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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인 나라 소인 나라 (민 13:30 ~ 민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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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나라 소인 나라 (민 13:30~14:10)


흔히 이 시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비교적 안정된 사회에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문제로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질병, 사건, 사고, 노후, 그리고 죽음 등 매사에 불안감을 느끼며 삽니다. 

「대한불안의학회」의 연구자료(주간동아 2006년 3월)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4명 중 1명꼴로 불안과 관련된 증상으로 시달린다고 합니다. 서울과 5대 광역시 성인남녀 1천명 대상으로 면접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중 25%가 불안 관련 증상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6%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심한 불안감을 느껴 상담이나 치료 필요한 케이스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며 사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경제 위기와 여러 가지 사회 불안으로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인생에서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세계대공황 당시였던 1930년대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현실보다 과도한 두려움의 허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스스로 불행해지고 쉽게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결해야 될 중요한 문제가 바로 ‘두려움의 문제’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고 늘 행복하고 승리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광야를 통과할 때의 기록입니다.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부근에 와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정탐을 실시합니다. 지파별로 1명씩 대표를 뽑아서 12명의 정탐꾼이 40일간 정탐을 다녀옵니다. 그런데 정탐꾼 12명의 의견이 두 패로 갈렸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나머지 10명으로 갈린 겁니다. 그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두려움 : 실패로 가는 지름길 

본문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먼저 두려움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나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두려움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승리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뭐라고 보고합니까? 그 땅이 좋기는 한데 거주민들이 워낙 강해서 ‘정복 불가능’이라는 겁니다. 13:31절을 보시죠. “...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 그들은 이미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의식에 움츠러든 겁니다. 

13:33절.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아낙 자손은 네피림의 후손인데 거인족입니다. 자기들보다 덩치도 크고 무장 상태가 만만치 않아서, 자기들은 마치 메뚜기 같이 보였다는 겁니다. 난쟁이나 소인만도 못하니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보나 마나 실패할 게 뻔했습니다. 

그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내리십니까? 14장 후반부를 읽어보면, 먼저 10명 정탐꾼을 즉결 처단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 제1세대는 몽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정탐 기간 40일을 하루 당 1년으로 환산해서 40년 동안 광야를 뱅글뱅글 돌게 만드셨는데, 그러는 동안 기성세대는 모두 시체가 됩니다. 구약 신학자 레온 우드에 의하면, 하루 평균 80명 시간 당 7명꼴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성인 남녀 120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저기서 애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겁니다. 가나안 땅의 축복에서 제외된 것도 비참한데, 날마다 슬픔과 고통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이처럼 두려움은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다 망가뜨립니다. 그리고 결국은 멸망으로 끌고 갑니다. 예를 들어 질병의 문제만 해도 두려움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요즘 의학이 많이 발달되어 웬만한 병은 다 고칩니다. 중병으로 인식되는 암도 완치율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치료 과정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치병(治病) 이전에 치심(治心)해야 된다는 겁니다. 

한 영국인 의사가 질병과 마음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임상 실험을 해보았답니다. 암환자들에게 항암제 대신 소금물을 투여했더니, 환자들 중 30%에게 탈모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두려움이 그런 결과를 낳은 겁니다. 

여러분, 서울의대 명예교수이며 대통령 주치의를 역임한 고창순 박사에 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분은 본인이 의사이면서 대장암, 십이지장암, 간암 등 암을 달고 살았던 분입니다. 다행히 암을 잘 이겨내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바가 바로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하라는 겁니다. 그의 책 제목「암에게 절대 기죽지 말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는 대신 웃으라고 충고합니다. 웃음은 부작용 없는 항암제라는 겁니다. 

