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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손하십시오! (사 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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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십시오! (사 10:5~19)
 
 
1. 교만

‘Dave Egner’라는 한 기독교인 학자가 어떤 학회에 발표자로 참석했습니다. 그 학회에는 그 말고도 다른 연사들도 참석하여 같은 시간에 발표가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발제자들 중에는 아주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도 한 사람 있었습니다. 학회가 시작되자, 진행자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여러 발표들을 소개하면서 ‘될 수 있으면 그 유명한 학자의 발표장에 많이 참석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그분을 이번 학회에 모시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들은 ‘Dave Egner’는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죠. ‘나도 어느 정도는 알려진 사람이고, 나도 내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그 사람만큼 많은 시간을 썼지 않는가? 그리고 이 학회에 오기 위해 가족들과의 시간도 포기했어. 그런데 저 학회 책임자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발표에만 참석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느꼈고, 그래서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세미나를 시작하기 위해 발표장으로 가고 있을 때, 주님은 그에게 불쾌하고 평안이 없는 이유는 바로 교만과 시기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발표에도 많은 사람들을 보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Dave Egner’라는 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이나 혹은 나의 경쟁자를 나보다 더 낫다고 말할 때, 그리고 내 노력과 수고를 인정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그만 평안을 잃고 흔들리게 됩니다. 그 이유가 바로 우리의 자만이고 교만 때문이지요.

미국의 유명한 학자이자 우리나라에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스티븐 코비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자만”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사는 것에서의 자만”입니다. ‘사는 것’에서의 자만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수입이 자신의 능력과 수고에 맞는지 어떤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수입이 다른 사람의 수입보다 많은지 어떤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카락, 옷, 체형 등 자신의 외모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것에서의 자만”입니다. 자신이 가진 친구의 수, 자신의 지위, 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칭찬의 양으로 자신의 가치를 재는 것이죠. 

세 번째, “배우는 것에서의 자만”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아느냐’ 하는 것보다는 ‘최고의 점수를 받느냐’ 또는 ‘최고의 지위에 오르느냐’ 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유산을 남기는 것에서의 자만”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주고 더 많이 남기는 것, 즉 업적이나 성취로 인정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교만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본문은 우리가 교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구체적인 실례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2. 교만을 벌하시는 하나님 

1) 죄를 범한 유다에 대한 채찍으로 사용된 앗수르

이사야 9장 8절부터 10장 4절까지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범죄에 대하여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9장 9절, 10절, “…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 그들은 선지자를 통하여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혹시 외국 군대의 침공을 받아 손상을 입을지라도 자신들의 힘으로 이전보다 더 강하고 좋은 것으로 다시 짓고 쌓으면 된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이 완악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아람이나 블레셋 등을 일으켜 그들을 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9:11,12). 이런 거듭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9장 13절,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다 강력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모든 백성, 심지어 불쌍한 고아와 과부까지 긍휼히 여기지 않고 벌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9:14~21). 그때 하나님께서 유다를 벌하시고 징계하시는 매와 몽둥이로 사용하실 민족이 앗수르, 즉 앗시리아였습니다. 

2) 앗수르의 교만

그런데, 하나님의 몽둥이로 쓰임을 받은 앗수르가 원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났습니다. 앗수르는 자기들이 잘나서 유다와 열국을 무너뜨린 것처럼 교만해졌습니다. 죄를 범한 유다를 징계하는데 사용된 막대기와 몽둥이에 불과한 앗수르가 그것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 지혜와 자기 능력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7,8). 그래서 하나님은 5절에서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본문의 흐름은 유다의 죄와 그에 대한 경고의 말씀에서 앗수르에게로 돌려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앗수르의 교만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❶ 먼저, 8절을 보면 그들은 “내 고관들은 다 왕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앗수르의 왕이 교만하여져서 스스로를 “대왕”이라고 불렀으며(사36:4), 자기 신하들까지 다른 나라의 왕들과 버금가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또 그들은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라고 말했습니다(9). 무슨 말입니까? 

앗수르인들은 그동안 赫赫한 戰果를 거두어왔습니다. 앗수르가 공격한 성읍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百戰百勝이었지요. 그래서 북쪽에 있던 자신들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지금까지 승전을 거듭했다는 것과 함께, 그 민족과 국가의 이름들을 열거하면서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치상 제일 북쪽에 있는 ‘갈그미스’는 유브라데 강변에 위치한 성읍으로서 B.C. 717년에 함락되었습니다. 그 아래 있는 ‘아르밧’은 수리아의 성읍으로서 B.C. 740년에 함락되었습니다. 

