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나라와 그물 (겔 26:3~5, 마 13:47~50)

  • 잡초 잡초
  • 593
  • 0

첨부 1


하나님의 나라와 그물 (겔 26:3~5, 마 13:47~50)


‘플레시 몹’이란 것이 있습니다. 인터넷 세대 사이에서 이메일 연락을 통해 특정한 날과 시간과 정한 장소에 모여 10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약속된 간단한 행동을 한 뒤 뿔뿔이 흩어지는 모임입니다. 함께 모여 소리를 치기도 하고, 특정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합니다. 마이클 잭슨이 죽었을 때 세계 각국에서는 마이클 잭슨 추모 ‘플레시 몹’이 있었습니다. 
  
모임은 중요하고, 모으는 기술은 중요한 리더십입니다. 그런데 악한 영도, 이단도, 이념도 더 모으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어떻게 저런 제를 다 좇아가나 싶지만 사람들은 좇아가고 모입니다. 어떤 공동목표가 있으면 사람들의 군중심리는 모이고 집결하게 만듭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보세요. 누가 오라고 하지 않아도 자기 돈으로 빨간 티셔츠 사 입고 아기들까지 업고 안고 모이지 않습니까? 촛불 집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의 목표가 있으면 사람들은 쉽게 모일 수 있습니다. 
  
일전에 텔레비전 뉴스에 보니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바글바글했습니다. 흔히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니 ‘물 반, 사람 반’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든 것입니다. 가끔은 이렇게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저렇게 모여드는데 교회는 왜 안 모여들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교회는 더 재미있고, 더 생명력이 있는데 말입니다. 
  
교회는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헬라어의 교회라는 말, ‘에클레시아’는 ‘에크’라는 단어와 ‘칼레오’라는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밖으로 불러내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밖으로 물러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옛날 로마의 원로원도 ‘에클레시아’(ecclesia)라 불렀습니다. 그리스어로 회중 또는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함께 모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함께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어느 교회 앞 게시판에 “당신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악인이 아니죠? 그리고 당신은 밖에 있어도 될 정도로 선한 사람도 아니죠?”라고 써 놓았다고 합니다. 교회에 들어오지 못할 사람이 없으며 교회에 누구나 다 들어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 악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만한 선인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누구나 다 들어가야 하지만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출애굽하여 광야에 왔습니다. 가나안까지의 여정에 절반은 왔건만 불평하고, 선동하고, 좌절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나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온갖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남녀노소, 선남선녀 그리고 죄인들까지 다 모이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물과 같다고 합니다. 그물에 각종 물고기를 모으듯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을 다 모읍니다. 하나님께서 그물을 얼마나 촘촘하게 짰는지 걸리지 않는 고기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고 모든 사람이 다 그 앞에 모일 것입니다. 
  
유태인은 그물 짜는 법을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물고기의 크기와 종류에 따라 그물코를 다르게 만들도록 가르치는 민족입니다. 고기를 잡으려면 그 고기에 맞는 그물코를 만들어야 합니다. 큰 고기를 잡는 그물로 새우를 잡을 수 없습니다. 새우잡이 그물로 참치나 고래를 잡을 수 없습니다. 새우 그물에 고래가 걸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물은 찢어지고 고래는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그물은 빠져 나갈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더운 여름에 시원한 바다로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의 그물을 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을 다 모읍니다. 

47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바다에 그물을 치는 것은 고기를 모으고 잡으려고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실물 설교의 달인이십니다. ‘각종 물고기’라고 말씀하신 것은 갈릴리 주변 동네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하신 것입니다. 갈릴리에는 22종 이상의 어족이 생존하고 있습니다. 큰 고기, 작은 고기,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온갖 고기가 살고 있는 갈릴리를 보시면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일전에 우연히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보고 있는데 시각장애인 어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연평도에서 한밤 중 썰물 때 그물을 치고, 손으로 더듬어 고기 잡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 보니 그 분이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이 분은 손으로 고기를 잡습니다. 넙치, 광어, 농어 등 온갖 고기들이 함께 걸려 올라옵니다. 이 분은 손으로 만져보고 그 고기가 무슨 고기인지 다 압니다. 원래 어부였는데 후천적으로 시각장애가 되었습니다. 그 분의 아들이 한밤 중에 함께 나가서 고기를 잡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기를 잘 잡아도 잡지 못하고 새어 나가는 고기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그물은 어떤 고기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그물’은 헬라어로 ‘사게네’입니다. 이 단어는 두 배 사이에 묶어서 끌고 다니거나 고기를 한꺼번에 끌어올리는 그물 또는 한 쪽 끝은 해안가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 쪽 끝을 배에 달아매어 밖으로 끌고 나오는 그물인데 무거운 납이 달려서 바다 밑바닥까지 훑어 대량으로 고기를 잡는 큰 그물을 뜻합니다. 어쨌든 그물은 아주 크고 빠져 나가지 못하는 큰 것을 의미합니다. 이 그물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고기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고기들이 다 걸리게 만든 그물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또 성경은 ‘물가로 끌어내고’라고 합니다. ‘물가’란 시간적 개념으로 마지막 종말의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사이에 중간 시기의 의미입니다. 장소적 개념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심판의 현장을 의미합니다. 때가 되면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섭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자리를 피할 자도 오지 못할 자도 없습니다. 
  
