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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전통-뿌리(1) (신 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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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전통-뿌리(1) (신 32:7~7)


전통(傳統)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계통을 이어받는다는 일차적 의미 외에 관습 가운데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특히 높은 규범적 의의(規範的 意義)를 지닌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 거룩한 전통이란 신앙전통을 말합니다. 민족해방의 달 8월을 맞이하여 우리의 신앙의 뿌리, 즉 신앙의 족보를 좇아 앞서간 신앙 조부들의 신앙과 호흡하기를 원합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어떤 단체를 막론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전통은 역사적 가치평가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 전통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오늘 이 시대에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건데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에서 공업사회로 전환하는 속도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빨랐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전반에 걸쳐 우리는 구라파의 300년, 미국의 200년, 일본의 100년을 불과 몇 십 년 만에 소화하는 장한 면이 있었습니다. 특히 지난 20년간의 성장은 구라파의 40년 성장과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 문화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세계 50대 교회 중에 20개 교회가 대한민국에 있다는 사실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Ⅰ. 우리민족의 기독교 수용시대 

조선왕조 500년 왕정시대와 조선 봉건사회의 신분제도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은 역사적인 요청이었습니다. 서구 문화가 물밀 듯이 밀어닥치자 쇄국의 몸부림도 아랑곳없이 기독교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형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유교가 사상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정치와 함께 유교의 윤리와 도덕성마저 타락하였습니다. 

조상신이 주신이 되어 백성들의 마음을 묶는 듯 했으나 날이 갈수록 민초들의 불만이 적지 아니했습니다. 허무주의 불교와 그로 인해 전국에 걸쳐 만연한 샤머니즘은 끝까지 백성들에게 더 이상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불교는 진정한 의미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형식적인 종교행위에 지나지 아니했습니다. 
국제 정세로 볼 때 당시의 조선왕조는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서구와 일본까지 포함된 자본주의 강대국이 우리나라를 침입해서 조성된 위협이었습니다. 

예컨대 목화가 일본으로 가면 솜이나 면으로 둔갑해서 한국시장에 비싼 값으로 등장했습니다. 누에고치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비단이 되어서 몇 배의 고가로 매매가 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안으로 봉건적 사회구조의 모순에 대한 위화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다운 삶과 자유를 옥죄는 신분제도에 대한 불평과 반발이었습니다. 
이렇게 국운이 안팎으로 위기에 봉착했을 때 기독교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구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항일과 항거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인본주의에 대한 자연스러운 도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는 봉건적 사회제도에 대하여 평등과 사랑을 강요했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지각 있는 백성들의 유일한 정신적인 활동무대가 되었습니다. 
국가의 수난과 함께 교회도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기독교는 고난 가운데서도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Ⅱ. 한국 기독교의 여명기(黎明期)

일본에 주재중인 미국 선교사들은 일본에 유학 온 한국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접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국 유학생들에게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메클레이(Robert S. Macliay)목사와 미국 성서공회 총무인 헨리 루미스(Henry Loomis)와 미국장로교회 낙스(George W. Knox)목사는 한국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수정(李樹庭)으로 하여금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하게 하였습니다. 당시에 미국교회는 한국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므로 굉장히 선교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더욱이 한국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도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지 아니했습니다. 메클레이 목사는 몇 해 전에 도쿄에서 김옥균(金玉均)을 만나 한국사정을 잘 알아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함께 한국에 건너와서 3개월 동안 체류하기로 했습니다. 김옥균을 통하여 국왕으로부터 한국에서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회보「Christian Advocate」라는 기관지에 한국에 대해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은 크게 부각되어 갔습니다. 

