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치료하시는 여호와 (출 15:22~26)

  • 잡초 잡초
  • 226
  • 0

첨부 1


치료하시는 여호와 (출 15:22~26)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질병을 대략적으로 3만6천 가지 이상으로 봅니다. 사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누구나가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질병을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질병의 위험에 노출 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벼운 질병에 걸렸다가 자연치유 되는 경우도 있고, 중한 병에 걸렸음에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여간 어떤 상황으로든지 질병과 가까이 있고 혹은 질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하고 싶은 것이 또한 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무서운 병은 어떤 병인 줄 아십니까? 자각증상이 없는 병입니다. 분명히 병은 걸렸는데 아픈 줄은 모릅니다. 어떡합니까? 자각증상이 없는 이 병이 무서운 겁니다. 그것이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자각증상이 없는 병이 문제요, 이건 난치병입니다. 

또 한 가지는 아픈 것은 있는데 원인을 모르는 병이 무서운 것입니다. 날마다 통증을 느끼겠어요. 그런데 병원에 가도 그 원인을 밝혀 낼 수가 없을 때 이게 답답한 병입니다. 요즘 병원에 가면 하는 기본 검사가 있지 않습니까? 피 뽑고, 사진 찍고, 조직 검사한다고 살점 뜯어내고 합니다만 그래도 그 원인을 찾기가 어려운 병이 있단 말입니다. 자, 아픈 것은 있는데 원인은 모릅니다. 

요즘처럼 환경오염이 심각하다던가, 생태변화가 심각한 현실에서 이름도 모르고, 원인도 모를 질병들이 자꾸 생겨난다고 합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만 전 세계적으로 놀랍게 퍼지고 있는 <신종플루>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수족구>같은 사라졌던 병들이 다시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원인 모르는 죽을병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불안감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병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러 가지 정신적인 스트레스나 환경적응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전문상담가인[아돌프 퀘자다]라고 하는 사람이 현대인은 하나같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혼돈과 불평과 후회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게 현대인의 병입니다.

먼저는 자신의 존재자체에 대한 혼돈과 불평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선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불평이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을까? 왜 난 이렇게 클까? 나만 이렇게 못생겼나? 거울을 볼 때마다 불평합니다. 그런데 이건 못 고치는 병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 보니까<선풍기 아줌마>라는 별명을 가진 유명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원래 얼굴이 상당히 미인이었는데도 자기 존재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성형수술을 하다가 영원히 자기 얼굴을 잃어 버렸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가하면 자기 성격에 대해서도 불평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인데도 마음에 안들 때가 있잖아요. 내가 생각해도 참 못돼먹었다 싶을 때가 있다 말입니다. 또 그런가하면 자기의 능력에 대해서 항상 불만족합니다. 나는 이것도 못났고 저것도 못났고 이것 밖에 안 된다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평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건 잘 고쳐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무덤에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 습관 인격이 있더라고요. 이거야말로 못 고치는 병이지 뭐겠습니까? 

또 하나 내 존재 위치에 대한 불평이 있습니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말 아시지요? 자기 소속, 자기 거처에 대해서 불만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게 어리석은 것인데 몰라요. 가족에 대해서 불평하고 부모에 대해서 불평하고 내가 낳은 자식에 대해서도 내가 불평 해봤자 이거야 말로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교회를 실컷 욕하고 교회에 대해서 불평을 죽 늘어놓고 난 다음에 정신차려보세요. 

내가 속해 있는 교회인데 도대체 무엇을 한 겁니까? 제가 가끔씩 제 아들에게 뭐라고 나무랄 때가 있습니다. 녀석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한 일이 있을 때“너 왜 그러냐? 정신 좀 차리지 않고!”그러면 아들 녀석은 씩 웃으면서 하는 대답이 항상 간단합니다.“아빠 아들 이예요.”더는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게 무슨 얘깁니까? 내 자식에 대해서 내가 불평하고 있는 무서운 병입니다. 

또 한 가지는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서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은 누구나 자기의 일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지나고 나면 항상 부족한 것만 생각나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불평합니다.‘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더 열심히 할걸....’이런 생각에 매여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론 적절한 자기반성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소망 적으로 볼 줄 모르고 항상 절망적으로 평가만하고 있으니 이게 문제입니다. 그럴 때에 늘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살아갑니다. 이건 아니거든요.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소망의 발판이 되어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실패한 과거에 매여서 후회만 하고 있으면 발전이 없는 법입니다. 

