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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택한 나의 그릇 (행 9: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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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한 나의 그릇 (행 9:15~16)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인생과 삶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 두 가지 과제를 던져줍니다. (1) 우리 삶의 중심성의 문제입니다(엔 크리스토). (2) 집중성의 문제입니다. 내 인생이 얼마만큼 예수님 안에 있는가? 하는 것과 얼마만큼 집중하고 있는가? 부르심에 얼마나 합당하게 응답하고 있는가? 이 두 가지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1849년 12월, 스물여덟 살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F. M. Dostoevskii, 1821-1881)는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형장에서 시계를 보니, 남은 생명이 5분밖에 없었습니다. 5분의 시간이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다고 합니다. 순간, “5분 후에 나는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졌다고 합니다. 28년이라는 세월이, 너무나도 후회스러웠고, 또 아쉬웠다고 합니다. 5분의 시간이 거의 다 흐르자, 실탄이 장전되는 소리가 났습니다.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떨었습니다. 

바로 그때, 병사 하나가 흰 손수건을 흔들며 “도스토예프스키를 죽이지 말고 살리라”는 ‘황제의 특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죽음 직전에서, 목숨을 건진 것이지요. 그 이후 그의 생명이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시간을 금쪽같이 아끼며 살았다고 합니다. 성경을 유일한 벗으로 삼고, 인간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면서, 불후의 명작을 남겼는데 그 책이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와 같은 작품들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은 그릇된 자신의 열정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은, 무려 4차례씩이나 그를 박해자로 증언하고 있습니다(1-3, 5-6, 13-14, 21절). 

중요한 것은, 그가 왜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가 되었던가 하는 이유입니다. 자기 스스로 밝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행 22,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1)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2)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 

그가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가 된 중요한 이유는,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탈무드; 성경다음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가르침, 미쉬나; 랍비들의 구전 모음집, 율법 해설서 미드라쉬)을 따라서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조상들의 교훈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입니다.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이라는 말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십계명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성문율법). 십계명 제4계명의 성문율법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조상들은 간단하고 명료한 ‘안식일 법’을 잘 지켜보겠다는 열정으로, 이 법을 39가지의 금령의 법으로 바꾸었습니다(사족을 많이 붙인 것이지요). 

39가지 금지법으로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39가지 금지법’ 하나하나마다 또다시 세세한 ‘39가지 금지규정들’을 덧붙였습니다(사족에 사족을 단 것이지요. 무려 1,521가지). 지극히 작은 한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간단명료한 율법말씀을, 온갖 율법의 멍에로 치장을 한 것입니다. 이 조상의 율법에 엄한 교훈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무엇이 됩니까? 율법주의가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은 조상들의 엄한 교훈이 열정의 기준이 되다보니, 하나님 말씀의 본래의 ‘뜻’을 선포하고 가르치시는 예수님과 어찌 부딪히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근본적인 것을 판단하는 꼴이 된 것이지요. 결국,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들의 엄한 교훈’으로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저 눈먼 열정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바울이,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는 의미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눈먼 신앙의 열정이 지나쳐, 사람을 정죄하고 위협하고 죽이는 일이 바울 당시 유대인들에게만 있던 일일까요?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도 그릇된 열정들이 있었습니다. 지나간 한국교회 역사 속에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릇된 열정들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그 주인공 역할을 하며 살아왔던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 본문은, 우리의 그릇된 열정에 개입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해 줍니다. 그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성공적인 사람이 됩니다. 인생의 걸음걸이 방향이 바뀝니다. 열정의 질이 바뀝니다. 내 인생이 집중하는 방향이 바뀝니다. 매진합니다. 그 예수님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릇된 열정에 빠진 사울에게 찾아오셨던 주님께서, 사울에게 그 때 주셨던 결정적인 말씀 한 마디가 있지요. 사도행전 9, 15말씀입니다.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도행전 9, 15 이 한 절 말씀이 사울의 전 존재를 다 바꾸어 놓은 겁니다. “주께서 이르시되(‘아나니아’),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전적인 주님의 주도적인 개입사건이었고, 주님의 부르심의 사건입니다. 사울중심적인 그의 회심사건이 아닙니다. 사울은, 자기 스스로 예수 믿는 사람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그릇’이 될 생각은 꿈에도 가져 본 적이 없던 사람입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없애기 위해서 예수님을 크게 거스르던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울은, 한동안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지만 늘그막에 가서 그것이 잘못임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믿고, 사도가 된 사람도 아닙니다. 

박해자로 한창 기세를 올리며 활동하던 그릇된 자기 열정의 정점에서, 예수님에 의해서 강제로 꺾어진 사람입니다. 열정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으로 자기 인생이 꺾어진 사람입니다.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이 은혜를 받는 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다 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아니, 이미 이 은혜를 받은 자들 아닙니까? 우리의 기도가 있다면, “주여, 내게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은혜 받은 자들입니다. 

개인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은혜를 어떻게 받는 자인가 하는 겁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 의외로 많습니다. 가룟 유다 보십시오. 참담한 인물입니다.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자였지만, 가장 불쌍한 자가 된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울 왕 보십시오. 그는 초대 왕이라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지만, 헛되이 받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은 그의 末路가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각 사람마다 적절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주신 은혜를 선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신 은혜를 헛되이 만들어 버리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보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 뻔 하였노라”). 사도 바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했습니다(고전 15, 10). 

사울을 부르신 주님의 은혜는, 분명했습니다. 박해자 사울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박해받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복음에 역행하던 그를 복음 선포자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가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뜻은, 그릇 스스로가 자기의 존재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릇을 쓰는 주인(주권자가)이 따로 계시다는 의미가 전제 된 말입니다. 

