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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산하는 신앙 (요 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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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하는 신앙 (요 6:5~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미국에서 한 아이를 17세까지 양육하는데 얼마나 경비가 지출되는가를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20만 4,060달러가 들어간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 돈으로 2억 6천여만 원입니다. 그리고 대학에 공부할 경우에는 2만 4천불이 더 지출되고 기타 경비를 포함하면 약 25만 달러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돈으로 약 3억 원 정도 지출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2006년도 기준하여 보건사회연구원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양육비가 1억 7,334만원, 대학 졸업하기까지 경비가 2억 3,200만원, 기타 경비를 합하면 약 4억 원 정도 됩니다. 

이 조사의 결론은 아이들을 낳지 않으면 부부가 평생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계산이 있지 않았습니다.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연구가 나오는 계산하는 시대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덤을 주거나 깎아주는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너무 계산을 하니까 세상이 재미가 없어집니다. 인간미도 없어집니다. 


 계산하는 결혼 

그러다 보니 오늘은 결혼도 먼저 조건을 보고 외모를 보고 환경을 봅니다.  먼저 따져보고 계산해 보고 손해 안 될 것 같으면 결혼을 합니다. 물론 계산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으나 너무 계산적이기 때문에 그 결혼이 위험한 것입니다.  결혼은 100% 헌신의 관계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남남끼리 만나서 평생을 함께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중요시 하던 조건이나 환경은 언제든지 상실될 수 있고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참으로 그 결혼은 위험해지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10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조건들도 10년여 년이 지나면 변해버리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조건을 너무 중시합니다. 그래서 속는 것입니다. 계산이 앞서는 결혼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계산하는 인간관계 

사람과의 관계도 얼마나 이용 가치가 있느냐에 따라 가까이하고 가치가 없으면 소홀히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배반이 많아지고 배신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가까운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모도 부부도 자식도 귀찮으면 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부모에게 자식이 우상이던 시대도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식이 더 이상 부모에게 기쁨만 주는 자식이 아닙니다. 어느 아버지의 탄식입니다. 

어느 날 아들이 결혼하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전에 인사드렸던 그 친구와 결혼할래요.” “아니 그 아이는 친구라고 하지 않았냐, 너 그 아이를 사랑하냐.” “아빠 그것은 제 일이예요.” “그 아이도 널 사랑하니, 교회도 안다닌다면서.” “그건 그 사람 일이구요.” “그러면 결혼해서 어떻게 살려구, 너희들은 학생이잖아, 돈도 없구 집도 없잖아.” “아빠, 그건 아빠일이죠.” 참 재미없는 시대입니다. 다 계산적입니다. 


계산하는 믿음 

이런 풍조가 신앙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도 계산적으로 합니다. 어느 신자가 목사님께 11조를 어떻게 계산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세금을 떼고 감가 계산을 하고 원가 계산을 해서 드려야 합니까? 아주 계산을 영악하게 합니다. 목사님이 대답하시기를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정확하게 따지고 계산하실 것”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믿음의 세계에도 이 계산하는 풍조가 들어와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계산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가장 분명한 확신과 가장 좋은 열정과 가장 좋은 믿음과 최고를 봉헌하는 세계가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기적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성경을 보면 기적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짓말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그래서 성경인 것입니다. 사서삼경은 아무리 방대하고 교훈이 많아도 성경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발생되는 초자연적인 기적의 사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서삼경은 교훈집일 뿐 입니다. 

기적은 전혀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 임재 하여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기적입니다. 이를테면 바위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마른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습니다. 넘실대던 홍해가 소리 없이 갈라졌습니다. 강물이 넘쳐흘렀는데 갑자기 멈추고 갈라져 사람들이 그 사이를 마른 땅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기적 같은 일이라 믿어지지 않으니까 그곳이 물이 얕은 갈대밭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신학생이 성경을 읽다가 큰 소리로 아멘하고 외쳤습니다. 마침 그 곁에 신학자가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무얼 읽었기에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같이 지나가는 모습을 읽다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아멘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학자가 “이 친구야, 그곳은 갈대밭이었어, 물이 발목밖에 차지 않는 갈대밭이었다구, 알았어”하고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지나갔습니다. 

조금 있다가 이 학생이 더 크게 아멘하고 소리쳤습니다. 길을 가던 신학자가 “또 뭐야, 또 뭘 읽었길래 그래”하고 물었습니다. “더 큰 기적이 나와서 그렇습니다”, “뭔데”, “애굽군대가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쫒아가다가 발목밖에 차지 않는 갈대밭에서 모두 빠져죽었답니다” 

이렇게 매사를 계산하다가 보니까 우리의 삶속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계산하는 믿음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본문은 오병이어 사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네 번째 행하신 기적 사건이 이 오병이어 기적사건입니다. 갈릴리 바다 넘어 벳세다 광야에 지금 5천명쯤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곳은 빌립의 고향입니다. 모인 사람들이 5천명 쯤 되었다고 하니까 거기에 유아, 노인, 여성들까지 포함하면 2-3만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가 하면 기적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기적이 또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굶어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 빌립에게 먹을 것을 구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필 빌립이냐 하면 그 지역이 빌립의 고향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빌립을 시험하고자 했다(6)고 했습니다. 빌립이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는 가를 보시려고 시험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빌립이 순간적으로 계산하여 보고하기를 “2백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합니다”(7)하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1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으니까 노동자 임금 200일분 즉 주일을 빼면 약 8개월분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 돈이 어디 있습니까. 또 돈이 있으면 뭐합니까. 어디 가서 그 많은 음식을 갑자기 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해 보았더니 재빨리 계산해서 계산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계산서를 받아들고 한심하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훈련한 결과가 이정도인가를 생각하고 힘이 빠졌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기적을 보았는데 제자들은 오늘 여기서도 그런 기적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들이 빌립처럼 계산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에는 따져보고 계산하면 계산이 안됩니다.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도 신앙인들이 자꾸만 따지고 계산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여기서 몇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계산은 하나님이 

계산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어떻게 계산하는가 하면 하나님 방법으로 계산하십니다. 하나님의 셈법은 우리들의 셈법과 다릅니다. 우리의 셈법은 1+1= 2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셈법은 1+1= 5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셈법의 원리입니다. 

