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용서하기를 (마 18:21~35)

  • 잡초 잡초
  • 594
  • 0

첨부 1


용서하기를 (마 18:21~35)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2)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3)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4)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5)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6)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7)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8)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29)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0)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1)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2)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3)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4)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35)
<마태복음 18장 21~35절>

할렐루야!
평안하십니까? 건강하십니까? 
이런 저런 사연과 아픔을 가진 분들 모두에게
영육간에 강건함을 회복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 이태리 로마에서 모인
유럽지역 유학생들을 위한 집회(KOMESA)에 다녀왔습니다.
가정과 조국을 떠나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눈물로 기도하고 은혜 받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고 왔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독일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이, 
이태리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디자인을 공부하는 이 전체 3명이 참석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2005년 5월 31일, 기네스북은 
1925년 6월 1일 결혼한 영국인 퍼시 애로스미스(105세)씨와
그의 부인 플로렌스(100세)씨가 
결혼기간(80년)과 부부 나이 합산(205년)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고 발표했습니다. 
80회 결혼기념일을 맞은 애로스미스 씨 부부를 BBC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자가 행복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부인 플로렌스는 “배우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민규,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 더난출판. 참조>

많은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한 마디만으로도
자신은 물론 상대방까지 편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미안해요’입니다. 
이 단어는 딱딱하고 차가운 마음을 녹이고 상처 입은 마음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이 ‘미안하다’는 말은 지우개와 같습니다.
상처를 … 미움을 … 지워버립니다.
전 세계 지식인 110명에게 지난 2000년 동안
‘위대한 발명품은 무엇일까?’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비행기, 컴퓨터, 숫자체계, 시계, 피임약, 대학, 
거울, 미적분, 깃발, 교향악단, 아스피린 … ’등 121개의 발명품을 꼽았습니다. 

그 중에 미국의 작가이며 평론가인 더글러스 러시코프(Douglas Rushkoff)는 
지우개를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았습니다. 
그는 “컴퓨터의 ‘del’(delete) 키는 지우는 키입니다.
만약 컴퓨터 자판에 delete 키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글씨를 쓰고 틀려서 다시 써야 할 때 지울 수 있는 수정액 화이트가 없다면 어떨까요? 
인간의 실수를 수정하는 모든 것을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고 싶다”고 했습니다. 
지우개가 없었다고 한다면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많은 작곡도 어려워졌을 것입니다. 
<2009. 4. 9. 경향신문 칼럼. 참조>

저도 그의 생각에 동조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과거를 지워주는 
하나님의 용서의 지우개가 없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라는 지우개로 깨끗하게 지우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예전 모습을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43장 25절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했습니다. 

도말(塗:진흙 도, 抹:바를 말)은‘진흙을 바른다’는 의미입니다. 
집을 지을 때 울퉁불퉁한 벽돌을 쌓은 후에 진흙을 바르면 깨끗한 벽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보이지 않게 
진흙을 바르듯이 지우시고/덮으시고 기억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용서’로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는 용서의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또 한 번 용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자신의 삶을 통해 용서를 보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 삶에서 용서를 실천하는 모습이 없다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그러나 우리가 갖는 의심이 있습니다.
그것은‘얼마나, 어디까지 … 용서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의문의 답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 하는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 …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마 18:21) 하며 
예수님께 용서의 한계를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보통 세 번까지 용서하면 
크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용서하는 한계는 세 번이라고 한다.
제일 크게, 제일 많이 용서하는 것이 세 번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대한 약간의 암시가 아모스 1장 3절, 2장 6절, 
욥기 33장 29~30절 등에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용서하면 되느냐고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제한 없이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임금에게 끌려가서 
빚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지만 돈이 없어 갚지 못합니다.」 

만 달란트는 어마 어마한 엄청난 돈입니다.
만(10,000) 달란트는 과연 얼마나 되는 돈일까요?
우리 식으로 노동자의 하루 최하 일당을 50,000원으로 계산한다면
만(10,000) 달란트는 3조원에 해당됩니다.
만 달란트(3조원)라는 것은 
갚지 못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돈을 임금에게 빚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 …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고 했습니다(마18:25).

