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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 (시 13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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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 (시 139:1~16)
  

19세기 자유정신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는 
프리드리히 니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1844년 라이프치히 근처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명문 포르타 공립학교에 다녔으며, 
본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가 고전문헌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자유정신이란 그 어떤 체계와 규율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극히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방랑하는 정신, 관습적인 것에서 해방된 정신, 
또 수없이 많은 대립적인 사유방식에 이르는 길을 허용하는 정신을 말합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관념적인 절대적 진리를 부정했으며, 
힘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초인, 영원회귀 등의 사상을 제시하면서 
근대 세계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몸부림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가상하긴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불쌍한 한 영혼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니체는 
다음해 1월 토리노에서 졸도하였고, 
이후 정신착란 상태로 살다가 1900년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56세)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입니다. 
버젓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기가 만나지 못했다고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불행한 사람이요,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니 부패하고 가증한 삶, 결국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시10:4를 보면, 악인은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고 하며 
계속 악을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온갖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두려워할 줄도 모르는 화인 맞은 양심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성의 어떤 것도 취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수6:18-19)
그런데 아간 장군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시날 산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 오십 세겔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혼자 쾌재를 불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고 계셨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성에서 참패를 당하게 되었으며,
결국 아골 골짜기에서 그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하였습니다.(수7:16-26) 
욕심을 낸다고 해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알고 계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한 것입니다. 
결국 그 부부는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행5:1-11)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할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런 죄를 범치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에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믿음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의 형편과 사정을 잘 알고 계시며,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살피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숨을 수 없으며, 도망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불평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내 사정을 모르신다고, 
내 길은 하나님께 숨겨졌다(사40:27)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시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이렇게 탄식하게 됩니다. 
다윗도 시13:1-2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다윗은 지금 원수의 공격 앞에서 번민과 근심 속에 울부짖고 있으나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큼 속히 응답되지 않는 일로 인하여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사정을 돌보지 않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호소합니다. 

‘하나님, 어느 때까지입니까?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이러한 부르짖음은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동판매기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고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 참고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모르시는 분인가요? 
몰라서 응답을 주지 못하는 겁니까? 알면서도 능력이 없어 못하시는 겁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으셨습니다. 

시139:13-14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신묘막측하심)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깨닫고 보면, 하나님의 솜씨가 정말 기가 막힙니다. 
나는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기에 
나의 모든 것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시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욱 잘 아십니다. 
우리의 행동을 아시며, 우리의 생각을 아시며, 우리의 말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시며, 듣고 계시며 감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떠날 수 없으며 주님 앞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시139: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왜 피할 수 없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139:8-10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개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바다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저 산 속에 들어가도 거기에도 계십니다. 
울릉도에 가도 계시고, 제주도에 가도 계십니다. 
내 회사에 출근을 해도 거기에도 계시고, 퇴근을 해서 집에 와도 계십니다. 

운동을 하러 헬스장에 가도 거기 계시고, 수영장에 가도 거기 계십니다. 
땀 흘려 열심히 일할 때에도 거기 계시고, 조용히 쉬고 있을 때도 계십니다.
도서관에 가도 계시고, 영화관에 가도 계십니다. 
축구장에 가도 계시고, 야구장에 가도 계시며, 골프장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불가능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은 
나의 약점을 아실뿐만 아니라 강점을 아십니다. 
나의 관심이 무엇인지 아시고, 은사가 무엇인지 아십니다. 
나의 소원이 무엇인지도 아시고, 내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십니다. 

나의 과거를 아실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에 대해 모르시는 것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십니다. 가식을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시44:21에는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라고 했으며, 
삼상2:3에서 한나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면 나의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그냥 알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할렐루야!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그 백성의 고통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고통에서 건져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렇게 하십니다. 
모든 곤경에서 건져 주실 줄 믿습니다. 

때때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갔을 때 
아빠의 눈은 언제나 아이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안전할 때에는 가만히 두지만, 혹시나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아빠는 즉시 아이를 위험에서 건져줍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견딜 수 있을 때까지는 그대로 두십니다. 
감당할 시험밖에는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당치 못할 때에는 피할 길을 내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욥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은 나의 가는 길을 아십니다. 

내 길을 인도해 가실 때, 과정 속에 나를 단련하십니다. 
단련하는 과정 속에는 마치 하나님이 내 사정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단련하는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단련하신 후에는 순금같이 귀한 존재, 강한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오늘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자 단련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동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받을 때 흘리는 땀방울이 메달의 영광을 거두게 하듯 그렇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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