명성교회의 어느 화가가 얼마 전에 개인전을 했습니다. 김삼환목사님께서 다녀오셔서 화가로부터 이번 개인전의 주제 설명을 듣고 와서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 작품들이 있지만 이번 개인전 모든 그림의 주제는 모든 사람이 끝은 다 죽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다 한 곳에 모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의 끝은 죽음이고 그 후에 모두가 하나님 앞에 모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제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께서 오래 전에 어느 교회를 섬기시면서 교인들과 어려움을 겪게 되셨습니다. 장로님들이 견디다 못해 목사님을 찾아 오셨습니다. 어느 날까지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주시면 좋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날이 되었지만 목사님은 꿈쩍도 안 하시더랍니다. 장로님 몇 분이 가서 목사님 댁의 짐을 싸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구경을 하시더랍니다. 짐을 다 싼 다음에 어느 장로님이 “목사님 짐 다 싸놨습니다” 그랬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구경만 하시다가 “장로님, 내가 갈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시더랍니다. 목사님의 그 말을 듣고 장로님이 허허 하고 웃으시더니만 다시 짐을 다 풀어놓으시더랍니다. 
  
여러분, 저도 갈 데가 없습니다. 우리가 갈 데가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 말에 가보면 다 거기고, 가보면 다 만나고, 가보면 우리를 기쁘게 기다리고 있는 천사와 믿음의 조상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만나지만 함께 하지 못하고 울며 슬피 이를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2:2에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이 말은 다윗만의 고백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의 고백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49:29에는 야곱은 죽을 때에 “내가 내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한 결 같이 가야하고, 모여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누가 거절하고, 누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을 다 모으고 모든 사람이 다 가야하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23:37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한탄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왜 모읍니까? 안전하게 하고, 평안하게 하고, 축복하시려고 모으시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거절하고, 피하고, 결국 유리방황하게 됩니다.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웬의 ‘영성 수업’이란 책에 보면 예수님을 통하여 배우는 세 가지 훈련이 있습니다. 첫째는 고독인데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공동체인데 함께 알아보고 모이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역인데 세상에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모여서 뭐하나?’ 하는 것보다 모임 그 자체가 의미 있고 중요합니다. 

우리교회의 제직회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제직회에 가보니 “예” 몇 번 하면 끝나는데 뭐하려 가냐고 합디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제직회는 ‘예’하러 가는 것입니다. 참여하여 교회 일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 이게 일입니다. 모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아노라”. 주님께서 계시는 이 자리, 여기에 잘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저기에서도, 하늘에서도 잘 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잘 모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악인은 갈라내고 의인만 들어갑니다. 

  48절에는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 버리느니라”고 합니다. 49-50절에는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은 다음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라내는 일입니다. 모은다고 다 알곡, 다 의인, 다 하나님의 나라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 모은 다음에 구별하여 갈라내실 것입니다. 
  
‘갈라내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리우신’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완전한 격리를 암시하는 용어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실행될 의인과 악인에 대한 분리 작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시는 작업이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은 의인과 악인을 선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는 일이 일도 아닙니다. 
  
