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 (계 2:12~17)

  • 잡초 잡초
  • 556
  • 0

첨부 1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 (계 2:12~17)


저 유명한 '워털루 전투'에서 천하호령의 재기를 꿈꾸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웰링턴의 영국군은 서로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처절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영국군의 한 장교가 지금 자기 부대가 맡아 싸우고 있는 진지를 더 이상 지켜낼 수 없다고 웰링턴 사령관에게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그러자 웰링턴 장군은 곧 그 장교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기를 "모든 영국군은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끝까지 사수해 내든지 아니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할 것이다."라고 추상같이 독전(督戰)했습니다. 
결국 그 전쟁은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고, 웰링턴 장군이 그때 그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서도 지극히 침착하고 유려한 필체로 써 보내었던 그 편지는 지금도 경매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이 당신의 부하 장교들과 병사들을 독전하시는 대장으로서의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과 그 주님께서 17절에서 버가모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이기는 그에게는"이라고 격려하시는 것은, 그 당시 영적 전투 상황에 이미 돌입해 있던 버가모교회로 하여금 더 잘 싸우도록 밀어붙이시고 독전하시는 대장으로서의 예수님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이 지상교회가 '전투하는 교회'이며 우리 각 기독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사실과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교회와 성도를 향하여 '반드시 이기라'고 독전하시는 말씀이 과연 무엇입니까? 

1. 주님께서는 교회가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하여 우상 종교와 대적하는 싸움에서 꼭 이겨야 한다고 독전하십니다. 

버가모교회 교인들은 이 전투를 잘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3절에서 "13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버가모교회 교인들의 삶의 현장이었던 버가모 시는 문자 그대로 "사단의 위" 즉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 할 만큼 당시 우상 세력이 가장 활개를 치던 도시였습니다. 
버가모 시에는 당시 소위 '의약의 신'이라 일컬어졌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있어서, 세계 각처에서 신유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한 제우스와 디오니소스, 아테네 같은 유명한 희랍 신들의 신전들도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버가모 시의 뒤편에는 원추형 즉 고깔모자 모양의 작은 산이 있었는데, 그 곳은 당시 온갖 나라의 별별 신들의 각종 신전들이 죄다 집결해 있던 장소였습니다. 
즉 그들에게 알려진 세계의 잡신들을 다 모아서 아예 한 곳에 단체로 모시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희랍신과 이방신들 뿐 아니라, 소위 '로마황제 숭배'에 있어서도 이 버가모 시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황제 숭배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는, 그들이 주전 30년경에 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운 후에 그것도 모자라서 계속해서 제2, 제3의 황제 숭배 신전을 건축했던 사실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온갖 우상과 잡신들부터 시작하여 인간인 황제에 이르기까지, 하여튼 사람이 섬기고 제사지낼 수 있는 대상들은 몽땅 다 모아 놓고 신전들을 지어대었던 바람에, 그 당시 버가모 시의 별명이 'Temple-Sweeper' 즉 '신전 싹쓸이꾼'이 될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 버가모 시가 바로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던 생활의 현주소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형편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잘 안다. 너희들이 사는 버가모 시는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사탄의 세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는 곳이며, 기독신자들과 교회의 힘이란 전혀 비교의 대상조차 되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탄의 세력이 강력한 곳에 너희들이 살고 있는 줄을 내가 잘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압도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전장에서도, 버가모교회의 교인들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잘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3절 하반절에서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신전들이 더 화려해 보이고 아무리 로마황제의 이름이 훨씬 더 유력해 보였다 할지라도, 버가모교회 교인들은 결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상과 로마황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위에는 도무지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버가모교회의 그런 승리 행진은 그들 중에 순교자가 생겼을 때에도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안디바"라는 순교자는 불에 달군 놋쇠 황소에 지져져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아시아 지방의 첫 순교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충성된 증인"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죽기까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증거한 증인'을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 사용된 '증인'이라는 헬라어 단어 '말투스(martus)'가 나중에는 아예 '순교자(martyr)'라는 뜻의 말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던 한 교우가 박해를 받고 죽임까지 당하게 되었을 때, 버가모교회의 다른 성도들은 그 때문에 실망하거나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더욱 용감하게 그들의 영적 전투를 계속 이겨나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바로 13절 중간에서 예수님께서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라고 인정해 주시는 대로 그들의 심령과 인격 속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대적 전력은 적군이 압도적으로 강력해 보이고 그 버가모교회 성도들의 손에는 변변한 무기 하나 없는 것처럼만 보였지만,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만 똑바로 붙들고서 바로 그 무기 하나만 가지고도 그처럼 '넉넉히 이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영어에서 이런 경우를 가리켜 부르는 말이 바로 'champion'입니다. 
우리는 '챔피언' 하면 보통 '선수권자'라는 뜻으로만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 '챔피언'이란 말의 원래 의미는 '옹호자', 즉 '누구를 편들어서 그를 위해 나서서 싸우는 사람'이란 뜻인 것입니다. 
옛날 중세의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어떤 왕비가 모함을 받습니다. 
그 진상이 판가름 날 수 없으면 재판장인 왕은 결투 시합을 선언합니다. 
  
