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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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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1~6) 

  
일본의 신학자 '우찌모라 간조'는 말하기를 '감사는 은혜 받는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이 감사의 그릇이 클수록 은혜가 크게 임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감사하는 그릇이 많을수록 은혜도 많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또 감사는 '행복의 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에서부터 옵니다. 또 행복은 '감사의 나무에서 피는 아름다운 꽃'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신앙과 불평하는 신앙은 그 차원이 다르고 그 깊이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의 편이십니다. 시50: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다윗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던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경과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결국 후손들이 가장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극찬한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23편은 다윗 왕이 말년에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는 '찬양 시'입니다. 다윗은 원래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15살에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20세에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워 승리하고 군대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풍전등화 위기 앞에 있는 조국을 건저 냈지만 그 공로 때문에 다윗의 인기가 급상승하여 사울 왕의 시기심을 불러 일으켜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엄청난 고생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30세가 되자 기름부음 받은 대로 남 유다의 왕이 되었고, 35세에는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빼앗긴 나라 땅을 되찾아 존경받는 훌륭한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60세가 되었을 때,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자, 왕위를 빼앗기고 그는 또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반역을 제압한 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시고, 새로운 삶, 풍요로운 삶을 허락해 주셔서 70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가 행복하고 범사가 잘 될 때 지은 것이 아니고 캄캄한 어두움이 몰려왔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1. 이 시편을 쓰게 된 배경을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셋째 아들 압살롬은 모든 자식들 중에 인물이 뛰어났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어디를 보아도 흠 하나 없이 잘 생긴 인물이었습니다. 얼굴이 잘 났고 몸의 균형이 잘 잡혔을 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뛰어난 천재랍니다. 무슨 일이든 앞뒤를 따져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시작하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그런 압살롬이 늘 생각하기를 '내가 임금 자격자인데 아버지는 엉뚱하게 솔로몬에게 마음을 주고 있으니 왕의 자리가 내게로 올 것 같지 않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를 뒤엎고 내가 임금이 되는 거야!' 압살롬은 이런 무서운 음모와 계획을 세우고는 전국적으로 청년운동을 핑계삼아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또 아버지의 비밀이라면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다윗 왕의 모사 '아히도벨'을 돈으로 매수하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비밀리에 특공대를 훈련시킵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압살롬이 하루는 아버지 다윗에게 머리를 조아립니다. '아버지! 지난날에 지은 죄도 많고 해서 헤브론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특별 기도를 하고 새 사람 되어 오겠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기특해서 모든 준비를 해 줍니다. 
  
이때 거사의 D-day로 삼은 압살롬은 처음에는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는 척 하다가 돌연 혁명공약을 선포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 압살롬 왕 만세를 부르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질풍같이 쳐들어옵니다. 
  
다윗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구나, 당장에는 그놈을 당할 수가 없지, 그러니 머뭇거리거나 싸우다가는 예루살렘은 쑥밭이 되고 피바다가 될 것이니 아예 왕궁을 내어주고 속히 도망가는 것이 피해를 적게 입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내어주고 궁궐과 왕의 보좌를 내어 주고, 다윗은 신하 몇 사람을 거느리고 억울하고 분하기 그지없지만 망명길을 나서게 됩니다. 앞길이 깜깜하고 땅이 꺼질 것 같아 주저앉아 자살 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처지에까지 다윗의 운명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다윗은 울지 않습니다. 낙심하고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또 불평과 원망도 않습니다. 더 더욱 목숨을 끊은 일은 생각조차 하지 해 보지 않습니다. 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가 있지 않은가? 다윗은 조용히 묵상하면서 이 시편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 본문에서 흐르는 '복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①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앞 22편과 뒤 24편을 이해하면 더 큰 은혜가 됩니다.
  
시22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22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고,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바라보고 쓴 것입니다. 주님은 마27:46절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를 지시면서 절규하셨습니다.
  
그런데 시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22편에서 대속의 십자가 전제되었으므로 여호와의 돌보심의 사랑이 고백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이시기에(롬8:32)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이 성립됩니다.  
  
그리고 24편은 창조주 하나님이 영광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영접을 받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24:7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이것은 23편 마지막 절에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소망과 잘 부합이 됩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23편에서 기록된 '자기 목자를 따르는 양'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22편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그린 어제의 사건이라면 23편은 성도들의 신앙 체험을 다룬 오늘의 사건들이며 24편은 영광의 왕을 맞이하는 부활의 내일을 바라 본 것이라는 점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다룬 구원의 3부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을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한 목자인 것과 또 하나는 선한 목자를 만나 함께 하는 자는 한없는 부요와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요10:10). 다윗은 대단한 영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② 본문의 특징이 있습니다.  
  
