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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역은 없습니다 (욥 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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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은 없습니다 (욥 2:4~10)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운명하시는 순간에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는 성역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소가 개방됐기 때문에 이전에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었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 공개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역이 없다는 말은 수사를 할 때 주로 쓰는 말입니다. 권력형 비리를 수사할 때 그 대상이 누구더라도 수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성역은 없다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성역이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께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여쭤봤을 때부터 기독교 신앙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종류의 호기심 ․ 질문 ․ 의구심 ․ 비판을 받아들였고 수용했고 거기에 대답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도전은 20세기의 산물이 아니고 현대시대의 산물이 아니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거기에 절하기까지 했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두고두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우상의 유혹에 빠지는 실수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러한 패턴은 신약시대에도 지속됐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귀중한 일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냉대했어요. 그뿐만이 아니고 끊임없이 예수님께 도전을 제기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표적을 보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이것은 마귀가 예수님께 한 말과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떡으로 변하게 하라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끊임없이 예수님에게 대들었고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 질문했고 그리고 한동안은 예수님의 가족조차도 예수님이 실성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데리러 온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다음에도 이러한 패턴은 계속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예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돈을 주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말하라는 음모론을 퍼뜨리기까지 했고 그 사실이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기독교 역사는 어떻습니까. 기독교의 역사는 핍박과 시련과 내외의 시험의 연속이었어요. 우선 엄청난 외부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핍박했고 로마제국이 핍박한 것뿐만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핍박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간 거의 모든 나라에서 핍박을 받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도들이 다 순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핍박뿐만이 아니고 많은 이단 사이비종교가 일어나서 믿는 사람들을 시험하고 또 교회의 가르침에 도전하고 아리우스주이든 영지주의든 얼마나 많은 이단이 일어났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부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 자체가 기독교의 엄청난 생명력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주후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시대에 공식 종교로 채택돼서 한시름 놓는가 했더니 또 다른 시련이 닥치기 시작했는데 야만족들이 쳐들어와서 로마제국을 멸망시켰고 그리고 중세 가톨릭교회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이후에 또 다른 종류의 위협이 닥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 ․ 철학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신앙 자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교회의 가르침과 성경말씀에 대해서 도전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이니 칼 막스의 공산주의 이론이니 또 시그만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학이니 그 이외에도 수많은 학설들이 나와서 기독교의 가르침과 성경에 정면으로 대항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니체는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말했고 공산주의는 ‘기독교는 아편이다’라고 주장했고 정신분석학자들은 ‘하나님이란 인간 심리의 초자아-superego 일 뿐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정도면 정말 막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역이 없는 것 정도가 아니고 아예 구둣발로 성역 안에 들어와서 짓밟자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들은 정직한 토론을 허용하지 않고 또 성역을 엄격히 유지하는 중교가 있습니다. 예컨대 이슬람의 성지가 메카가 아닙니까. 메카에는 이슬람교도가 아니면 아예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외부사람이 메카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돼 있습니다. 메카는 이슬람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슬람 신앙에 대한 토론의 자유가 금지돼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아십니까. 

한번은 이란의 소설가 루시디라는 사람이 이슬람에 대한 소설을 썼다가 지도자들에 의해서 사형선고를 받고 도피자의 삶을 산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슬람은 엄하게 금기시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이외 다른 종교도 그래요. 그러나 기독교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기독교는 모든 것을 까발렸습니다. 신학이든 교회든 인물이든 모든 것이 공개됐습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 공개돼서 누구든 어떤 비판이든 가능합니다. 어떤 주제라도 금기시 되는 것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기독교는 동네북입니다. 저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건드리는 것을 별로 못 봤어요. 불교. 불교에 대해서 건드리는 것 못 봤습니다. 그 이외의 원불교 ․ 대순진리회 심지어 무속신앙에 대해서도 건드리는 것을 금기시합니다. 소위 민족의 문화니 전통이니 이런 명분으로 비판하는 것을 금기시합니다. 가톨릭교회에 대해서도 노터치입니다. 

그런데 개신교만큼은 개나 소나 다 한마디씩 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개신교에 대해서만큼은 한 마디씩 해도 되는 줄 생각합니다. TV에서도 그렇고 신문도 그렇고 인터넷도 그렇고 학자들도 그렇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교인에 대하여 성직자에 대하여 교회의 가르침에 대하여 전도하는 것에 대하여 선교 활동하는 것에 대하여 다 한마디씩 비판의 말을 해도 되는 줄 생각합니다. 