그러면 그 왕비를 처음 고소했던 기사와 그 왕비의 편을 들어 대신 싸워 주겠다고 자청하는 기사, 이 둘이서 창칼을 들고 결투를 벌인 후에 그 승패에 따라서 왕비의 결백과 유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그 왕비를 옹호하여 그녀의 결백에 대한 명예를 걸고 자기가 대신 나가서 그 왕비를 고소한 기사를 대항하여 목숨을 다해 싸워 주는 기사를 가리켜 그 왕비의 '챔피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가 바로 그런 '챔피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복음'이 반대를 받고 '예수님의 성육신'이 의심을 당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공로'가 도전을 받을 때에, 누가 그 주님의 편을 들고 그 그리스도의 진리를 옹호하고 그 구세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챔피언'이 되어 싸워야 마땅하겠습니까? 
만약에 교회와 신자조차 그런 싸움에 나서지 않는다면 적어도 이 지상에서는 달리 아무도 '예수님의 챔피언'이 되어 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신앙의 싸움'을 싸우라고 우리에게 독전하고 계십니다. 
귀신 이야기에 사람들의 호기심이 동하고 무슨 용한 점쟁이가 있다는 소문에 사람들의 귀가 솔깃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런 것들은 다 미신이며 마귀의 장난이라고, 적어도 기독신자라면 담대히 말해 주어야 한다고 우리를 독려하십니다. 
  
불교나 천주교나 기독교나 근본적으로는 다 같은 목적을 가진 종교라는 소리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바로 그 교계에서, 적어도 진짜 목사라면 오직 유일하신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만을 더욱 높이며 그런 '각종 잡신'들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독려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앞으로 나타날 적기독 세력, 역사상 보지 못했던 가장 강력한 사단의 세력이 바로 우리 시대에 등장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참된 교회라면 '여자가 낳은 아들'을 통째로 삼키려 하는 그 '용과 짐승의 연합군'을 맞서서 그야말로 자신이 대신 죽을 순교의 각오로 싸워야 한다고 독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신앙의 싸움'을 싸울 줄 모르면 '전투하는 교회'라는 명칭 자체가 무색해질 것 아니겠습니까? 
온갖 우상 종교들이 점점 더 그 연합 세력을 더해가고 이단의 수법이 날이 갈수록 더욱 간교하고 치열해질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앙의 진리'를 지키는 싸움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추상같이 독전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죽도록 충성하여'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님께서는 신자가 '생활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하여 마귀의 유혹과 대적하는 전투에서 필승해야만 한다고 독전하십니다. 

외부의 강력한 대적과의 싸움에서는 잘 대항해 나가고 있던 버가모교회였지만, 바로 이 점에 있어서는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14절부터 16절에서 "14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책망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버가모교회 안에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 즉 옛날에 거짓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 발락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민수기에 나타나 있는 대로, 발람은 발락의 사주를 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다가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방해를 받아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직접 저주하는 대신에 그들을 우상숭배에 참여하도록 유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도록 만들면 될 것이라는 계책을 발락 왕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책은 잘 들어맞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왕 발락의 초청을 받아 모압 백성들의 우상제사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잔치의 기름진 음식과 온갖 음란한 유흥에 홀딱 넘어가 함께 죄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염병으로 2만4천 명이나 죽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와 똑같이 심각한 죄가 바로 버가모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15절에서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라고 엄중히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이 '니골라당'이 구체적으로 어떤 무리였는지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그 당시 초대교회 내부에서 항상 문제가 되고 있던 '우상제물과 음행'의 문제에 대하여 상당히 타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던 무리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명색은 신자이면서도, 이방신의 제사상에 앉아서 불신자들과 같이 그 젯밥을 나누어 먹어도 괜찮고 신자가 음행을 저질렀을 때에도 엄한 권징 없이 적당히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따위의 주장을 가르치고 있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버가모 시에 온통 충만해 있던 불신앙적인 문화생활과 그들의 신앙생활 사이에 적당한 절충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뭐 그리 엄격하게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이러하니 좀 더 지혜롭게 생각해 보자. 기독교인의 신앙생활과 세상의 불신문화 사이에서도 적절한 타협을 이루며 균형을 맞추며 살 수 있는 길이 있지 않겠느냐?'라는 것이 바로 '니골라당'의 논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처럼 한걸음씩 뒤로 물러나려는 교인들을 향하여 16절에서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벽력같이 호통을 치신 것이었습니다. 
  