1) 의료사업을 통한 기독교의 활성화

중국으로 건너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Dr C. Allen)은 1년 동안 여러 곳을 다녔지만 만족할만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알렌 의사는 1884년 9월 14일에 상해를 떠나 7일 만인 9월 20일에 지금의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22일에 서울에 도착한 그는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주재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선교사가 한국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알렌 의사만은 허용되었습니다. 이때 민씨 일파의 보수파와 개화당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의 금위대장인 민영익이 중상을 입고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알렌은 자신의 일기에서 "중상자는 이미 출혈이 심하고 계속 피를 흘리고 있어서 반사 상태라…오른쪽 귀측 두개골 동맥에서 오른쪽 눈두덩이까지 칼자국이 나있고 목 옆쪽 경정맥도 세로로 상처가 나 있다…척추와 어깨뼈 사이로 근육표피가 잘리며 깊은 상처가 나 있다(Horace Allen Diary)"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 장안의 한의사 14명을 동원하여 보았으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러한 중에 혜성처럼 나타난 알렌박사는 민영익의 상처를 3개월 만에 완전히 낫게 했습니다. 1885년 1월 27일 민영익은 알렌 의사에게 사례의 편지와 함께 십만 금을 보냈습니다. 이때 서양 의술이 인정됨과 동시에 알렌은 궁중의사 즉, 어의(御醫)로 임명되었습니다. 

마침내 알렌은 예조판서 조병호를 통하여 병원설립 허가를 얻어 냈습니다. 그리고 갑신정변에 죽음을 당한 홍영식의 집을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이름을 짓고 그 곳을 병원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의료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국왕으로부터 3번이나 훈장을 받았습니다. 이때는 성경을 읽다가 발각되면 한국인은 목 베임을 당하고 외국인은 추방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 후에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가 들어왔습니다. 이어서 릴리아스 호튼 의사(Dr Lillias Horton)가 와서 광혜원의 여자부를 책임 맡는 동시에 왕비의 전속의사가 되었습니다. 그해 12월에는 서대문 밖(지금의 아현동)에 시약소(施藥所)가 개설되었습니다. 

서양의사와 병원은 이름 모를 질병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는 더없이 시원한 생수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서울과 지방의 의료기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경성)에 광혜원(제중원, 세브란스 전신), 시병원 보구여관(근대적 여성병원), 평양에 기홀병원, 재중병원, 부산에 일신병원, 나병원, 원산에 원산 구세병원, 대구에 동산병원, 선천에 미동병원, 전주에 예수 병원, 개성 남성병원, 함흥에 제혜병원, 강계에 계례지 병원, 청주에 청주진료소, 해주에 해주구세 병원이 있었습니다. 

2) 교육사업을 통한 기독교의 활성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1859년 7월 1일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zabeth Grant Marrie)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웰즈가 교회 담임목사 알렉산더 와우(Alexander Waugh)박사의 손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언더우드가 다섯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외증조부와 언더우드는 유사성이 많았습니다. 특히 두 사람에게서 재림신앙이 강하게 작용된 글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재림에 대한 소망이 한국 교회에 그대로 전수되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성격이 집요했고 특히 성경번역 사업이나 기독교 교육사업에 착안했습니다. 

이태왕(고종)은 인물을 배양한다는 뜻의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5년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 붙어 있는 건물을 이용하여 고아원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경신 중, 고등학교와 연세대학의 모체였습니다. 

1886년에 스크랜튼이 이화학당을 세우고 장로교 선교부는 여자만을 위한 정신중고등학교를 1888년에 세웠습니다. 1894년에 숭실학교와 숭실여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06년에 숭실대학과 세브란스 의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09년에 이화학당내에 대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15년에 연희전문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기독교계 학교 수는 모두 823개교나 되었습니다. 일본총독 '데라우찌'는 그의 연설에서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학교의 학생수가 20만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실로 엄청난 교육사업의 대혁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서울과 지방의 대표적인 기독교 학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에 배재학당, 경신학당, 이화학당, 정신여학당, 부산에 일신여학교, 인천에 영화여학교, 평양에 숭실학교, 광성학교, 정의여학교, 숭의여학교, 전주에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군산에 일명학교, 멜보딘학교, 목포에 정명여학교, 대구에 신명여학교, 계성학교, 한영서원, 함흥에 영생여학교, 영생학교, 원산 루씨여학교, 보광학교, 수원에 삼일학교, 매향여학, 개성에 호수돈여학교, 미리흠여학교, 공주에 영명여학교, 영명학교, 선천에 신성학교, 보성여학교, 광주에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마산에 의신여학교, 강계에 영실학교, 순천에 매산학교, 성진에 보신학교, 보신여학교였습니다. 