⑴ 단순성입니다. 본 시편은 매우 짧습니다. 모두 6절에 불과합니다. 어려운 말들이 없습니다. 당시의 중동 사회에서는 누구나 흔히 목격하는 목양의 이미지를 사용했기에 어린아이라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⑵ 현실성입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있는 안식의 초원이 있고, 두려움과 긴장과 슬픔이 들어찬 어두운 골짜기가 있으며, 넘치는 잔과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승리의 정상이 있습니다. 
  인생을 온통 꽃밭으로 그린 것도 아니고 또는 고난의 가시밭길로 묘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에 대한 사실적인 서술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⑶ 개인성입니다. 본 시편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한 마리의 양이 지나온 자신의 생애를 뒤돌아보며 구원의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본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양 무리가 아닌 한 마리의 양이 자기 목자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읊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관계가 아니고 그분과 나의 관계입니다. '나의 목자'라는 말은 개인적인 표현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일대일입니다. 

 
③본문에서 목자 되신 하나님의 모습이 '동사 세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⑴인도하시는 하나님! 2절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길, 정말 우리가 가야할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⑵함께 하시는 하나님! 4절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은 자기가 정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특히 사울에게 쫓겨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고,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는 혼자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이 신앙이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인도의 무저항 민족운동가인 '간디'는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저 멀리 우주 한 구석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으며, 우리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불 신앙자의 고백도 이런데 우리는 확실한 임마누엘신앙이 정착되어야 합니다. 
  
⑶보호하시는 하나님! 4절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원수가 쳐들어왔을 때,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121:8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네가 누구냐?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중요시하지 않고 '너와 함께 하시는 분이 누구냐?  어떤 능력을 가지신 분이 너와 함께 하느냐?'를 중요시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는 본문 이 한 절만 가지고도 가슴이 설렙니다. 그런데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씀 앞에서 심장이 크게 뛰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3.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보겠습니다. 

①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아야 부족함이 없는 축복을 받습니다(1). 
  
먼저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양이 목자의 소유이듯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은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가 되십니다. 모든 인간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거기에는 바다와 같은 사랑이 있고, 모든 허물을 사해주는 자비가 있으며, 또 양육해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목숨까지 바치는 희생이 있습니다. 이 목자로서의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주님은 요10:11절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고백할 때, 인생의 모든 행복은 안전하게 보장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여러분, 주인은 소유물을 관리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자는 양을 관리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가나안의 푸른 언덕에서 양을 먹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곳에서 양을 쳤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자신의 양인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위로하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⑴목자는 양의 공급자입니다. 목자는 그의 양들을 먹일 물과 풀을 찾아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⑵목자는 양의 보호자입니다. 목자는 야수들과 인간 도둑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언제나 양떼 곁에서 살아야 합니다. 부상당한 양이 있으면 목적지까지 메고 다녀야 하고 병든 양이 생기면 정성껏 간호해야 합니다. 
  
⑶목자는 양의 인도자입니다. 목자들은 지팡이를 들고 아침에는 푸른 초장으로, 햇볕 뜨거운 오후에는 잔잔한 시냇가로 시원한 그늘로 양들을 인도합니다. 그러니까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보면 목자는 양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입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부모가 자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은 '여호와는 내게 헌신된 분'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헌신이 있기에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목자가 아닙니다. 성도의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주님이 나의 목자도 아닙니다. 주님이 '주인'이라 함은 나의 책임자 나를 다스리시는 분으로 최고의 위치에서 내 삶을 결정짓는 최고 결정권자입니다. 

 
▶양은 모든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양의 특징은 무엇인가? 
  
⑴양은 대단한 근시입니다. 멀리를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시냇물을 찾는다든지, 길을 잃었을 때 집을 찾아 올 수가 없습니다.  
  
⑵양은 철저한 무방비 상태의 동물입니다. 동물들은 저마다 적들로부터 자기를 방어할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다 못해 스컹크처럼 방귀를 뀐다든지, 사슴처럼 도망을 잘 친다든지, 아니면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으로 적의 시선을 따돌린다든지, 그래서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방어무기가 없습니다. 뿔이라고 해야 그저 액세서리 정도이고 자기들끼리 싸울 때나 쓸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보호색이 있는 것도 아니도 도망을 잘 치는 것도 아닙니다. 
  