‘갈로’는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니므롯의 도시로서 B.C. 738년에 아르밧을 함락시킨 디글랏빌레셀 3세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오론테스 강변에 위치한 ‘하맛’은 B.C. 720년에 함락되었습니다. 수리아의 수도인 ‘다메섹’은 B.C. 732년 디글랏빌레셀 3세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는 B.C. 722년에 함락되었습니다. 이렇게 앗수르는 자신들이 함락시킨 민족과 도시들을 열거하면서 거들먹거리고 있습니다.

❷ 그런데요 여러분! 앗수르가 이상의 성읍들을 자신들이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10절, 11절, “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고대의 전쟁은 그 부족이나 나라가 섬기는 신들 간의 전쟁으로 여겨졌는데, 앗수르의 승리는 곧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승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앗수르가 여러 나라를 정복한 것은 그들의 신들보다 앗수르의 신의 힘이 더 강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앗수르의 다음 목표는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라는 것, 예루살렘도 다른 성읍들처럼 자신들에게 敗北당함으로서 유다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역시 다른 우상들과 마찬가지로 앗수르와 앗수르의 신 앞에서 무기력할 것이며, 따라서 여호와 역시 앗수르의 신보다 더 못한 신임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❸ 그들의 교만은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하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13, 14절,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거둔 모든 성공을 자신의 힘과 지혜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라고 여겼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신들에 의해서 민족과 국가의 경계가 달라진다고까지 하면서 이제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앉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는 말에서 절정에 달합니다(13). 여러분, 앗수르의 교만이 어디까지 높아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오르려고 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교만이었습니다. 

3) 앗수르의 교만에 대한 징계

그러므로 하나님은 앗수르를 징계하려고 하십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 그 말씀을 외면할 때 징계하셨는데, 앗수르가 그와 같은 죄를 저지를 때에 가만 두실 리가 있겠습니까? 12절,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는 말씀처럼, 먼저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후, 그 다음에는 앗수르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고, 또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분노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무엇에 대하여 분노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12절부터 14절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앗수르의 죄는 “완악한 마음”과 “높은 눈의 자랑”인데요, 13절과 14절을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손의 힘과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다. 

우리는 총명한 자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 손으로 세계 지도를 바꾸었고 여러 나라의 재물을 약탈하였고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을 낮추었다. 우리는 용감하다. 우리가 열국의 재물을 얻을 때에 마치 어미 새가 도망가고 없는 새의 보금자리에서 알을 가져오는 것처럼 어느 누구 하나 우리 앞에서 입도 제대로 벌리지 못했다.’ 여러분, 앗수르가 교만해져서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렇게 심각한 착각 속에 빠져 교만해진 앗수르를 비유하는 것이 15절, 16절에 나옵니다. 그 비유는 “도끼와 톱과 막대기와 몽둥이”입니다. 이 네 가지 모두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입니다. 주인이 자신이 필요한 일에 맞게 사용하는 연장들이지요. 그런데 이 연장들이 주인을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들거나, 심지어 자신들이 주인을 움직이려든다?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도끼가 자신을 들고서 나무를 찍는 자에게 자랑하며, 톱이 자신을 들고 켜는 자에게 어떻게 큰 체 할 수 있으며, 막대기나 몽둥이가 자기를 들고 있는 사람을 좌우할 수 있겠습니까? 예,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있다면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실제로는 있을 수 없으며, 있다손 치더라도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있을 수 없는 일을 현재 앗수르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고 자신의 능력과 실력과 지혜로 된 줄 아는 것’, 바로 이것이 앗수르의 죄였지 않습니까? 이런 죄를 여러분도 쉽게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도구란 거저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면 됩니다. 그런데 도구들이 항의를 하고 자기 기능과 역할을 거스리려고 합니다. 

‘나를 왜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는가?’ ‘나를 더 훌륭하게 사용하지 않고 왜 요 정도로만 사용하는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자기 힘을 발휘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도구는 거저 존재하는 것에 감사하고, 주인이 자신을 사용해 준 것에 감사하고, 자신으로 인하여 주인이 그 뜻을 이루고 기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구가 설쳐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쓰신 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도구인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다른 사람을 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주인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 여러분에게 남다른 기술이나 은사나 재물이나 혹 다른 그 무엇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용된 후에는 사용해 주신 것에 감사하면 됩니다. 앗수르는 바로 이러한 중심과 태도가 없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 16절부터 19절은 앗수르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16절,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그의 영화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앗수르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두 가지였습니다. 

❶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심판은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질병으로 인하여 쇠약하게, 즉 병약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열왕기하 19장 35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애굽에서 장자를 쳤던 천사이자(출12장), 다윗의 인구 조사 때 이스라엘에 온역을 내렸던 바로 그 천사(삼하24:15,16)라고 봅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 많은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강력한 전염병이 돌게 하셨거나, 갑작스런 광야의 돌풍이 불게 하셨거나, 혹은 구스 왕 디르하가(9절)의 기습 등을 이용한 것으로 보는데, 그 중에서 가장 타당한 것이 천사가 일으킨 극심한 전염병이라는 것입니다. 즉 앗수르 군이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이 죽은 것은 전염병 때문이라는 것이죠. 

