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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 이후의 삶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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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의 삶 (눅 16:19~31)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TV를 보다가, 자기 엄마에게 질문했다. "엄마, 왜 사람들은 죽어야 해요" 엄마는 이 질문을 받고, 머뭇머뭇했다. "그것은 말이야…" 곤란한 질문에 끙끙대다가, 엄마는 다음과 같이, 궁색한 답변을 했다. '사람에게는 세포가 있는데, 그 세포가 늙으면 죽는다.' 

  이 아이에게 생물학적 답변을 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다시 질문했다. '엄마! 왜 세포는 늙어요?' 엄마는 답변이 어려워지자,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네 방에 들어가서 공부나 해!"라고 소리 질렀다. 방문을 닫고 들어갔던 아이가, 조금 후에 또 다시 나와서 물었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돼요?" '이놈아!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기는, 죽으면 끝이지…' 만일 우리 자녀들이, 인생의 궁극적 질문을 우리에게도 던져졌다면, 너무 당혹스러운 질문인가요? 어떻게 답변하시겠는가? 

사람은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죽음을 피해보려고 하지만,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본문과 같이, 부자도 죽고 거지도 죽었다. 이처럼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고, 힘이 강하고, 똑똑하고, 권력이 있어도 죽는다. 

인간은 죽음을 해결할 수 없기에,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한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만, 죽었다가 온전히 살아난 분이 없기에,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전히 죽었다 살아나셨고,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기에, 어떻게 되는지 말씀해 주셨다. 그 내용이 본문이다. 

1.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세계가 있다. 

부자는 그 당시의 왕족들이 입던, 최고급 '자색 겉옷'을 입고, 속옷은 '고운 베옷'을 입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19). 나사로는 피부병이 항상 심해서, '헌데 투성이'였다(20). 

이 부자의 대문 앞에는, '나사로'가 버려져 있었다. '버려진'이란 말은 "던져진 채로, 계속 방치되어 있었다."는 말이다(20). 나사로는 버려져진 채, 대문을 향하여 계속 누워있었다. 나사로는 자기 발로 걸을 수 없는, 완전한 불구자였다. 

그래서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며, 행인들을 해치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들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아도 쫓아버리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집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였다. 나사로는 거지 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거지였다. 

이들은 대조적인 삶을 살았지만, 모두에게 죽음이 똑같이 찾아왔다(22). 그런데 전혀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 그러니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은 분리다. 죽음은 종착역이 아니라, 정거장이다. 이들이 죽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됐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였다.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된 후에, 낙원과 음부로 갈라지게 된다. '음부'는 헬라어로 '하데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 죽은 후,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며 고통을 당하는 곳이다. 

우리 앞에는 낙원과 음부, 천국과 지옥의 길이 있다. 우리는 어느 길을 가게 될 것인가? 여호와의 증인과 무신론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아주 없어진다는 영혼멸절을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과 지옥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고, 기쁨과 고통을 느끼는 곳이라고 말씀한다. 

(1) 음부는 불꽃 가운데서 괴로움을 당하는 곳이다(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슬퍼)하나이다." 

뇌성마비에 걸려, 방에만 누어있는 혜영이가, 옆집 아줌마를 통해 예수님을 소개받고,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아 믿음생활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교회에 한번 가는 것이, 자기 소원이라고 이야기한다. 딸의 소원을 들은 엄마는, 그 딸을 들것에 실어서, 교회에 데리고 갔다. 

유아실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서 예배드리는 혜영이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러던 혜영이가 엄마를 향해 말한다. "엄마, 한번만이라도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강단을, 내 손으로 닦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러나 혜영이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 품에 안긴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교회 한번 가는 것이 소원이 될 수 없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목사님이 설교하는 강단을 닦는 것이, 소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자기 고개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던, 뇌성마비 환자 혜영이에게는, 너무나도 큰 소원이었다. 

배고프지 않은 거지는, 차비가 없으니, 차비를 꿔달라고 한다. 조금 배고픈 거지는, 밥 한 공기만 달라고 한다. 그런데 정말 배고픈 거지는, 밥 한 술만 달라고 한다. 이 부자가 얼마나 목이마르고, 고통스러우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했을까! 

