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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엡 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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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엡 2:11~22)

 
어느 실버 타운, 즉 노인 요양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요양원은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식사와 의료 서비스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주변 경관도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요양원을 운영하는 회사에서 요양원에 있는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행복 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조사 결과를 보고 담당자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행복 지수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설과 서비스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던 회사로서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유명한 심리 분석 전문가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그 전문가가 요양원에 갔습니다. 그는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을 직접 대면해서 상황을 분석하기 전에 먼저 분위기 파악부터 하겠다고 했습니다. 한 이십 분쯤 후에 그는 담당자에게 문제의 원인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금새 원인을 찾았습니까? 좀 더 깊이 있는 조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전문가가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노인들의 행복 지수가 그렇게 낮은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문가가 조심스럽게 관찰한 것은 노인들의 시선이었습니다. 노인들 대부분이 창밖으로 보이는 요양원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경치가 노인들의 시선을 붙잡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인들은 찾아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양원에는 자녀들이나 가족들이 거의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지 간에 관계가 끊어지면 인간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절망이 무엇입니까?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나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 절망입니다. 좀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때문에 사람들은 앞이 캄캄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에베소 교회가 중병을 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평안이 점점 사라졌던 것 같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로 교회가 하나되는 일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주소가 바로 에베소 교회의 모습과 같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주는 교훈을 통해서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그 때에"라는 말로 그들의 과거를 기억할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1~12)

그들은 구원의 약속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아무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째서 그들의 과거를 낱낱이 밝히고 있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아무 소망도 없는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그 어떤 공로나 자격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은혜가 더욱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나 놀라운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던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죄로 물든 삶을 살았으면 그런 상태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한층 더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재의 삶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과거에 베풀어 주신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을 기억하고 다시 한 번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희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된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흘리신 그 피로 멀리 있던 그들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과연 누구와 가까워졌다는 말입니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방인인 그들이 유대인들,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가까워졌습니다.
당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감정의 골은 매우 깊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만드신 까닭은 지옥 불에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이방인들도 유대인을 곱게 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유대인은 결코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은 사회적으로 변두리 인생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세계의 주류는 오히려 헬라인이었습니다. 그 헬라인들도 유대인을 심하게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모두 다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했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갈등이 해소되고 평화가 이루어져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면 그 복음은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집단 간의 갈등입니다.
나라나 민족 사이에 오랜 갈등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전쟁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갈등 구조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오늘 우리는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갈등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가 풀어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평화 없는 이 세상에 참 평화를 주시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몸이 교회가 아닙니까? 때문에 교회가 평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교회의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보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엡 2:20~21)
교회는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건물과도 같습니다. 그 위에서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전이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되어 가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 교회 안에 반목과 대립, 갈등이 있을 것 같으면 결코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될 때에 비로소 가능합니다. 작년 여름 캠프파이어 때 교회 식구들이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하나의 원을 만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누구 한 사람, 어느 한 그룹이라도 연결되지 않으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의 모습은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가 평화를 건설하는 일에 있어서 과연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누가 뭐래도 우리는 평화를 건설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혹시 우리 안에 미움과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까? 성령의 지시를 따라서 지금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받은 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 땅에 평화를 건설하는 일에 충성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이 거하실 귀한 처소로 세워져가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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