❷ 앗수르에 대한 심판의 두 번째 모습은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불살라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영화”는 그동안 승승장구해 온 앗수르의 영화, 그들이 탈취한 전리품, 넒은 영토와 정복한 많은 민족과 나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표현에 의하면, 그렇게 쌓아온 것들이 장작더미와 같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쌓아온 것들이 곧 자신들의 전부를 불태울 장작더미와 같았습니다. 머지 않아 하나님은 마치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그 아래에 불을 붙이듯이, 앗수르의 영화를 장작더미로 하여 그 밑에 불을 질러 앗수르의 모든 것을 깨끗하게 태워버리실 것입니다. 

이 예언 역시 열왕기하 19장 이하에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유다를 공격한 앗수르는 하룻밤 사이에 모든 군사를 다 잃었습니다. 산헤립 왕만 겨우 살아남아서 간신히 니느웨로 도망을 갔습니다. 니느웨로 돌아간 산헤립은 자신의 신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神殿으로 갔는데, 거기서 자신의 두 아들인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 칼로 죽임을 당합니다(왕하 19:37). 그 뿐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불꽃에 의해 소멸될 대상은 더 있었습니다(18,19). 

앗수르인들의 하류 계층을 가리키는 “가시와 질려”, 상류층을 가리키는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까지 모두 소멸될 것입니다. 앗수르인이 받은 심판은 총체적인 파멸이었습니다. 그렇게 심판받은 결과, 마치 거대한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몇 그루의 나무만 겨우 남아있는 것처럼 앗수르는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불에 타고 남은 나무의 수가 얼마나 적었든지 숫자를 제대로 셀 수 없는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19). 

사랑하는 여러분, 앗수르의 죄가 무엇입니까? 자신을 모르고, 제 분수를 넘어선 것이고, 감히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한 것입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임금이 타는 나귀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임금이 이 나귀를 타고 나라를 한 바퀴 순찰하면 온 국민들이 나와서 왕에게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임금을 모시는 나귀는 왕이 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온갖 아름다운 장식을 해서 아주 멋지게 보였습니다. 국민들이 왕에게 갈채와 찬사를 보내자, 나귀는 그 갈채와 찬사가 자신을 향하는 것이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이러한 갈채와 환호에 고무된 나귀는 어느 날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국민들의 갈채와 환호를 혼자서 다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나귀는 왕이 없으면 그 모든 환호와 갈채를 자신이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귀가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치는 순간, 나귀는 자신의 전부, 자신의 생명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 아래 거할 때 존귀와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면 그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앗수르 사람들이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의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자기 백성 이스라엘일지라도 교만하면 징계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들보다 더 교만한 앗수르 역시 징계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교만한 사람이 피할 길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죠.

3. 겸손하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옛날, 어떤 남자가 스승에게 찾아와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자기는 부인이 둘 있는데, 한 명은 아름답고 다른 한 명은 못생겼는데, 문제는 자신이 아름다운 부인은 싫어하고 못생긴 부인을 좋아하는데, 그러한 자기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들은 스승이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을 자랑할 때 추함이 생겨난다. 너의 아름다운 아내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의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추해졌다. 반면에 너의 못생긴 아내는 아름답다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겸손할 것이다. 바로 그 겸손이 그녀를 아름답게 만들었고, 그 아름다움이 너로 하여금 그녀를 더 사랑하게 만든 것이다.” 

여러분, 이 우화가 여러분에게 통찰력을 주지 않습니까? 스스로 아름답다고 의식하는 것은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자신이 잘 났다고, 자신이 지혜롭다고, 자신이 능력 있다고 여기는 교만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교만은 추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자기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부자가 그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얻고자 그를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부자의 집은 정말 으리으리했습니다. 정원은 온갖 琪花瑤草로 가득했고, 집안은 각종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집을 자랑하느라 디오게네스에게는 단 1분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별안간 디오게네스가 그 부자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렸습니다. 얼떨떨해 있는 부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집은 너무 아름다워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 가래침을 뱉을 만한 곳이 없더군요. 당신의 집에서 가장 더러운 곳은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찬 당신의 얼굴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겸손하십시오. 여러분의 얼굴이, 여러분의 지위가, 여러분의 삶이 교만으로 인하여 가장 추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뭐라고 말합니까? 15절,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여러분은 연장을 들고 사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거저 주인의 손에 들린 도끼이고, 나무를 켜는 자의 손에 들린 톱과도 같고, 목자의 손에 들린 막대기와 같고, 또 몽둥이와 같은 존재일 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본분, 자신의 위치, 자신의 기능과 역할을 바로는 아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어떠함을 바로 알아,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인생이라는 것 앞에서, 세월이라는 것 앞에서 겸손한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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