지옥은 분명히 존재한다. 지옥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없다. 지옥은 영원한 불이, 계속 타는 곳이다.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막9:48-49)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렇게 지옥은 영원한 고통만 있는 곳이기에, 비참한 곳이다. 천국에는 위로가 있지만, 지옥에는 위로가 없다. 

(27-28). 부자는 지금 지옥에서, 세상에 살고 있는, 남은 다섯 식구를 염려하고 있다. 나는 이왕에 이렇게 됐지만, 그들만은 이곳에 제발 오지 말았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라는 장소가 바로 지옥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제발 오지 말았으면 하는 장소가 바로 지옥이다. 

(2)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서 위로를 받았다(25下).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이처럼 천국은 주님의 위로가 있고, 격려가 있는 곳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갈 때, 주님은 우리를 영접해 주신다.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시며, 그 동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느라고, 제자의 길을 가느라고 얼마나 수고를 하였느냐? 이제는 하늘의 안식에 동참하라고,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수고하고 승리한 성도들에게, 이제는 하늘의 안식에 동참하라고,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지불한 모든 고난, 환난, 눈물, 슬픔 등에 대하여, 충분히 보상을 받으며, 위로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는, 천국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죄에서 구원을 받음으로,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며,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다. 왕이 있고, 시민이 있으면, 그곳에 천국의 위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위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요, 또한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지옥은 고민이 있는 곳이다. 위로가 없다. 후회만 있을 뿐이다. 위로가 없는 가정과 교회는, 이미 지옥이다. 

격려가 없는 인간관계는, 지옥의 고통을 가져다준다. 위로, 격려가 없는 곳이 지옥이기에, 그러한 인간관계는 고통만 줄뿐이며, 위로가 없는 모임은 가기가 싫다. 어느 누구도 위로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또한 위로가 필요치 않은 사람 역시 없다. 그러므로 위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2. 죽음 이후에 가는 길은, 죽기 전에 결정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자유롭게, 자기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무덤에 들어가면 거기서부터는,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없게 된다. 

죽음 이전에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죽음 이후의 삶이 결정된다. 만일 인생이 죽어서도, 결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하면 즐기고, 하고 싶은 것을 다하가, 죽은 다음에 미안하다고 하면서, 바꾸면 된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이미 이 땅에서 살 때 결정되었다. 

부자였기에 지옥에 갔고, 거지였기에 천국에 갔는가? 아니다. 부자라고 다 지옥에 가고, 거지라고 다 천국 가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천국은 거지 떼만 모이고, 지옥은 부자 떼만 모이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도 부자였지만 천국 갔다. 

천국 가는 부자도 있고, 지옥 가는 거지도 있다. 천국과 지옥의 결정은, 외적인 조건에서 결정되지 않고, 영적 조건으로 결정된다. 그러면 무엇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게 하였나? 성경에 나타나는 그 이유를 살펴보자. 

(1)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0).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는 자신이 왜 지옥에 왔는지 알았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왔다고 했다. 

회개는 하나님을 향해 돌아섬을 말한다. 선행이 아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살 때,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사람들을 기쁘게 했다)는 말이다. (20-21)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였다. 

만일 선행으로 지옥을 면제받고, 천국에 갈 수 있었다면, "남은 식구들에게 가서, 나는 착한 일을 하지 않아 지옥에 왔으니, 너희가 이곳에 오지 않으려면, 선행을 많이 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천국에서 "오직 회개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현판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부자는 음부에서, 아브라함에게 탄원했다. 아브라함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애원을 하였다. 즉, 부자는 아브라함의 공적이, 후손인 자기에게도 미칠 것이라는 공로 사상, 혈통과 선조의 공로에 호소함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25) "얘!(자녀야!)"라고 한 대답은, 부자가 자신의 후손임을 인정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음을 밝힌다. 목사가 천국에 간다고, 망나니 아들과 딸이, 아버지 발목을 잡고 같이 갈 수 없다. 장로 아버지의 공로로, 아들이 구원 받을 수 없다. 회개해야 간다. 

(2)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생명책에 이름이 없었다. 
아브라함 품에 있는 거지의 이름은 무엇인가? 나사로다. 그러면 부자의 이름은 무엇인가? 본문에는 그 이름이 없다. 이건희씨와 같은, 부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 

그런데 본문에는 그는 분명히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이름이 없다. 그 반면에 이 땅에 살 때, 누가 거지의 이름을 알아주는가? 우리 가운데 거지의 이름을 아는 분이,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그러나 성경은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라고 분명히 기록하였다. 