속칭 니골라당의 그와 같은 타협적인 자세는 대장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당신의 부하들이 당신의 원수인 마귀에게 백기를 들고 나가는 '배신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우리 말 번역에는 "그러므로"라는 말이 앞에 있지만, 원문에는 "회개하라"는 말이 "그러므로"의 앞에 나와 있습니다. 
니골라당의 그와 같이 미적지근한 자세, 아니 사실상 이미 변색된 소위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지금 당장 회개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로지 '내 입의 검' 즉 우리 주님의 저주의 말씀에 따른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추상같은 독전인 것입니다. 

교회와 신자를 향하여 이처럼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하며 유혹해 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단의 대표적인 전술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신자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또한 나름대로 교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항상 신앙과 세속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자주 받기 마련입니다. 
'조상제사도 따지고 보면 미풍양속인데 그렇게까지 범죄시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생각이 불신가족들의 핍박을 받게 되는 초신자들에게는 아주 쉽게 듭니다. 
  
'술 담배 좀 즐겨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 큰 잘못이냐?'라는 유혹이 불신 직장동료들과 회식하게 되는 자리에서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나도 나름대로 신앙고백은 있는 사람인데 가끔 주일성수 좀 하지 않는다고, 내가 그래도 매주일 주일헌금은 꼬박꼬박 드리고 있는데 십일조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큰 죄인이겠느냐?'라는 '자기 합리화'가 교회에 등록을 한 세례교인의 마음속에까지 절묘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그 정도까지는 타협해도 좋아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도 역시 같은 니골라당에 대하여 언급하실 때에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라고 하시면서 이어서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 2:6)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예수님이 미워하는 것이면 두말할 필요 없이 죄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내 생각에는 그 정도는 타협해도 괜찮다고 보여도 예수님께서 미워하실 일이 분명하면, 그것은 당장 회개해야 할 죄일 뿐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논리로, 예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을 내 마음대로 '적절한 선까지 양보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런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는 내가 절대로 가만 두지 않겠다.'고 무섭게 경고하시는데, 저와 여러분이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적당한 타협'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겠습니까? 

언젠가 원로목사님께서 "미국 교회는 신학이 먼저 자유주의로 흘러가고 그것을 따라서 생활이 타락하게 되었지만, 한국 교회는 신학보다는 생활이 먼저 타락하는 역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압도적으로 보이는 골리앗 같은 우상 세력의 정공법으로 안 되면 이처럼 교인들의 생활 속에 유혹의 미끼를 곳곳에 뿌려놓는 편법을 사용해서라도 그 '삼킬 자'를 찾는 것이 사단의 변함없는 생리입니다. 
그 어느 쪽이든지 간에 성공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이 두 번째 전투에서도 마찬가지로 끝까지 이겨야만 한다고 독전하고 계십니다. 
즉 '신앙이 정통이라면 생활도 순결해야 한다.'라는 이 '신행일치'를 지키는 싸움이 저와 여러분이 매일 수행해야 하는 '영적 각개전투'인 것입니다. 
  
교회와 신자는 이 '타협주의 유혹과의 싸움'에서도 끝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생활의 순결을 지켜내야만 진정한 최후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강력히 독전하고 계시는 우리 대장 예수님의 음성을 각자의 엿새 동안의 생활 중에도 항상 들을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교회와 신자를 독전하시면서, 그 싸움에서 최후까지 이기는 자에게 주어질 놀라운 상급을 또한 약속해 주고 계십니다. 
바로 17절 말씀에 "1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바로 '생명의 떡' 곧 영생을 의미합니다. 
또한 "흰 돌"과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은 바로 신자가 천국에서 누릴 '예수님과의 1대1 관계'를 가리킵니다. 
  