그렇게 되면 자신은 물론이요, 아내와 자식들까지 노예가 되어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절망의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그 사람은 엎드려 참아달라고 … 다 갚겠다며 임금에게 빌었습니다.(26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만 달란트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액수의 빚이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그 사람을 불쌍하게 여겨서 그 많은 돈을 안 갚아도 좋다고 
탕감(쓸 蕩, 덜 減, 빚을 완전히 면제 해주는 것) 해 주고 돌려보냈습니다.(27절)
만 달란트 빚을 해결 받았습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죽었다가 산 기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기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약 500만원)을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목(멱살)을 잡고 자기 돈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28절)
<약 3조원인 만 달란트(6000만 데나리온)에 비하면 
약 500만원인 백 데나리온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적은 돈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엎드려 빌며 참아 달라고 했습니다.(29절)
동료인데, 가깝게 지내는 사이에 엎드려 빌었다는 것은 치욕적인 일입니다.
그렇게 까지 하며 봐 달라고 했는데도 
그 사람은 자기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30절)

그 상황을 다 지켜 본 주변사람들이 몹시 딱하게 여겨 
임금(주인, master)에게 가서 모든 일을 다 알렸습니다.(31절)
그 사실을 들은 임금은 그 악한 사람을 불러다가 말했습니다.

“ …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 ”(마 18:32~33)

결국 그는 자신의 악한 행위 때문에 도리어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34절)

용서하지 아니하면 …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엄청난 구원의 은혜를 받고 있는데도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만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자기만 아는 욕심이 문제입니다.
그래서“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약1:15)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욕심 때문에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죄를 품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주기도문)에도‘용서’가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6:12) 
누가복음 11장 4절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눅11:4)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지 못한 사람, 실수 많은 사람 
허물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때문에 
너희들이 하나님께 용서 받은 것을 기억하면서 
너희들도 사람들을 용서하며 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용서’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 곳곳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마가복음 11장 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마태복음 6장 14~15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을 용서의 눈으로 보기보다는 비난의 눈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3절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고 했습니다. 

들보는 집을 만들 때 쓰는 기둥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 티끌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자기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작은 티는 보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냉혹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관대해야 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냉혹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 …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눅23:34)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행하는 죄까지도 
용서해 달라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물론 용서가 죄를 묵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묵인하는 것은 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고전13:6).
그러므로 용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적극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나는 용서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미운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두 가지를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분이 예수님의 사촌 쯤 되는 분일 것이고 …
또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바보일 것입니다.
어떻게 미운 사람이 한 명도 없겠습니까?

사실 저도 싫은 사람,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 조금 회복되다가 
어느 날 그 사람을 보면 또 다시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괴로워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해되지 않아서, 용서가 안돼서 …
우연이라도 마주칠까봐 걱정되고, 모임에 가면 부딪치지 않으려고 
솔직히 두리번거리며 피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런 제 자신이 싫을 때가 있고 
그런 제 자신을 용서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먼저 … 화목하고 그 후에

용서가 얼마나 중요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고 했습니다.
‘예배’는 ‘절한다, 엎드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설명하자면, 사이가 좋지 않은 형제가 있는데 
동생이 부모님에게 인사드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그 아들에게
‘얘, 내게 절하기 전에 먼저 형과 화목하게 지내거라.
내게 고기 들고 오는 것보다 너희 형제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게 
난 더 좋단다. 먼저 형과 화해하고 오너라’하는 의미입니다.

“ …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9∼15)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용서’입니다.
예배드리는 것보다, 예물 드리는 것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것이 ‘화해’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않으면) 스스로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분노로 인해 
두통, 소화불량, 불면증, 우울증 등 심인성 질환을 얻게 됩니다.
미움은 죄로 타락한 사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탄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 누구를 미워하고 사는 사람, 
용서하지 못하고 품고 사는 사람은 지금 이유가 어떻든지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하면 좋고 안해도 상관없는 선택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내 생각에는,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돼.
용서 할 수가 없다, 아니 못해 …’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저럴 수 있어. 어머니가/자식이/형제가/친구가 …
저 사람 왜 저래. 집사가/장로가/목사가/교회가 왜 그래 …’라고 합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정의감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교만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베드로처럼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됐지. 얼마나 더 하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정한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정한 계산과 기준을 뛰어 넘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세운(정한) 기준과 정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수준에 맞추라고 하십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만 달란트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선물 ‘용서’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용서’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용서하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의 쓴 뿌리는 
결국 인체를 산성화시켜서 효소의 활성도를 떨어뜨리며 
각종 병원균 때문에 저항력이 감소되어 병적인 체질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평생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심을 품고 살아간다면 …
마음에 미움을 가득 품고 살면 …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용서는 받아들이는(acceptance) 것입니다.
‘그래 그렇지 뭐’하며 받아들이면 됩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자기 자신입니다.
이태리에서 유학생 집회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
좀 싼 가격의 비행기표를 끊기 위해 직항이 아닌 
경유하여 오는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 