반면에 부자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고, 그냥 '한 부자'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유명하다 할지라도,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무명한 사람이다. 죽은 후에 무명한 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고전6:9).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전도하러, 둘 씩 짝지어 보내셨을 때, 귀신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기뻐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눅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음을 인하여 기뻐하시기 바란다. 

(3) 나사로(라아자르,    )의 이름의 의미는? 
"그 분(하나님)께서 돕는다. 그분의 도움으로, 그분을 위하여, 그분의 곁에"라는 뜻이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았다. 그러나 부자는 자기의 힘으로 살았다. 믿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감을 말한다. 거지는 도움이 없이는 못산다. 부자는 자기의 힘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나사로가 천국 간 이유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믿음을 가졌다는 증거요, 부자가 지옥 간 이유는, 자기 돈으로, 행위로 살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믿음이 없었다. 

아무리 걸식하는 거지라 해도, 믿음이 있으면 천국이지만, 아무리 호화로이 즐기는 부자라도, 믿음이 없으면 지옥이다. 다시 말씀드려 나사로가 천국 간 이유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과 불신자의 차이점은, 주님의 도움 없이는 못산다고 생각하는 자가 믿음의 사람이고, 내 힘으로 살아간다는 자가 불신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힘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내 힘과 능력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무덤 저편에서의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세상에서 하지 못했다고, 저 세상에서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다. 오직 기회는 이 세상에서만 있다.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서나 가능하지, 무덤에 들어간 이후는 아무 소용이 없다. 

3. 어떻게 믿어야 하나? 

지옥에 간 부자는 생각하기를, 만일 죽었던 사람이 지옥을 경험하고,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면 다 믿는다고 오해를 했다. 그래서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부탁한다. 

(27-28)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만일 나사로가 가서, 자기의 남은 형제들에게 말한다면, 다 믿는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와 선지자에게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29). 이 말씀의 의미는,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 말씀이 신비주의자들의 문제점이다. 

신비로운 경험을 하면, 말씀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였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처럼 말씀의 신비로운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복음을 증거 하면, 사람들이 다 믿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요11장)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라는, 본문에 등장하는 거지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장사되어, 무덤에 있다가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사람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면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실을 알고, 본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었나요?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면, 아무리 놀라운 이적도, 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 못한다.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 마음이다. 마음이 완악하면 믿을 수 없다. 성경은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했다. 

사람에게는 "때"가 있다. 그 때를 놓치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우리는 살아있는 지금이 때임을 알아야 한다. 기도할 때, 전도할 때, 말씀을 들을 때, 들은 말씀에 순종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이때를 놓치면, 저 세상에서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다. 건너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26). 

바로 지금, 무덤 이편에 있는 바로 이 시간이 우리가 기도, 전도, 헌신, 봉사, 구제, 순종할 수 있는 때임을 알아야 하겠다. 영혼의 때가 오기 전에, 지금 여기서 믿고, 순종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결론이다. 스위스의 Felix라는 유명한 의사가 길을 걸어가다가, 친구가 걸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친구의 어깨를 치면서 물었다. "여보게 친구! 자네는 죽으면, 자네 영혼이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나? 영혼이 갈 곳은 준비되었나?" 

그런데 뒤돌아다보는 친구를 보니, 친구처럼 생긴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몇 년이 흘렀는데, 어떤 사람이 반가워하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몇 년 전에, 당신이 길거리에서 내 어깨를 치면서, 영혼이 갈 곳을 준비하였느냐고 물었지요? 

그때 이후로 내 머리 속에는, 영혼! 영혼! 이 말이 계속 맴돌았다. 곰곰이 미래를 생각하다가, 나는 영혼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교회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였다. 당신 덕분이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이지만, 그 책임은 역시 본인에게 있다. 

죽음 이후에 다른 세계가 분명히 있음을 기억하고, 부자의 길을 걸을 것인지, 나사로의 길을 걸을 것인지, 아직 무덤 이편에 있는 우리에게는 결정할 기회가 남아 있다. 영원의 문제를 어디에서 보낼 것인지 생각하고, 영혼의 때를 준비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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