이 땅의 교회 속에서는 이 많은 교인들 가운데 섞여 여러분께서 섬기시는 작은 충성들이 어디로 가는지 표도 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끝까지 이기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다 '새 이름'이 주어지고 바로 그 이름을 기억하며 우리와 친밀하게 교제하시는 예수님을 모시면서 천국에서 영생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급은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기는 그" - 오직 대장의 명령대로 순종한, 죽도록 충성한, 끝까지 싸우고 끝내 승리를 거둔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들과 현대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과연 '끝까지 이기는 자'가 얼마나 남게 될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이기려 하기는커녕 아예 이 '영적 싸움' 자체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투부대'가 아니라 그저 '사교단체'로, 아주 잘해야 기껏 '사회사업단체' 정도로 몰락해 가고 있습니다. 
타 종교, 천주교, 자유주의 기독교에도 '따뜻한 손과 넓은 가슴'을 펴 내미는 것이 교회의 본연의 모습이라는 사고방식이 특히 소위 '대형교회의 유명한 목사'들을 통하여 이 나라의 기독교계에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라고 지목하시는데도 목사는 '형제'니 '큰집'이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 진리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도 바쳐야 할 '증인'이 되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적과의 동침'을 버젓이 자행하고 있는,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목사부터가 이러니 교인들 역시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명칭에는 아예 학을 뗍니다. 
오늘날의 이 현대교인들이 얼마나 '점잖고 고상한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싸워야 할' 전투에서 피를 흘리기는커녕 이마에 땀방울 하나 흘리지도 않고 기독교인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천상 보좌 우편에서조차 손에 칼을 쥐시고 '싸우라'고 독전하고 계시는데도 그 주님을 따른다는 교인들은 오히려 마귀와 '타협하는' 것이 상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군사'가 되어야 할 기독신자들이 '일군'도 될 수 없는 '약골'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예수님의 격려를 받고 사기충천하여 불신 세상에 나가서 싸우기는커녕 연휴 주말에는 주일예배를 빼먹는 것도 아주 당연한 듯이 여기는, 기가 막힐 '허약 체질 신자'들만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6절 하반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배신자, 패배자들에게 하시는 정말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누구입니까? 
  
이것은 교회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원수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다시 말해서 사단과의 싸움에서 타협하고 양보하고 후퇴하는 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전시(戰時)의 사령관에게는 '즉결처단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명령에 불복한다든지 전선에서 이탈하여 도망치는 군인은 아무리 같은 편이라 할지라도 사령관이 직접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 총으로 쏘아 죽일 수 있는 권한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가 바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천주교의 세력이 겁나고 교단분열주의자라는 욕을 듣기가 겁나고 인터넷의 안티들이 두려워서 바른 소리를 외치지 못하고 꽁무니를 빼는 목사는, 그가 그처럼 교회의 원수, 진리의 대적으로부터 돌아서는 그 순간 '좌우에 날선 검'을 쥐고 바로 그의 뒤에서 그를 노려보고 계실 대장 예수님과 대면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의 대학입시가 걱정이 되고 시어머니의 핍박이 무섭고 불신 사장의 눈이 더 두려워서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교인은, 결국 예수님께서 손에 쥐고 계시는 '좌우에 날선 검'의 날 끝에 자기 등이 닿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사의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역시 교회와 성도들은 이 세상 '어둠의 권세자'와 치열한 혈투를 치러야 할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불신자와 우상 숭배자와 이단 기독교가 다 하나로 '통합'되어서 참된 기독교를 향하여 노도와 같이 덤벼올 것이며, 교회 내부에서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자 하는 유혹의 소리가 점점 더 '다수'를 차지하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 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날까지 서리라" - '다수'의 교회들이 비겁하게 물러설 때에 끝까지 이 신앙의 전투대열에 끝까지 남아 싸울 교회가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악이 비록 성할지나 진리 더욱 강하다 순교자의 빛을 따라 주의 뒤를 좇아서" - 온갖 마귀의 세력들이 '통합'되어 더욱 기승을 부릴 때에도 우리의 선배 순교자들의 뒤를 이을 미래의 '예수 이름의 챔피언'은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적어도 경향교회와 경향의 성도들은 바로 그런 '소수의 증인' '바른 신앙과 순결한 생활의 사수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절대로 '배신자'가 되지 말고 신자가 '패배자'가 결코 되지 말라고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께서 우리를 독전하시는 이 말씀을 깨닫고, 이 세상의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신앙의 진리를 파괴하려 하는 우상 세력과 생활의 순결을 오염시키려 하는 마귀의 유혹을 대항하여 끝까지 싸움으로써 오직 승리자에게만 약속된 '감취어진 만나'와 '새 이름 적힌 흰 돌'의 상급에 꼭 함께 참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