주께서 이렇게 물으실 때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주님 제가 할 일이 없군요.   저는 그저 기도만 하고 위로만 받아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하려니 힘도 없고 용기도 없고 솔직히 귀찮고 부담스럽군요. 그냥 주님의 넓은 품에 포근히 안겨 있기만 하면 안될까요?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은혜만 받아누리고 부담 없이 편안하게 지내고 싶어요.’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나는 아닙니까?        

내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몸이 크면 덩치만 큰 애어른이 됩니다. 어릴 때는 ‘이쁘다, 귀엽다, 착하다’는 칭찬 듣는 것이 재미있지만 더 자라면 스스로 책임 질 일이 많아집니다. 어릴 때는 일을 저지르고 실수해도 ‘이쁘다’ 하고 지나가지만 더 크면 꾸중도 듣고 회초리도 맞으며 자기 책임을 하는 아이로 자라갑니다.  때가 되면 아무 부담 없이 칭찬만 듣던 자리에서 스스로 움직이고 남을 돕고 섬기는 자리로 변화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쉬운 일, 남에게 잘 드러나고 생색도 나는 일, 나 좋은 일만 골라서 하던 것은 철 없는 어린아이적  일이고 어른이면 남이 기피하고 귀찮아하고 힘든 일도 기쁨으로 나서서 책임 질 줄 아는 법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젖이나 먹는 초보에 머물뿐입니다.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내 인생관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필요와 위로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분 덕에 내가 사람들 앞에 폼이 나고 높아지고 사람들에게 잘했다 칭찬듣고 존경받고 싶은 것이 그분을 따르는 목표가 아닙니다.  그분이 나를 위하여 낮아지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을 깊이 생각하고 나 같은 비천한 사람을 사랑하심에 감격하여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그분이 나의 전부와 왕이 되십니다. 그분을 본 받기로 결단하고 주님의 뒤를 따를 때 그의 제자가 되고 그분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세상으로 보냄을 받으셨을 때 자기를 사도와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한 것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자기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사양하고 땅으로 낮아져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며 날마다 신앙의 진보를 나타내는 교회 성도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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