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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경청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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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경청 (막 10:46~52)


한 젊은이가 대중 연설과 웅변술을 배우려고 소크라테스를 찾아갔습니다. 그 젊은이는 이 위대한 철학자에게 자신을 소개되는 순간부터 유창하게 계속 이야기를 쏟아내놓았습니다. 그 젊은이가 너무 혼자만 오래 이야기하는 바람에 소크라테스는 지혜의 핵심부는 고사하고 그 가장자리에서 흘러나온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그 젊은이의 손을 입으로 가져가 거침없이 쏟아지던 젊은이의 입을 막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여보게 젊은이! 자네에게는 수업료를 두 배로 받아야 할 것 같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불평을 했습니다. "수업료가 두 배라구요? 대체 왜 그런 거죠?"  "왜냐하면  자네에게는 두 배나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네.  훌륭한 지도자가 되려면 첫째는 혀를 자제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네. 그리고 나서야 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걸세." 

"우리 인간이 말하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2년이면 족하지만, 듣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80년이 걸린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성경은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라고 말씀합니다.  대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을 잘 하는 리더보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리더를 더 좋아합니다.  대한민국의 대표 기업인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씨가 아들 이건희 씨에게 남긴 유언은 '경청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말을 귀기울여 잘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한 심리학자는 오늘 가정문제의 대부분은 배우자들 특히 남편들이 경청만 배워도 해결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남편이 집에 와서 내가 오늘 직장에서 들었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갑절이나 하루에 더 많은 말을 하고 산다(남자는 1만 5천, 여자는 약 3만 단어의 말)고 하더라고 하니까 아내가 "왜 그런지 아세요?"하고 물었답니다. "왜요?"하고 남편이 묻자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남자들은 우리 아내로 하여금 똑같은 소리를 두 번씩 하게 만들잖아요?" 그러자 남편이 뭐라고 했을까요?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하더랍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경청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리고성에서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지나가시는 이가 예수님이시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치는 장면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의 외침을 시끄럽게만 여기고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48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밀했습니다. 그래도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고 더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러 가까이 오게 하여 그의 말을 다 들으셨습니다. 그의 마음에 쌓인 한을 다 풀어주셨습니다. 저는 이 사실이 복음이라고 믿습니다. 상대가 거지라 할지라도 개의치 않으시고, 상대가 맹인이라고 할지라고 귀찮아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다 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쌓인 어떤 이야기라도 주님께서 귀기울여 들어주시지 않을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내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고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기울여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까지 다 놓치지 않고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1. 예수님은 집중하여 들으십니다.(49)
  
49절에 보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청의 자세입니다. 경청은 상대방의 소리를 듣기 위해 머물러서는 것입니다. 경청은 귀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지한 경청은 온 몸으로 듣는 것입니다.  귀와 눈, 그리고 온 마음을 집중하여, 나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상대방에게 집중하여 듣는 것입니다. 

한문으로 '듣는다'는 뜻의 '청'(聽)자를 보면 왼쪽에 귀 '이'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열'십'자와 눈 '목'자 그리고 그 아래에 마음 '심'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 개의 눈 즉 우리의 모든 눈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주목하고 마음을 내어 주는 일이 바로 '듣는 일'인 것입니다. 
  
어느날 어떤 분이 제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반에서 한 자매가 저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귀띰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그럴 일이 없는데.. '하며 내용을 들어보니 제자반에서 나눔 시간에 그 자매가 말을 할 때 제가 잘 듣지 않아 속상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정말 그랬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가까이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과 눈을 맞추고, 그것도 여자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어색해서 시선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앞에 간식을 정성껏 준비해 왔는데 내가 말할 때는 먹을 수 없으니 들으면서 간식을 먹으랴, 또 그 말에 응답할 것을 생각하랴 집중하여 듣지 못하였습니다.  귀로만 들으면 된다는 저의 생각이 잘못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듣는 자세를 고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가 말하면 어색해도 참고 눈을 맞추고 정면으로 쳐다보려고 애씁니다. 내가 귀기울여 잘 듣고 있다는 사인을 보내려고 일부러 고개도 끄덕이고 맞장구도 치려고 노력합니다. 

경청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경청은 집중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길을 가다가 왜 머물러 서셨을까요? 온 힘을 다해 호소하는 맹인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사랑의 첫째 의무는 경청하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도 여전히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말을 귀를 기울여 들으실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해도 예수님은 우리의 말을 잘 들으시려고 멈추어 서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세운 큰 공로가 없어도 개의치 않으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을 하시고 들으십니다.  이제 갖 믿은 사람이라해도, 오늘 처음 나온 사람이라해도 예수님을 부르면 멈추시고 귀기울여 들으십니다.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아 속상하십니까?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억울한 사정을 낱낱이 예수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꾸짖어도,  '시끄럽다. 잠잠하라.'고 말해도  눈치보지 말고 예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다 아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작은 신음소리까지 다 들으시고 즉각 반응하십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주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고민하는 문제에 관여하시고 길을 열어주십니다. 


2. 예수님은 들으시고 마음의 소원에 응답하십니다.(52)
  
사람은 누구나 소원을 갖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누구나 기대 하는 바가 있습니다. 어둠속에 사는 사람도 밝은 내일을 믿고자 합니다. 가난 속에 사는 사람도 풍요한 내일의 삶을 기대하고 삽니다.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도 성공하는 내일을 꿈꿉니다. 병약한 사람도 건강이 회복된 내일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중에는 그런 내일을 말하는 사람들을 좌절시키고 낙심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음의 소원을 늘 격려하며 일깨우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경청은 이런 마음의 소원을 이해하고 격려하여 힘을 북돋아 주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의 거지 맹인 바디매오도 얼마나 눈을 뜨고 싶은 마음의 소원을 갖고 살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너는 어차피 볼 수 없는 운명이니까 포기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절대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치료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 52절에 보면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소원에 응답하여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거지로 살던 바디매오의 운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잠자던 믿음을 일깨워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평생을 어둠속에서 더듬으며 불행하게 살던 바디매오의 눈이 열리고 보게 되자 그는 그 자리에서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청이 바디매오에게 기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십니다. 귀기울여 듣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안타까운 사연에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필요에 응답하십니다. 우리안에 잠자는 믿음을 일깨우시고 우리의 불행한 운명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사랑이 깊이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 우리의 기도를 경청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경청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하기 위해 마음을 열고 기도할 수 있기 바랍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어떤 환경과 세력이 있다 할지라도 힘써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기적을 경험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답답하십니까? 안타까우십니까?  본문의 앞 못 보던 맹인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를 불러 보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쳐 보십시오. 그분의 머물러 서심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분이 귀기울여 온 몸으로 들으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아시고 일하십니다. 그분이 경청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분이 구원해 주십니다. 그분의 이름이 구원자 예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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