사울을 “택한 나의 그릇”으로 부르신 부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담아서 옮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받은 자든, 그렇습니다. 교회만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우리의 활동과 삶 속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존귀한 이름’을 담아서 나르는 그릇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담아서 나르기 보다는 그릇인 내 존재를 드러내고자 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능력 많은 목사라고 해도, 아무리 훌륭한 교회라 하여도, 아무리 좋은 교단이나, 공동체나, 선교단체라 하더라도, 그릇된 존재들이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드러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이 가려지고, 덮어지는 일은 없는 지, 돌아볼 일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였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두고 고백한 유명한 말이 있잖습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 30). 

요즘 현대사회에 급류처럼 흐르고 있는 트렌드 중, 뚜렷한 흐름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가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보편적인 공감을 얻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중가요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TV에 많이 나오는 가수들이 주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점점 늘어가는 ‘클럽 문화’ 등으로 비주류, 소외받는 뮤지션들, 일부 마니아들의 지지만 얻던 아티스트들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보편적인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장기하와 얼굴들). 

방송인 손석희 씨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론이 70으로 가든 80으로 가든, 혹은 20으로 가든 30으로 가든 간에, 그게 꼭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면서 “꼭 70-80%의 여론이 지고지선이라고 볼 수 없어서 20이나 30이 옳을 가능성은 없는지에 대해, 늘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시는 대로 손석희의 󰡔시선집중󰡕이나 󰡔100분 토론󰡕은 결코 시청률 1, 2위를 다투는 방송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진행하는 방송은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가장 매력적인 아이콘(icon, 肖像)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자기를 드러내기 보다는, 시청취자들로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게 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집중하려는 진행자의 철학 때문이지요. 

그는, 인맥을 싫어합니다(그러다보니, 늘 외롭습니다). 유력한 인사들과 안면 트고 친밀한 관계 쌓아 놓으면 좋은 면도 있겠지만, 방송진행자로서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입니다. 방송인으로서는 외롭지만, 그 대신 그는 ‘視聽取者’라는 ‘최고의 인맥’을 가지고 있는 방송인이 아닙니까? 하물며, 예수님의 존귀한 이름을 담아서 나르는 그릇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님보다 내가 더 유명해지고, 내 이름이 더 알려지고, 내가 더 인정받으려는 마음, 버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을 박해받는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본문 16말씀 보십시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주님의 이름을 담고 옮길 그릇이라면, 주님께서 몸소 그 그릇 된 사람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사그리 걷어치우시고 그 사람이 마음 놓고, 주님의 이름을 담고 갈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을 부르신 예수님의 뜻은 그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담고 나아가는 길은 잘 닦인 곧고 넓은 고속도로가 아니라 가시밭길과 같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길에는, 수많은 예기치 않는 고난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예전처럼, 신앙 때문에 순교를 각오하지 않아도 됩니다. 북녘 땅 지하교회 우리 형제들은, 지금도 순교를 각오하면서 예수 믿고 있습니다. 대북선교단체인 모퉁이돌 선교회에 따르면 1995년도 이후에 최소한 3,720명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지하교회 교인들이 처형되었다는 통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시대의 신앙의 敵은 무엇일까요? 세속적인 성공주의입니다. 물질만능주의입니다. 예수 믿으면, 잘 되고, 성공하고, 존경받고, 영광을 얻는 줄로만 여기는 기복적인 신앙이 우리의 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 믿다가 어려움 당하면 그 고난을 굉장히 부끄러워합니다. 왜 입니까? 예수 믿으면 남부럽잖게 성공하고, 잘되는 줄로만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보다는, 내 명예가 더 소중합니다. 교회의 직분을 계급이나 신분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명예로 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바울이 당대의 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존경을 받은 사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바울을 귀히 여기고 높이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던 그의 삶과 생애를 재평가해주었기 때문이지요. 정작 바울 자신은, 고난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가지고 있던 자화상(초상)이 무엇인지 우리가 보지 않았습니까? 

자기를 예수님의 노예라고 불렀습니다. ‘약한 자’로 고백했습니다. ‘바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죄수’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때문에 갇힌 자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로마 원형극장에서 처형될 최후의 구경거리와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쓰레기와 만물의 찌꺼기라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痕迹(烙印, 스티그마)이 새겨진 것으로도 기뻐했던 자입니다. 

바울은 외모가 초라했던 사람입니다. ‘바울과 데글라 행전’에 의하면, 키가 자그마했고, 안짱다리였습니다. 눈썹은, 맞붙은 일자눈썹이었다고 합니다. 코는 얼굴에 비해 너무 컸다고 합니다. 비록 외모는 초라하였지만, 복음의 열정은 지지 않던 사람입니다. 

바울을 귀히 여긴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그는 가는 곳마다 환대받고 존경 받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자기 자화상을 그리 말했겠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노예 있습니까? 노예십니까? 약자 있습니까? 약자십니까? 바보 있습니까? 바보십니까? 갇힌 자 있습니까? 갇힌 자십니까? 

그런 후에 종국에는, 원형극장에서 맹수에게 검투사의 칼에 처형될 최후의 구경거리로 대기 중인 분, 계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진정한 인생의 성공자였습니다. 부르심에 자기 전 생애를 집중해서 푯대를 향해서 달려갔던 자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의 이름을 위하여 택함 받은 그릇으로 부름 받은 사명에 합당하게 행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 
우리를 “택한 주님의 그릇”으로 불러 주신 하나님 은혜, 감사드립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주님의 이름을 전하고 높이는 데, 집중하는 믿음의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보다 우리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던 일을 이제는 다 버리게 하시고, 존귀하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박해받는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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