일전에 아프가니스탄에 갔던 한국의 단기선교팀 중의 몇 명이 순교했을 때도 그들을 비판한 것은 이슬람교도들이 아니고 같은 한국 사람들이었어요. 한국 사람들이 한국의 개신교가 이슬람권에 선교사 보내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의 실정이에요.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이런 것을 겪었고 감당할 수 있었고 지금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역을 공개하신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에 ‘Come, let us reason together-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기독교는 강요에 의해서 믿게 하지 않고 권위에 의해서 순종하게 하거나 자체를 지키게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진리로 승부합니다.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진리로 승부합니다. 그래서 논란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창조론이든 예수님의 부활이든 성경의 권위든 하나님의 존재하심이든 어떤 내용이든 간에 진리로 승부하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사람들이 의심하는 이유가 뭡니까.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충분히 알았다면 오히려 성경의 말씀에 근거가 있다고 알았을 것입니다. 창조든 또 하나님의 존재든 성경 사건의 역사성이든 성경말씀 자체의 권위든 여기에 근거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아는 사람은 수긍할 수 있는데 섣불리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느니 어떻다느니, 어떻다느니, 이것은 본인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기독교는 대화를 거부하지 않고 학술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환영합니다.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고등교육은 기독교가 시작한 것입니다. 대학도 기독교가 세운 것이고 또 문학의 발달이든 예술의 발달, 음악의 발달, 다 기독교가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자연이라는 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개념도 성경적인 개념입니다. 

과학이 서구문화에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이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사람에게 그것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기 때문에 자연이 인간의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도 혜택을 주신 분은 거부하는 그런 미련한 실수를 저지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마치 잔칫집에 가서 음식을 얻어먹으면서 정작 집주인에 대해서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혜택을 여러 면으로 누립니다. 자유든 민주주의든 인권이든 여권이든 약자에 대한 배려든 또 물질의 풍성함이든 건강이든 하나님이 주신 배려를 여러 면으로 누리는 사람들이 정작 주신 분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욕하고 부인하는 그런 어리석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학문을 환영하고 대화를 환영합니다. 다만 그것이 솔직하고 편견이 없고 결과에 승복하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에요. 그러므로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에게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에요. 그러므로 사랑을 찾아가는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평강입니다. 평강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을,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는 것처럼 인간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은 하나님에게로 통하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이 성역이 없이 모든 것을 공개하시는 이유는 흔드는 것입니다. 유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흔듭니다. 약병에는 ‘사용하기 전에 흔드시오’라는 말이 쓰여 있습니다. shake before using.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당신의 백성을 일부러 흔드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믿음과 교회의 순수함이 유지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과거를 보면 핍박이든 시련이 교회를 더 순수하게 하고 강건하게 해 줄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부터 4절 말씀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현재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교회를 흔듦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더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흔드는 자들이 무사할 것은 아니에요. 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주로 학술적이고 지적인 차원에서의 도전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실존적인 도전입니다. 오늘 본문의 욥이 겪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욥은 재물을 잃었고 자식을 잃었고 건강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욥의 아내가 욥에게 뼈아픈 말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 그 옛날에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성경에 이런 말이 기록돼 있을 줄 몰랐던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욥기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사건을 기록한 책이라고 봅니다. 율법을 언급하지 않고 또 율법에 나오는 규례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굉장히 오래전의 일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라고 봅니다. 옛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미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말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절망을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심이 지적인 이유로 왔겠습니까.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니체를 읽고 지적으로 의심하게 됐겠습니까. 아니에요. 실존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사람이 벼랑에 서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이미 옛날부터 성역이라는 것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도전할 수 있고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실존을 논할 때 성역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풀무불을 통과했습니다. 풀무불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욥 같은 사람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시련을 다 겪었지만 그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가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가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떻게 했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가 신앙을 지켰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욥이 위대해서가 아니에요. 그의 믿음에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위력을 잘 모릅니다. 마치 우리 각 사람이 핵발전소를 하나씩 갖고 있으면서 백촉짜리 전구 하나 밝히는 데 쓰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위력을 가진 믿음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별로 사용할 줄 몰라요. 전구 몇 개 켜고 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이 더 강해질수록 우리 믿음의 위력도 더 강해집니다. 외부에서 시련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믿음의 능력이 더 나타납니다. 외부에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일이 있을수록 우리의 믿음이 더 지혜를 내고 인내를 내고 능력을 발산합니다. 

로마서에 있는 말씀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느니라’고 한 것처럼 시련이 더한 곳에 믿음의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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