3) 의료사업, 교육사업은 수단이고 선교사업이 목적이었습니다. 

1887년 언더우드 목사가 소래로 가서 일곱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선교사들은 날마다 노방전도를 시작했고,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집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1893년에 모인 제 1회 선교사 공의회에서는 선교정책이 채택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선교구역이 편성되고 순회전도와 선교지구가 확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에 상륙한 기독교는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도시와 농촌과 어촌과 산촌으로 번져가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의 여명기를 맞이했습니다. 


Ⅲ.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대항하는 한국교회

1) 105인 사건

105인 사건은 한국교회가 대 부흥 운동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한국 기독교가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 반정부 단체라는 일제의 인식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1903년 원산 대 부흥과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은 한국교회 일대 전환기였습니다. 이어서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을 통해 세계선교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당시에 일본 총독부는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1운동으로 인한 박해가 교회 전체에 대한 박해였다면 105인 사건은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박해였습니다. 1910년 11월 5일 압록강 철교 낙성식에 참석하려던 데라우찌 총독이 선천에 잠시 하차했습니다. 이때 한국의 기독교인이 그를 암살하려 했다고 모략 날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계 인사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승정, 유동열 등 700명을 체포했고 목사 6명, 장로 50명, 집사 80명을 포함하여 교회 지도자급 500명을 투옥시켰습니다. 그 중에 123명이 기소되었는데 98명이 기독교 신자였고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이 억지로 꾸며낸 음모였습니다. 
일제는 온갖 고문을 가하여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총독을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고 강제로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105인의 피고 중 가장 나이 어린 선우훈(鮮于燻)의 수기에서 일제의 강제 심문과정에서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길선주 목사의 아들 길진형은 그때 받은 고문에서 끝내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한국 주재 미국 선교사들은 이 105인 사건을 통해 일제가 한국교회를 말살하려는 거짓 음모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105인 사건이 말해주듯이 일제의 박해는 매우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습니다. 

2) 3·1 독립운동 

3·1운동은 일차적으로 일제의 강점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민족 국가의 등장과 무관하지 아니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의 선언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한 민족의 비폭력 민족독립운동입니다. 
3·1운동으로 인한 박해가 교회전체에 대한 것이었으나 민족 운동이나 독립운동과 관련시켜 볼 때 순수한 기독교의 박해라고 보기에는 다소 석연치 않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립선언서에 서명된 33인 중에 15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데서 이 운동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1운동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주권을 찬탈당한지 10년 만에 일어난 순수한 항일 운동임은 분명합니다. 
3·1운동은 우리 근대사에서 특히 민족주의 운동이라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1운동 이전의 민족운동은 무장을 한 의병들에 의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3·1운동이후의 민족운동은 무장을 하지 아니한 순수 계몽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은 이 두 가지를 합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3·1운동은 한국교회 역사에 마땅히 가치 있는 한 장을 차지하기에 충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국 근세사에서 실패한 역사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그 하나가 바로 일제 강점기 역사입니다. 그 두 번째가 바로 동족상잔의 비극 6·25동란입니다. 역사적으로 실패한 역사에 대한 복고 운동은 필연적입니다. 따라서 6·25동란은 남북통일로 복고 되어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 역사는 자조, 자립, 자위와 함께 무엇보다도 뼈아픈 민족적 교훈으로 남아야 합니다. 
만약 복고운동마져 실패한다면 영원히 실패한 역사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것만은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 역사의 혼돈(混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감지하는 혜안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역사의 중심이 바로 기독교역사, 곧 교회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암울했던 이조 말에 선교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는 복음과 함께 교육의 혁명을, 치료의 혁명을, 생활의 혁명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료사업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교육사업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선교사들을 통한 문화사업도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들을 수단으로 복음전파의 결과 교회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운동, 곧 교회운동입니다. 

교회운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당시 일본 제국주의 폭정에 시달리는 한국민족에게 예수 운동은 더 나은 해방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장차 우리가 살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령운동, 곧 교회운동입니다. 예수 운동이야말로 사(死)에서 생(生)으로 바꾸어지는 운동입니다. 육신의 옷을 입고 나사렛 동네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우리 가정과 국가를 향해 『 나를 믿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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