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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령한 사람 (고전 2: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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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사람 (고전 2:13~16)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일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복음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붇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지,참된 영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지적들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참된 영적인 삶을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현실에 확실하게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참된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드린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인 삶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입니다. 내가 성화된다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요,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며,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참된 영적인 삶을 제대로 깨달은 분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여건을 통해 모든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화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는 이 순간에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품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거룩됨 또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모습을 육에 속한 자 곧 육적인 사람,(고전2:14) 육신에 속한 자(고전3:1) 그리고 신령한 자 곧,영적인 사람(고전2:15)으로 말씀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프쉬코스 데 안드로스) 새 생명을 얻지 못한 상태의 자연인(표준역)을 뜻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 자연인(현대인의 성경)으로 영적이지 못한 사람(공동번역)으로 불신자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육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으로 한번 태어난 자연인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며,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에케는 영적인 진리들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이 지적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한 번 더 태어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어서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 갔다 나와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한번 태어난 육신과 지성으로,한 차원 위인 영적인 것에 대해 이해를 하려니 안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다닌 무리들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수 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요6: 27).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것은 떡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하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자연인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복음에 대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3: 3).
따라서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해가 안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의 본성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해도 그 안에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자아가 마음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그의 삶 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고전2 : 14). 
이것은 자연인이 무식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한사람이 자꾸 엉뚱한 질문을 해대고 반론을 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더랍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핵공학이라고 하여서 “핵이 소금으로 만들어진 것을 아시요?”했더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하고 의아해하더랍니다. 그래서 ’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핵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얼마나 웃깁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것은 내가 전공했으니 내가 좀 얘기하게 놔두시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무안해서 그냥 나가버리고 말더랍니다.
육적인 사람 영적인 생명이 그 안에 없어 진리에 대하여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노이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신앙 때문에 성령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연인의 본성에 더 지배 받아 육신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의미 한다고 봅니다.

예수는 믿는데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예수 안 믿는 것같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표준역)으로 아직도 영적인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처럼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므로 그 수준에 맞게 말하겠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본성은 자아가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예수님은 한편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거듭났다는 자체가 성화된 젓은 아닙니다. 이것이 가끔 혼동되는데,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 다루듯이 잘 보살피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진리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에 대해 질투심이 많고 잘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많습니다.


신령한 사람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 성령께서 내주 하시는 영적인 사람(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마음의 중심 보좌에 주님을 모시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이 성령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합니다.

그러나 내재하시되 얼마만큼 성령이 내 삶을 점령하셨는가는 또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내 가슴 속에 질투,분노 욕심 등이 확 차 있다면 성령님이 눌려서 활동하시기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마음속의 욕심,악독,분노,질투 같은 것을 자꾸 내버러서 비워 드릴 때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철저히 알아도 성령의 뜻을 대부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령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은 진리릍 배우고 싶어할 뿐 아니라이해를 잘 합니다. 설교를 들은 후 그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참 좋은 것 배웠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들은 것들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 집니다.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를 닮아갑니다. 그것은 지식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닮는 것과 지식이 느는 것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는다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을 갖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지식적으로 하나님 아는가 얼마나 봉사하고 있는가를 놓고 우리의 신령성을 가늠하시지 않습니다. 

평생 조용히 산골에 묻혀 살면서도 예수를 많이 닮아 신령성을 가진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크게 이름 내며 일하지 않았어도 그저 자그마한 일이나마 예수님을 닮은 신앙으로 묵묵히 해내며 죽어간 사람들이 구석구석 많이 잇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모릍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셨고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devotioo)하였나로 신령성의 척도틀 삼으십니다.
'헌신’(devotion)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헌신과 깊은 사랑이 합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 자신을 바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재주와 찬송과 열정뿐 아니라 나의 고민과 슬픔도 바치는 것입니다. 찬송은 바치면서 고민은 내가 붇들고 있으면 온전한 헌신이 아닙니다. 제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숨길 것 하나 없이 다 드리는 것,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얼마나 친숙한가 하는 친숙도로 하나님은 신령성을 판단하십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친숙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친숙하며,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며,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과 더 깊이 친숙할수록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가듯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신령성을 분별하십니다. 신령성은 주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을 나누는 두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친숙할수록 부부는 더 깊은 사랑과 교제률 나누게 되며 마침내 얼굴과 식성과 성격까지 닮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인격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나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가 신령성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신앙인인지 아닌지,또 어느 정도 영적인지 알아 보기릍 원한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여기서‘안다’고 하는 것은 막연히 상대방의 배경이나 현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친숙하게 상대방에 대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히 다니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인 사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신령성은 얼마나 그분을 닮았는가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도 어머니를 닯습니다. 아버지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은 아내를 압니다.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사랑한다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됩니다.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적인 사람 곧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 저 너머에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관한 일보다는 저 세상에 관한 일에 삶의 비중을 두고 힘을 쓰고 노력을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육안'에 믿음의 눈인 '영안'을 하나 더 가진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 분별력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분합니다. 그는 이 세상일을 멸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 받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추구하거나 쾌락에 몰두하는 일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기 때문에(약 4:4)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삽니다. 

반면 그는 하나님이 요구하고 성령이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소욕에는 적극적입니다. 그는 '영원'과 비교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앎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을 위하여 과감하게 투자합니다. 그는 삶에 있어서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압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오류가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족할 만큼 실수 없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비난받을 만큼 실수투성이의 삶은 살지 않습니다(15절).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와 가르침의 진정성을 압니다. 그의 가르침에 동조하고 굴복하며 순복하며 그 뜻에 따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영이 계시므로(롬 8:9) 그 영의 활동에 의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게 되며(11절) 그 뜻에 굴복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 청년부가 잠자는 영성을 깨우라는 주제로 수련회를 갖습니다. 영성이란 말을 성경에 없습니다. 신령함이 영성입니다. 신령한 사람으로서 참된 영성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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