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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의 도 (막 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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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도 (막 6:7~13)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6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인구가 단지 250만에 불과했지만 아랍은 1억이 넘었습니다. 누가 봐도 이것은 무모한 싸움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었던 모세 다얀 장군에 방송을 통해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2534년 만에 되찾은 조국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 이 전재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최 단기간 내에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전 장병이 최신식 무기로 무장해 있기 때문입니다.”
서방 첩보원들은 이스라엘이 정말 위력적인 최첨단 무기를 개발한 줄 알았습니다.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군인들을 전쟁터로 내 보내고 국방장관은 자신은 방송국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아무리 대적이 많고 강해도 하나님과 견주어 이길 수 있는 대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군의 여호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승리는 하나님이 내 방패요 상급이 되어 주시는 바 우리의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의 전쟁이 총을 들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기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적을 찾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요 제자로 삼으시는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제자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 이 시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제자를 부르시며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적군의 장수가 대단합니다. 골리앗이라고 하는 장수가 블레셋 군대의 앞장에 서서 이스라엘과의 싸움을 촉구하는데 사울 왕은 물론 이스라엘 군대가 저를 보며 벌벌 떨었습니다. 그 누구도 골리앗과 맞서 싸워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터에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러 왔던 소년 다윗이 그런 모습을 보고는 내가 나가서 저 놈을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합니다. 어이없게도 그런 다윗에게 사울은 나가서 싸우라고 합니다. 그때 골리앗은 그런 다윗을 보면서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라고 하면서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집니다.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 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대적 마귀가 아무리 골리앗처럼 대단하다고 해도 여전히 주님과 함께 하는 다윗과 같은 우리들 앞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우리에게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그 권한이 우리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마귀가 대단해도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우리를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의 손발을 다 묶어 버릴 수 있고 다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 전쟁을 앞장서서 지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언제든지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귀가 강하다고 해도 주님과 마주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건 상대도 안 되는 게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면 됩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묶어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마귀가 꼼짝도 못합니다. 

한데 우리는 그 대상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엉뚱한 상대와 싸우려고 합니다. 우리가 마주 싸워야 될 상대는 악한 마귀지 가족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가 아닙니다. 악한 마귀는 결코 골리앗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놓고 싸우자고 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을 숨겨요. 그리고는 우리 가족들을 살살 이용해서 우리 마음을 상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아니 때로는 우리의 마음도 움직여서 우리로 하여금 지치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여기에 우리가 속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왜 우리가 짜증스러워 합니까?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합니까? 그게 우리 마음을 속이는 마귀의 장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며 제자로 세우실 때 무능력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능력 그것도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러기에 그 능력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사람과 마주해서 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상은 그 마음을 움직이는 더러운 귀신들 악한 마귀들입니다. 그래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 마음을 움직여 더러운 짓을 하게 하는 악한 마귀만 물리치면 됩니다. 그러면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온전해지듯이 그렇게 온전한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뀌는 순간 더 이상 그는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 편에서 적을 물리치는 좋은 전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미운 짓 한다고 해서 누가 못된 짓을 한다고 해서 그를 미워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그를 속이고 우리를 속이는 더러운 귀신입니다. 이 악한 마귀가 속이는 자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요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들 자신조차도 악한 마귀에게 속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 여건이나 환경 우리 몸의 컨디션이나 기후 변화 등에 의해 우리 마음이 쉽게 흔들리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들을 권면하기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좌절하게 만듭니까? 우리를 속상하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나의 무력함 때문에 속상해 하지는 않나요? 내 성격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속상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내 모습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주님은 받아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꾸며야만 이쁘다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나도 내 마음에 안 든다고요? 그런 모습조차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점차 바꾸어 가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를 두렵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추하고 더럽게 만드는 그 어떤 것도 우리는 다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 자신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들은 오직 주님의 능력만 힘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지식의 홍수 시대라고나 할까요? 인터넷 창에서 지식 검색을 하면 내가 원하는 자료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시대입니다. 문제는 그 자료들이 정말 내게 유용한 자료냐, 아니면 잘못된 정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잘못된 자료로 인해서 엉뚱한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오해를 할 수도 있고 그러한 실수는 곧 우리들의 삶에 큰 영향을 치밀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잘못될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은 바로 주님이 주시는 지혜요 능력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주시는 능력은 전능의 능력입니다. 열쇠 중에 만능 열쇠라고 있습니다. 소위 마스터 키라고도 하지요. 이거 하나만 있으면 호텔 문을 다 엽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이 능력이 바로 그렇습니다. 내 힘으로 내 지혜로 할 수 없는 것도 주님이 주시는 힘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꼭 필요한 곳에 가장 적절한 능력으로 수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그것입니다. 분명 주님이 주시는 능력이 이렇듯 대단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능력을 구하기보다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찾더란 말입니다. 