이처럼 두려움이 얼마나 우리 인생에 나쁜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두려워할수록 현실의 문제가 더 커 보이고 그 문제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인간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100전 100패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고양이 앞의 쥐걸음”이라는 말이 있죠. 쥐는 본래 뒷다리가 길어서 얼마나 빠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일단 고양이를 보면 부들부들 떨면서 맥을 못 추고 기어갑니다. 결국 잡혀 먹고 맙니다. 어떤 문제든지 그 앞에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2]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 불신앙

그러면, 이렇게 나쁜 ‘두려움’이 왜 생기는 걸까요? 결심하고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앙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본문 14:1절을 보시면, 10명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두려워 떠는 백성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그들은 철야 통곡을 했습니다. 이럴 때 신앙이 있다면 당연히 무엇을 해야 마땅합니까? 철야 기도를 했겠죠. 그런데 밤새 두려움에 사로잡혀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또 14:3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그들은 두려움에 이미 죽은 것 같았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야단입니다. 그들의 안중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불렀지만, 단지 원망을 위해서였습니다. 

불신앙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인간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마침내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신앙으로 인해 두려워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한없이 큰 거인으로 보였습니다. 결국 그들 앞에서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거인 나라’가 된다.” 그러니 불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요즘 세월이 갈수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리 험한 세상에서 신앙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간이 크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간이 큰 게 아니라, 반대로 간이 콩알만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무슨 짓을 하나요? 두려움을 극복한답시고 세상의 다른 것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무엇으로 인간의 마음 속을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지! 재력? 권력? 학력? 그 어느 것으로도 불가능합니다. 


[3]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 : 신앙 

그러면 어떻게 하죠? 그냥 그러다 망하고 그러다 죽어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즉효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노만 V. 필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앙은 두려움의 치료제이다.”

잘 아시는 대로, 다윗은 구약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용맹스런 사람입니다. 물론 그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때로는 두려워 떤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가 담대한 용기를 갖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시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또 시27:1을 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의 담대한 모습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 때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인생의 적수인 두려움을 이기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그 신앙을 크게 키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립니다. 


① 영적인 안목 키우기 :

첫째는, 영적인 안목을 키우면 우리의 신앙 커집니다. 신앙은 눈을 달라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든 사물이나 문제를 육신적으로 보고 판단합니다. 10명 정탐꾼들이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단지 육신적인 안목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 능력과 가나안 원주민들과 비교하면서 두려워 떨었던 겁니다. 

반면에 믿음의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땠습니까? 가나안 원주민의 모습을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들이 거인인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14:7절~9절 보시죠. “7 ...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 ” 

그들이 보기에 가나안 땅은 분명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아무리 거인족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앞에서는 먹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먹이’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NASB)을 보니까, prey 즉 사냥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먹이라”는 말은 다른 영어성경(NIV)을 보니까, swallow up 즉 ‘꿀꺽 삼켜버리다’ ‘먹어치우다’ 등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세상의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주 작아 보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안목이 없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이 세상의 문제가 한없이 커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원리를 또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소인 나라’가 된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 있으실 겁니다. 어른이 된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 보면 얼마나 작은지 “애걔~”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운동장이 줄어들었나요? 아니죠. 내가 커진 겁니다. 마찬가지 영적인 안목이 생기고 신앙이 커지면 세상이 작아 보입니다. 세상의 문제들이 별 게 아닙니다.

왕하6:14~27을 보면, 엘리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람은 당시 이스라엘의 적대국가로 이스라엘의 국경을 수시로 침범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때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방비함으로 위기를 넘깁니다. 약이 오른 아람 왕이 엘리사를 제거하고자 야밤에 군대를 보내 도단 성을 완전 포위합니다. 아침 일찍 밖에 나간 사환이 그 광경을 보고 절망합니다. “아! 이젠 죽었구나!” 그러나 엘리사는 태연합니다. 왜 그랬나요? 

왕하6: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불말과 불병거는 천국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엘리사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두려워할 수 있었지만,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 대거 호위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큰 게 아니라 내 신앙이 작은 겁니다. 부디 영적인 안목을 키움으로 세상을 소인 나라로 보고 넉넉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임마누엘 신앙 키우기 : 

둘째로, 임마누엘 신앙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는 뜻이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14:9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와 갈렙이 어떤 모습인지! “ ...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넘칩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또 시3:5~6을 보십시오. 역시 다윗의 시편입니다.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는데 뭐가 두렵냐? 이겁니다. 