‘생활의 달인’을 보세요. 불량품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는 달인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게 빠르게 손이 움직이다가 불량품이 나오면 한 치의 틀림이 없이 골라냅니다. 어떤 때는 눈을 가리고 시험을 하지만 틀림없이 골라냅니다. 손끝으로 모든 것을 익숙하게 알아냅니다. 달인에게는 과제를 내어줍니다. 어려운 과제를 주시만 달인은 한 번도 실패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제 생각이 불순한지 모르지만 만약 실패하면 될 때까지 다시 녹화해서 “달인 성공”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잘 못 갈라내셔서 “아뿔사, 내가 실수했네!”하시면서 다시 녹화하는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에는 노아의 부인, 세 아들과 세 며느리, 여덟 사람 한 가족이 탔습니다. 방주에는 의인 가족만 들어가고 악인은 갈라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하셔서 의인을 태우지 않고 홍수 가운데 죽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었을 텐데 여덟 사람만 빼고 다 죽었다는 것은 악인이 너무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방주에 모든 사람이 다 타기를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세요. 하나님 앞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모입니다. 모인 다음에 하나님이 직접 갈라내십니다. 하나님은 양과 염소를 갈라내듯이 갈라내셔서 양에게는 복이 있으라고 하시고, 염소에게는 저주가 있으라고 하십니다. 
  
우리 눈으로는 구별이 안 되는 의인과 악인도 수두룩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 있습니다. 의인 같지만 악인입니다. 진짜 같지만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까지 보시고 의인 같은 악인을 갈라내십니다. 사데 교회에는 말씀합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금방 아십니다. 죽은 자를 갈라내십니다. 
  
요한삼서에는 디오드레베라는 사람과 데매드리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디오드레베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고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사도요한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대조적으로 선을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을 반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속내를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본성과 의도를 알고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별력은 사람을 의인과 악인으로 갈라내십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본성 즉 성격과 그 사람의 목소리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사람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절대로 감출 수 없이 다 드러납니다. 아무리 악인이 의인인 체해도 하나님은 다 갈라내십니다. 의인이 의인이라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갈라내십니다.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 비유를 보세요. 13:38에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요”라고 합니다. 40절에는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고 합니다. 한참 자랄 때 가라지를 뽑지 않는 이유를 아시지요? 곡식까지 뽑을까봐 가라지를 뽑지 않습니다. 가라지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성별’(consecration)이란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함께’(com)라는 말과 ‘거룩한’(sacer)이란 말이 합성된 말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시면 함께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의인을 악인에게서 갈라내십니까? 함께 거룩하게 되게 하시려고 갈라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거룩하게 된 나라입니다. 
  
병원 응급실에 가려면 면회 시간과 면회복이 필수입니다.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잘 맞춰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들어가려면 입구에서 면회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 것이 없이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들어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준비할 예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심판하실 때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모으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예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복을 보시고 갈라내어 우편에 앉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좌편에 앉게 하실 것입니다. 

결론 

경북 문경에 ‘신망애육원’이란 보육원이 있습니다. 이 보육원은 우리 교회에 계시던 황영태목사님의 아버지 고 황용석장로님이 세우신 보육원입니다. “믿음으로 실천하고, 소망으로 인내하고, 사랑으로 봉사한다”는 표어를 가지고 신앙적으로 가족처럼 운영하는 모범적 보육원입니다. 장로님은 호가 ‘일립’(一粒)입니다. 한 알의 밀이라는 뜻입니다. 

장로님은 원래 부자였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많은 고아들이 생겼고 장로님들은 전쟁고아들을 하나둘씩 모아들이기 시작하셨습니다. 고아들이 너무 많이 모여 와서 아예 지금의 보육원이 있는 당시에는 자갈밭인 벌판에 고아원을 세웠습니다. 보육원 땅에 맨 먼저 복숭아나무를 심고, 다음에 사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지금은 ‘신망애육원 사과’라는 상표로 사과농사를 합니다. 

장로님은 아들 딸 8남매를 다 고아들과 함께 고아들의 방에서 생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하지만 할머니는 손자들이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셨습니다. 한번은 맏이인 황영일 장로님께 할머니가 특별한 음식을 조금 주셨는데 그것을 다락에서 숨어 먹다가 아버지에게 걸려 이틀 동안 밥을 굶겼다고 합니다. 
  
고아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게 하였습니다. 고아들과 자녀들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도 함께 고아원 방에서 생활하지만 자녀들은 자녀이기에 안전하고, 평안했을 것입니다. 고아들과 함께 있지만 이미 자녀로 구별되었습니다. 원생들과 함께 있지만 외롭지도 배고프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요? 이미 구별되었고, 이미 자녀이고, 이미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똑같이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때로는 배고픔도 당합니다. 가끔은 아픔도 있습니다.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울 때는 똑같이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구별되고 갈라낸 자녀입니다.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하나님의 자녀에게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이고, 의인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구별된 이 은혜를 날마다 감사하며 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