역시 우리들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나 할까요? 무엇이든지 빨리 빨리 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조차도 참지를 못합니다. 언제 그러고 있냐고 합니다. 무어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느냐고 하지만 요즘이야 즉석 조리 음식 시대가 되어서 3분이면 다 되지를 않습니까? 아니 일분도 참고 기다리지를 못해 엘리베이터만 타더라도 문 닫힘 버턴을 눌러야 되지 않나요? 뭐 그렇기에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고 있는 것이겠지만요. 하지만 주님의 능력이 이런 인스턴트가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을 즉석 요리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능력을 바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선 주님께서 주시는 그 능력을 바로 사용할 수 있기를 위해서 주님이 허락하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와 분별력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묶어야 할 것과 풀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바로 분별하여야 하고 우리가 붙잡고 있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바로 알아야 하고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바로 알아야 하며 그 모든 것에 있어서도 바른 순서로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능력 권능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까지 만들어 주십니다. 한데 과연 우리는 그 능력을 바로 사용하고 있으며 온전히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컨대 거의 대부분의 분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사용하고 계신 휴대전화의 기능을 다 활용하고 있으십니까? 아닐 것입니다. 사용하는 것보다 사용하지 않는 기능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서 그것을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사들을 주셨는데 과연 그 은사들을 활용하고 계시는지요? 방언만 해도 그렇습니다. 방언은 자기 자신에게 보다 더 유익한 은사라고 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와 축복 기도를 하기 위해서도 많이 활용이 되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내게 복으로 돌아오기에 내게 더 유익한 은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받은 바 은사를 얼마나 활용하고 계십니까? 

나는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조차 없다고 아니면 나는 너무 피곤해서 기도할 힘도 없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과연 그럴까요? 기도가 어떤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형식이나 절차를 지켜야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입을 열고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열면 됩니다. 그런데 기도도 힘이 든다고 합니다. 왜요? 벌써 속고 있는 것입니다. 속이는 자는 그렇게 간교합니다. 어떤 때는 논리적으로 우리를 속이고 어떤 때는 감정에 호소해서 우리를 흔들리게도 만듭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급한데 왜 돌아갑니까? 그러기에 더 질러가야죠? 그래서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간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라도 변함없는 진리는 내 능력 내 지혜 내 수단과 방법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우리가 시험에 들기 꼭 맞습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르려고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지혜를 구하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지쳐 쓰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쌩쌩합니다. 왜요? 주님이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엘리야가 3년만에 비가 내릴 때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아합 왕이 탄 마차보다 앞서서 뛰어갔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능력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게 힘을 주시면 없던 힘도 생깁니다. 전혀 알지 못했던 것도 알게 될 때가 있고 무서워서 벌벌 떨던 것도 아주 담대하게 대할 수 있게 됩니다. 만나기가 두렵던 사람도 그냥 편하게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전에는 염려 때문에 밤을 지세웠다면 지금은 너무 편해서 이상할 정도로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능력입니다. 남들은 잠 한숨 못자고 어쩔 줄 모르는데 나는 태평합니다. 

왜요? 주님의 능력이 나로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렇게 믿어져요. 오죽하면 너는 어쩌면 그렇게 태평이냐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주님의 평안이 나를 사로잡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이 네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은 악한 마귀가 나의 삶을 가로막기 위해 놓아둔 모든 장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애물을 피해갈 수 있도록 주님이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주님이 태워주시는 대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고 따라가면 됩니다. 주님이 기다려 하면 기다리면 되고 조준하라고 하면 조준하면 되고 쏴 하면 쏘면 됩니다. 물론 조준하고 쏘는 대로 맞출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켜 주신다는 것도 또한 우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죠. 광야라고 하는 것,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훈련과정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능력을 주셨는데 아직 나는 그 능력을 바로 사용할 줄을 모릅니다. 