어린아이가 아빠 어깨 위에 무동을 탑니다. 그러면 세상이 다 아래로 보입니다. 어른들도 작아 보이고, 세상이 다 자기 것 같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르죠. 우리도 마치 하나님 어깨 위에 무동 탄 아이와 같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것 기억하시나요? 탕 중의 최고는? ‘돌탕’입니다. 탕자는 나쁘지만, 돌아온 탕자 ‘돌탕’은 좋습니다. 라면 중의 최고는? ‘주님과 함께’라면입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를 잘 아실 겁니다. 다리를 놓은 때가 1930년대였으니까 옛날 이야기이죠. 공사를 하는데 다리가 너무 높고 위험해서 기술자들의 마음이 늘 불안했습니다. 현기증이 나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5명이 추락해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고심 끝에 철망으로 안전그물을 설치했습니다. 요즘은 공사 기술이 발달해서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였습니다. 

안전그물을 설치한 후 신기하게도 아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안전그물에 떨어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안도감 때문에 실족하지 않은 겁니다. 안전그물 정도만 해도 그렇게 안도감을 주고 일이 잘 되게 해 준다면,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얼마나 일이 잘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은 우리에게 큰 힘과 용기를 줍니다. 부디 임마누엘 신앙으로 세상을 소인 나라로 보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하나님의 약속 붙들기 : 

세번째, 하나님의 약속을 꼭 붙드시면 신앙이 커집니다. 13:30절을 보시죠.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 ” 갈렙은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무조건 가자는 겁니다. 

이어서 14:8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직접 가보니까 정말 약속하신 그대로였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정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출애굽 1세대 중 그 두 사람만 가나안 땅의 축복을 차지하고 신앙의 영웅으로 성경에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얼마나 많은 약속의 말씀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향한 약속이 됩니다. 그 말씀을 붙들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예를 들어 요16:33도 예수님이 직접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신학교 동기생 중에 박종민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동기생인데, 나이는 저보다 15살 더 많습니다. 옛날 전매청에 다니다 신학을 늦게 하셨죠. 이분이 목회하시다 60세나 넘어가면서 조기은퇴를 결심하셨습니다. 젊었을 때 선교를 위해 기도하셨는데, 실천하려고 필리핀으로 떠나신 겁니다. 한 2년 하시더니 연락이 왔어요. 그곳에는 선교사도 많고 편해서 아프리카로 가려고 하는데, 선교지를 소개해 달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저도 아직 아프리카에 가보지 않았는데, 소개해 준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자꾸 말씀하셔서 차드의 양승훈 선교사님을 소개해 줬습니다. 그랬더니 좋다고 가시겠다는 겁니다. 그래도 한번 답사해 보고 가시라고 하니까, 비용도 많이 나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냥 가면 되지 무슨 답사냐며 그냥 떠났습니다. 하기는 천국 답사해 보고 가나요? 그냥 믿음으로 가지. 

그로부터 2년 후 제가 차드에 가보고 얼마나 죄송했는지! 정말 너무 열악한 나라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그곳에서 기쁨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양승훈 선교사님과 협력해서 차드선교센타와 현지인 교회 여러 군데 건축 공사 감독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 후 안식년을 보내신 후에는 이제 차드에 선교사들이 여럿 들어갔으니 또 다른 데로 가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직 저도 가보지 않은 가봉에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좋다며 그곳에 가셨습니다. 역시 답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가셨습니다. 

지금까지 사역하고 계신데 만70세까지 채우시겠다고 합니다. 가끔 전화 통화하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목사님 부부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다른 데도 아니고 아프리카에, 말만 듣고, 그것도 가보지도 않은 사람의 말만 듣고 가는 분들이 어디 있습니까? 무모하다는 생각을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게 어디 인간의 말을 듣고 간 겁니까? 당신들 나름대로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꼭 붙드신 것이죠. 

여러분!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거인 나라로 보입니까? 소인 나라로 보입니까? 그게 바로 내 신앙의 수준입니다. 세상이 거인 나라로 보이면 내 신앙이 ‘소인 신앙’인 겁니다. 반대로 세상이 소인 나라로 보이면 내 신앙이 ‘거인 신앙’인 겁니다. 아무쪼록 여호수아와 갈렙 같이 거인 신앙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 말고 담대한 신앙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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