로마에서 두바이로 가는 좌석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데
제 앞에 인도사람인지 파키스탄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부부가 남자 아이 둘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큰 아이는 10살 쯤 되어 보이고, 
작은 아이는 5살이 채 안되어 보이는데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뛰고 소리 지르는 그 아이들을 그 부모는 혼내지도 않고 그냥 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어찌나 화가 나던지요.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인지 작은 아이가 쵸콜릿을 먹다가 
쵸콜릿을 바닥에 던지고 자빠져서 막 소리 지르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같이 갔던 목사님들에게 
‘아유 저런 건 몇 대 맞으면 되는데 … 그냥 놔두나’하며 흥분 했더니 
옆의 목사님이 ‘고목사가 혼내줘 …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 어쨌든 비행기를 탔습니다. 
함께 갔던 몇몇 목사님들과 같은 줄에 앉아 있는데
막 울며 떠들던 그 가족들이 자리를 찾아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설마’했는데 그 가족들이 제 앞좌석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4시간 좀 넘게 비행하는 동안 
잠도 안자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데 아주 골치 아팠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는 전혀 상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용서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하니 … 저는 참을 수밖에요.
그러다 나중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래, 놀아라, 뛰어라, 소리 질러라 …’하며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용서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 많고 죄 많은 우리들을,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받아 주셨습니다.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회개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요3:16).
-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요1:12).
-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받아 주셨습니다(빌3:20).
우리를 천하보다 귀하게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이 가장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먼저 자신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살아 있는 것, 나와 얽힌 가족, 지금 생김새 … 등
우리가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은 받아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첫 번째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생김새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키가 큰 것 작은 것, 얼굴 생김새, 주름이 늘어나고,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까지도 모두 그냥 받아 들여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겠습니까.

“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마 19:19)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지식으로, 내 경험으로, 내 판단으로 생각하기에 
잘못하고, 잘못되고, 이해 안 되는 것이라도 
그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입니다.
물론 그것이 죄까지 묵인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칭찬하면 칭찬을 먹습니다.
누가 나를 욕하면 욕을 먹고, 험담을 하면 험담을 먹어야 합니다.
안 먹고 버틸 방법이 없습니다. 먹어야 합니다.
좋고 나쁜 것들이 선택의 여지없이 우리 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받아서 소화시켜 버리면 됩니다.
욕을 먹었다고 해서 그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깨끗이 소화시켜 내보내는 것입니다.

배설을 못하는 사람은 환자입니다. 
그래서 약을 먹어서라도, 기계를 이용해서라도 강제로 빼냅니다.
배설을 안 하려는 사람은 죽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입니다.
배설해야 합니다. 쏟아내 버려야 합니다.
품고 사는 것은 결국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 죄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뒤로 던지신 것입니다.

이사야 38장 17절에
“ …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했습니다.

등 뒤에 던져 버리는 용서가 ‘진짜 용서’입니다.

부부이기에 져야 하는 십자가, 형제이기에 져야 하는 십자가
예수 믿기 때문에 져야 하는 믿음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 것을 던져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등 뒤로 던지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용서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 자신을 위하여”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오늘까지 17번째 
‘예수 믿는 사람이 힘쓰며 살아야 할 것’에 대해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 17가지 중에 자기 자신을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용서’입니다. 쏟아 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소화시켜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자신이 평안하고, 가족이 평안하고, 
일터가 안정되고, 교회가 평안하고 화목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에 힘쓰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힘쓰고 살아야 될 것이 이렇게 많습니다.
그 중에 우리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를 위하여
용서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의 허물과 죄로 예수님 등 뒤로 던지신 하나님
용서 받은 기쁨과 감사로 살고 
그 용서를 실천하며 사는 믿음의 주인공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