그것을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과 내 능력을 바로 분별할 수 있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리석게 내 능력으로 무얼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지혜로 무얼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다른 사람의 능력이나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무한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도 주님의 능력에 비하면 그건 삽과 포크레인처럼이나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아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능력이야 말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왜요? 그 뒤에 숨어서 조종하는 더러운 귀신 악한 마귀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서로 다투게 만들고 주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게 만들고 작은 일에도 실망하게 만들고 주저앉게 만드는 것이 보이기에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인 것 같지만 뒤에서 사탄이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필요한 것이 주님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한데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지는 날 주님이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그 날 이 모든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그런데도 우리가 그걸 쓸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아니 내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조차도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먼저 악한 마귀의 계교를 묶어 버리십시오. 주님의 능력으로 악한 마귀가 떠나가도록 명령하십시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 믿음이 부족해서 안 된다고요? 아니요. 그냥 믿음으로 활용하시면 됩니다. 다른 것을 이용하려고 하지 마시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의지해서 세상을 사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로 항상 이기고 또 이기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나의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고 승리의 방패가 되시는 주님을 힘입어 오늘에 승리자가 다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영육 간에 치료를 해야 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만을 믿고 바라보게 되면 주님이 우리 주위에 중보자를 붙여 주십니다. 소위 도우미를 붙여 주십니다. 

때로는 그 도우미가 누군지조차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멘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그건 사실은 주님이 그렇게 나를 붙들고 계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왜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비록 못났어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에 잘 난 다른 사람보다 비록 말썽쟁이고 문제투성이고 볼품도 없고 해도 그런 나를 하나님이 감싸주시고 안아주시고 내게 필요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영육을 치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고 했는데 그런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영육간에 고쳐주고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못났다 나는 못한다는 못해 신앙을 버리십시오. 우리가 제일 먼저 치료 받아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나는 못났다 나는 못한다는 자포자기형입니다. 

내가 자동차 운전을 못한다고 해서 자동차를 탈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나는 못해의 병은 먼저 고쳐야 되고 또 고쳐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이상 주님이 할 수 있도록 내게 능력을 더하여 주심을 믿으십시오. 

둘째로 고쳐야 될 병은 시기의 병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 보면 부럽습니다. 그거 당연합니다. 나는 그렇지 못한데 다른 사람은 잘 됩니다. 어찌 부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부러움을 넘어서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는 나보다 못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나보다 더 잘 되냐고 하겠습니까? 정말 사실이 그렇다면 거기에는 그 사람이 잘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누구는 부모를 잘 만나서 그렇다고도 합니다. 누구는 때를 잘 만나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잘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어떤 부모보다도 하나님이 더 좋으신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좋은 부모는 기껏해야 돈과 사랑밖에 더 주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주시고도 남는 분입니다. 

때를 맞추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구 때문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도 이런 사랑을 받기를 원하고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고백하십시오. 그런 고백이야 말로 참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나 자신과 내 삶을 축복하십시오. 

그래서 먼저 내 생각과 내 삶과 내 믿음이 고침을 받아야 됩니다. 내 영과 혼과 육이 이렇게 고침을 받게 되면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아래 우리 모두가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우리 이웃에게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바로 세워나가는 일을 우리가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요즘의 세태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웃과의 교제가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운 사람과만의 만남과 교제가 아니라 이 폭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자주 식사도 함께 하고 크고 작은 일에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미십시오. 내가 먼저 한발 다가가면 됩니다. 그리고 조건없이 상대방을 도울 수 있다면 도우십시오. 당연히 병자는 고쳐주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라고 했습니다. 이는 약도 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방법만 고집할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고침 받도록 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서는 감사함으로 보답하면 되는 것이구요. 때로는 내가 도왔어도 거꾸로 욕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멈추지 마십시오. 그거 겁내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을 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그런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많은 병자를 기름을 발라 고치라는 것입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는 그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있는 어떤 문제들을 함께 도와 해결해주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 귀한 은혜가 우리 안에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에센바흐라는 사람은“한 사람의 진실한 벗은 천명의 적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 힘 이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인생에서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하시고 아름다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주 귀중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지금 여러분들 곁에 손으로 셀 수 있는 보화와 같은 친구가 얼마나 있습니까? 조건 없이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친구, 마음을 나누고 서로 위로해 주고 격려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얼마나 있습니까? 
나의 주위에 나를 만나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흔히 물이 너무 깨끗하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그 깨끗함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깃듭니다. 

수잔 폴리스 슈츠가 지은 ‘친구란’ 글을 소개합니다. 
"친구는 네가 하는 모든 일,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사람. 
친구는 즐거울 때, 괴로울 때 찾아오는 사람. 
친구는 항상 너를 격려해주면서 너와 경쟁하지 않는 사람. 
친구는 너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위로해주는 사람. 
친구는 그가 없이는 자기 자신이 완전할 수 없는 또 다른 너 자신" 
이런 귀한 친구가 되심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모든 은혜와 복을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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