자, 이에 [아돌프 퀘자다]박사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구제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느냐를 말합니다. 그 원리가 무엇이냐 첫째 과거와 화해하라고 했습니다. 재밌는 말입니다. 나 자신이 나의 과거와 화해를 해야 한답니다. 지난날에 대해서 너무 아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공한사람들에게 “자기 과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그 과거를 미화한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그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 내가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는 겁니다. 소위 성공했고 그래서 유명한 사람이나 건강한 정신의 사람은 자신의 과거가 어떠했던지 간에 그에 대한 평가가“그날의 내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렇게 고백하고 나니 그 과거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 되었습니까? 그러니까 과거 때문에 현재가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과거의 일을 가지고 현실에 어려운 이유로 적용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과거와 화해하라는 겁니다. 과거가 아름다운 미래로 인도하는 원동력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화해입니다. 두 번째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버리고 실제에 대해서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내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환상 속에서 헤매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행복을 찾겠다고 허황된 꿈을 좇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 행복한 나를 내가 스스로 인정할 수 있고서야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거든요. 얼른 눈을 뜨고 현실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그 현실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중요한데 [아돌프 퀘자다] 박사는 지금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고 내 자신의 존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 형편, 내 처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확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사는 형편이 인간적으로야 어떻든지 간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다.”라고 할 때만이 혼돈과 불평과 후회 속에서 그 사람이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증,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긍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이것이 구제의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벗어나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습니다. 물리적으로 정치적으로 볼 때는 완전 자유인입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는 아직도 애굽 사람입니다. 몸은 애굽에서 떠나서 애굽과 인연을 끊었습니다만 그 정신은 아직도 애굽의 노예입니다. 생각이나 문화적으로는 아직도 이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그 지긋지긋하던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도망쳐 나온 지 며칠이나 되었습니까? 홍해를 건너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난리를 치면서 춤을 추고 그러던 사람들이 지금 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왜 이러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노예근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라고 하는 역사가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애굽에 노예로 있을 때 무슨 좋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매일 하는 일이 불평하는 일이었습니다. 짜증나는 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병든 체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도 당연합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간순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아주 병적으로 원망했습니다. 말하자면 과거만 생각하면 저절로 원망이 나오고 짜증이 나는 아주 무서운 병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치유하시려고 할 만큼 중병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왜 이스라엘의 이러한 병적증세가 생겼을까요? 문제는 과거의 은혜로 현재를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은혜로 현재를 해석하라는 이 말을 우리도 생각해야합니다. 

지금 당장의 어려움을 바라보노라면 낙심뿐입니다. 감사할 일이 없습니다. 원망밖에 더 쏟아 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내가 누구였습니까? 무엇이었습니까? 그나마 지금 가진 것의 십분의 일도 누리지 못했던 나였지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셔서 나름의 보람도 얻고 행복도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거가 있고서야 바로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과거가 오늘이 있게 된 은혜인 것이지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애굽의 그 노예의 현장에서 불러내어 주시고 자유를 허락하신 그 은혜로 현재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현재의 원망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과거의 은혜로 현재를 해석할 수 있었어야만 옳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현재의 원망에만 집착하고 있는 이것이 이스라엘의 중병이자 오늘 우리들의 병이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큰 능력의 체험으로 왜 오늘을 바로 해석할 수 없더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미련함입니다. 과거에 받은 그 엄청난 은혜로 오늘을 해석하면 언제나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못하고 오늘의 조그마한 고통 때문에 과거의 은혜를 다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치유하시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치유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치유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26절을 봅니다.“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자, 이 말씀에 이스라엘이나 오늘 우리가 치유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들음으로 치유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말씀으로 지킴으로 치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순종이지요.

먼저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루스드라에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사도바울]이 설교하는 도중에 맨 앞에 앉아서 열심히 듣습니다. 사도바울이 보면서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일어나라고 하니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벌떡 일어납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는다는 자체가 때로는 기적입니다. 치유입니다. 다음은 순종입니다. 들으면서 순종합니다.“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씀을 듣고 아멘하고 그대로 믿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가서 말씀대로 살아라!”하니까“예”하고 갑니다. 이게 성경입니다. 이게 치료의 역사입니다.

미국에 있는 전문 의사 1044명을 상대로 조사를 해봤더니 네 명중 세 명은 하나님을 믿더랍니다. 그뿐 아니라 59%는 내세를 믿습니다. 의사는 이론과학의 원리를 믿고 치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그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나는 육체를 상대로 하고 있고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이걸 믿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여러분, 3만 6천여가지의 육체의 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인 병이 치료될 때 육체는 자동적으로 치료가 되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적인 병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려움에도 좋은 점을 생각하고 나쁜 사람에게서도 장점을 볼 줄 알고 어려운 형편에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것으로 바꿔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잃지 않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또한 마주치는 모든 상황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은혜로 해석하며 관용과 사랑을 잃지 않는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시련이란 저주가 아니고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하며 내가 고치지 못한 것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표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고 들었다면 지켜 순종하는 것이 치료의 역사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원망을 일으키고 불평을 일으키는 모든 문제가 말씀 앞에 치료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