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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빌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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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빌 1:21)


사도 바울의 투옥으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인들은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립보 교회를 통한 복음 사역이 어렵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교인들은 나름대로 복음 사역에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의 진정한 소원은 자기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이 바울의 삶의 의의이자 자신의 존재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의 이러한 뚜렷한 목적관이 그를 
①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게 했습니다. 
②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게 했습니다. 
③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했습니다. 

여기 '온전히 담대했다'는 말은 '모든 확신에서의 거리낌이 없는 언론의 자유'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8장 31절에 『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삶의 목적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존귀히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자신의 삶의 존재가치를 두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말은 

Ⅰ. 나의 삶의 존재 목적이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본문 1장 20절에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 간절한 기대 』(아포카라도키아, )는 ' '(아포, 빼내다)와 ' '(카라, 목을) 그리고 ' '(도키아, 바라봄)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은 학수고대(鶴首苦待)한다는 말입니다. 한 목적만을 대망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로마서 8장 19절에 『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 존귀히 』라는 말, 메갈륀데세타이( )는 '위대한'을 뜻하는 메가스( )에서 나온 말로 '위대하게 만들다'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9장 17절에 『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은 그의 몸 된 교회와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웨스터민스터 대요리 문답 제 1문에 "사람이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말은

Ⅱ. 나의 삶의 존재 의의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본문 1장 21절에 『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말합니다. 여기 『 이는 』이라는 이유 접속사 갈( )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게( )라는 대명사는 힘 있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존재 의의가 너무나 뚜렷합니다. 

이 속에는 그리스도는 자기의 생의 근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바울이 자기의 옛날 바리새교인의 생활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닙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의 새로운 경험을 한 시간부터 계산하여 생의 기원을 잡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는 과연 『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 』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모든 생활은 곧 예수로 말미암은 삶입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인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가말리엘의 밑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학자였습니다. 사회 문벌도 바리새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대하여, 사람을 대하여, 항상 무흠한 사람으로 지냈습니다. 
법률의 의(義)로는 흠이 없는 그였으나 오히려 자기에게 있는 문벌과 지위와 명예를 배설물 같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달게 받았습니다. 
일찍이 그는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에 『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자신의 고백은 굽힐 수 없는 자신의 신앙철학이었습니다. 그가 이 글을 쓸 때의 형편으로 보면 극히 참담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자기 형편으로는 하루 빨리 세상을 떠나 주 예수와 연합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의 유익을 생각하여 조금 더 사는 것이 낫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에게는 생과 사에 대하여 전혀 유감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에게는 죽어도 그리스도요, 살아도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같은 평화시대에는 이러한 생각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말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울은 『 주여, 누구시오니이까? 』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바울이 『 주여 』라고 한 말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이단의 괴수로 여기고 적대시 하던 예수를 가리켜 '주여'라고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하오리까? 』라고 했으니 바울은 엄청난 변화의 과정을 통과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변화를 일으키는 종교입니다. 바울은 그 길로 다메섹 성에 들어가 예수의 도당을 잡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유대인들과 변론을 일으켜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22-24절에서 『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고 한 그의 고백을 감안할 때 그가 다메섹 경험 후로 얼마나 변한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모건(Morgan George Campbell 1863-1945)은 "내가 후일 바울을 만날 때 먼저 물어볼 말은 '그대가 가지고 오던 제사장의 공문은 어떻게 하였는가?' 알아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질문을 받는 그는 한편으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할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진실로 감사의 눈물을 금치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3장 4절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 신자의 생명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은 그 이상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자기의 생명뿐 아니라 자기의 생명이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고 한 말에 그 뜻이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와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의 보는 것이 자기가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보는 것입니다. 그의 듣는 것이 자기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듣는 것입니다. 

그의 말하는 것이 자기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하는 것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죽고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서 사신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신비주의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주장하는 바와 같이 바울의 옛사람은 완전히 죽어 버리고 전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비의 종교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 『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는 말과 13-14절에 『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7장 15절에 『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고 했습니다. 19절에는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24절에는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라고 했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그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후의 서신인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고 하였습니다.

한번 중생하면 다시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잘못된 해석인 동시에 위대한 사상입니다. 의인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에 『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6-27절에 『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에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했습니다. 

요한 1서 3장 9절에 『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요한 1서 5장 18절에는 『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지 아니하나니 』등의 구절은 그 구절의 '짓는다'로 번역한 포이에이( )와 '범죄'로 번역한 하말타네이( )가 다 현재 동사인 만큼 계속적 범죄행동을 말한 것입니다. 
인생이 이 세상에 있어서 절대적 성결은 없는 것입니다. 요한 1서 1장 9절에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라고 했습니다. 신자에게 범죄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음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말은 

Ⅲ. 나의 삶의 가치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본문 1장 21절에 『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자체가 그의 삶의 전부요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것이 그의 삶의 가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삶의 시작이요 과정이요 마침이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장 17-18절에 『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고 했습니다. 

그는 전도자로서 자신의 책임영역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 했습니다. 

① 바울의 생의 시작의 가치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바울의 삶의 신기원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Christ)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자신의 생은 시작되었습니다.

② 바울의 생의 진행의 가치가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Christ) 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9-10절에 『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③ 바울의 생의 마지막 가치도 그리스도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7-9절에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개인과 인류의 종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시야에 보이는 것과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모든 피조세계의 종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 역사의 시작이요 과정이요 마침입니다. 

④ 바울의 삶의 보상의 가치도 그리스도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우리들의 실패는 자기를 중심으로 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성공의 비결은 그리스도를 中心으로 해야 한다는 쉬운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곧 교회 중심의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께 빚진 자들입니다. 로마서 1장 14절에 『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에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고 했습니다. 

빚을 지고 우리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 빚을 갚는 길은 오직 우리 주께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은 첫째 주님께서 허락하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5절에 『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둘째는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성찬입니다. 성찬의 내용이 바로 『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요한복음 6장 56-58절에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고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자, 즉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고 육이 산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영이 살아서 영생에 이르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병행해서 이 땅에서 육의 삶도 형통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이 죽으면 안 됩니다. 나를 인하여 산다고 했는데 죽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했기 때문입니다. 즉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변명하거나 숨길 수 없는 진리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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