예를 들면 소 한 마리가 짐을 끄는데 2톤을 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마리가 함께 짐을 끌면 4톤을 끌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의 셈법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두 마리가 함께 끌게 하니까 8톤을 끌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계산법을 알아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는 “믿으라 계산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 계산도 우리 방법이 아닌 하나님 방법으로 하십니다. 보십시오. 복음서에 보면 일꾼들이 삯을 받고 일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일꾼 모두에게 정량의 품삯이 지급됩니다. 그런데 일꾼들이 대부분 아침에도 왔지만 정오에도 왔고 오후에도 왔고 일이 끝나기 직전에도 왔습니다. 주인은 직전에 온 일꾼에게 하루 품삯을 주었습니다. 다른 일꾼들은 큰 기대했습니다. 우리들은 아침 일찍 왔으니 더 주겠지 그런데 주인은 똑같이 주었습니다. 

그때 일꾼들은 불평했습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왔는데도 왜 끝나기 직전에 온 사람들과 똑같이 줍니까.” 얼마나 얄미울 것입니까. 조금 일하고 돈은 같이 받고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사람은 이틀 믿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태부터 믿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누가 항의할 수 있습니까. 이 불평이 왜 나오는가 하면 우리들의 셈법과 하나님의 셈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기도중에 천국을 보게 됩니다. 천국에 감리교인이 얼마나 왔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감리교인이 몇 명이나 왔습니까”하고 물으니 감리교인은 한사람도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칼빈의 신학을 믿는 장로교인은 얼마나 왔느냐고 물으니 장로교인도 한사람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면 천주교인은 얼마나 왔느냐고 물으니 천주교인도 한 사람 안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가 천국에 왔단 말이냐고 물으니 천국은 예수를 믿고 진정 거듭난 사람들만 오는 곳이라고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계산과 다른 점입니다. 

무디목사가 부흥집회에서 설교하고 내려옵니다. 어느 교수가 “오늘 설교에 문법이 몇 개나 틀렸는지 아세요, 50군데도 더 틀렸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무디는 “아 그렇습니까, 나는 더 많이 틀린 줄 알았는데요, 그런데 당신은 정확한 문법을 써서 몇 명이나 구원하셨습니까”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새벽에도 철야로 금식하며 기도를 합니다. 때로는 다급해서 울부짖으며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들이 문법대로 정확하게 논리에 맞게 기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한번 녹음해 놓고 자신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문법적으로 엉망일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완벽한 기도로 들으시고 그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계산하는 신앙을 수정해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읽는 독자들에게 계산적인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 주고 계십니다. 믿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 믿는 것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셈법은 가능성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셈의 원칙은 이성과 지식과 셈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능성이 아주 없는 상태에서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를테면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고 마른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넘치는 홍해를 가르고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는 사람을 살려내십니다. 모두 기적입니다. 

기적은 가능성이 아주 없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믿음을 갖기가 힘든 것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합리적인 시대입니다. 계산해서 맞지 않으면 포기합니다. 그러니까 기적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짓는데도 너무 따지고 계산해보고 두드리면 맞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험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너무 내 이성과 계산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진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건축을 다 끝내고 보십시오. 우리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적들과 간증거리들을 많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 이야기를 보면 먹을 가능성이 아주 없는 상황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필 빌립에게 당부하시기를 “먹을 것을 구해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빌립이 그곳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까 그를 지명하여 분부하신 것입니다. 그는 그곳 사정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니까 계산서부터 내 놓은 것입니다. 그 말은 그곳에서는 음식을 구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때로 신앙생활에서 조금 안다는 것이 얼마나 믿음을 해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 믿음을 갖기가 더 힘듭니다.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부탁했더라면 어려운 일인 줄 알지만 돌아다니며 찾아보기라도 했을 것입니다. 여기 이 이 빌립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고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보잘 것 없는 매개 통한 기적 

결국 5천명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어떻게 먹었는가 하면 한 어린 아이의 보잘 것 없는 도시락 하나로 먹고도 12바구니를 남겼습니다. 해결방안을 보면 참 어처구니없게도 아주 보잘 것 없는 매개를 통해서 해결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큰 기적들을 보이셨는데 그때마다 그 매개를 보면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입니다. 사렙다 과부집의 기적도 밀개떡 하나를 통해서,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지게 한 것은 큰 칼도 창도 아니고 작은 돌이었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그 재료가 보잘 것 없는 도시락 하나였습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이고 우리들의 구세주이시며 세상에 성육신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 것이 이 말씀의 주제입니다. 

칼 막스의 아버지는 경건한 유대교인이었습니다. 적은 마을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는데 그 동네는 루터교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장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제 우리도 루터교로 바꾸자, 도대체 장사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계산하는 믿음입니다. 그때 제일 충격을 받은 사람이 자라나는 칼 막스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삶의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때는 좌파에 물들게 되고 무신론적 급진주의자가 됩니다. 그리고 공산혁명을 주도하다가 런던으로 망명하고 거기서 유물사관을 정립하고 결국 그는 “신은 죽었다,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외치다가 결국 쓸쓸하게 죽어갔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속에서 잔잔한 기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내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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