⑶양은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힘이 없으면 지혜라도 있거나 머리라도 좋아야 살아남을 텐데 양은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도 IQ가 낮은 동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머리로 달나라까지 여행을 하는 가장 지혜로운 것 같은데 진정 복 받을 길을 가지 못하고 망할 길만 골라 갑니다. 우리 인간들의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양들처럼 스스로 본향 가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여러분! 많은 영혼들이 갈 길 못 찾아 헤매다가 쓰러져 죽는 심령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양의 진정한 행복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선한 목자를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선한 목자를 만난 양은 배고프지도 않고 원수의 공격도 피하며 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으니 평안하고 살이 찝니다. 주님은 요10:11절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⑷양은 의존하는 짐승입니다. 언제나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양입니다. 인간들도 그렇습니다. 권력에 의지하고, 재물과, 배경과, 기술을 얻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의 의지할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의지하면 어떤 복을 받을 수 있는가? 
  
'부족함이 없는 축복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그 분이 '풍성한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더 이상 원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⑴물질적인 축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모든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몸, 나의 집, 나의 사업, 나의 재물, 나의 건강, 나의 재능, 이 모두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⑵정신적인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물질적인 축복보다 더 좋은 정신적인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만족을 주시고, 교훈을 주시고,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십니다. 
  
⑶다음에는 이런 것들보다 더 귀한 영적 축복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하여 죄에서 자유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십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헌신할 믿음을 주시고, 또 하늘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각종 은사를 주시며 성령을 통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닮게 하십니다. 그리고 부활에 참여케 함으로 영생의 축복을 주시고 안식의 보장을 주십니다. /믿/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40:11덜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또 빌4;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우리의 모든 욕심을 채워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은 다릅니다. '채우시리라'고 확실하게 약속하십니다. 노력해 보겠다가 아닙니다. 채워주마 분명한 약속입니다. 

 
②나의 목자가 '푸른 초장으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2). 
  
'푸른 초장'은 목초 지를 말합니다. 푸른 초장에 가야 마음껏, 실컷 먹을 수 있습니다. 좋은 풀을 뜯어야 양질의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먹는 문제, 사는 문제까지 염려하지 말고 삶의 우선순위를 잘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마6:31-33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문제, 의식주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기 '누이시며'는 우리의 삶의 평안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설음은 뭐니뭐니 해도 배고픔의 설음입니다. 그러나 배부르고 몸 따스하면 우리의 삶이 평안합니다. 
  
또한 푸른 초장에만 누이는 것이 아니라, 쉴만한 물가로도 인도해 주십니다. 팔레스타인에는 푸른 초장도 귀하고, 물가도 별로 없습니다. 이 지역은 비가와도 땅속에 모두 흡수되어 물이 잘 고이지 않는 곳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쉴만한 물가를 찾기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는 양들을 인도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의 복음 적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오늘날의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고 희망을 갖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병 고침을 받습니다. 평안을 누립니다. 기도에 응답 받습니다. 양들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 보호받는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믿/ 
  
교부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내가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기까지는 영혼에 안식이 없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쉼은 주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③ 여호와를 목자로 삼는 자는 '영혼이 소생되는 은혜' 속에 살게 됩니다(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병들고 망가진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상처 입은 인간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이 소생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사탄의 유혹을 받아 죽음의 늪에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는 갈등과 긴장, 천대와 멸시, 불만과 억울함이 난무하고 그것들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은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종교나 철학이 이 영혼을 소생시키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영혼이 소생됩니다.  
  
주께서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목적은 우리의 심령에 신령한 부흥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우리의 심령은 죄로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소생되고 우리 심령이 신령한 은혜에 잡히면 어려워졌던 심령이 깨끗해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니라' 
  사실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 중 하나가 모든 인류를 치료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질 때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즉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하나님 그 분의 이름은 엘로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름 값을 한다고 합니다. 자존심을 걸고 힘쓰는 모습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자기 이름 석 자, 명예를 위해서, 자기 인생을 위해서 삽니다. 
  
얼마 전에 모 재벌은 자기 이름 때문에 아들 폭력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가 엄청난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울 때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통해 우리를 도와주시고, 축복하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이름 때문에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독교는 부도덕한 종교다. 왜냐하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버림을 받아야 마땅할 사람이 무조건 회개만 하면 사함을 받는다고 하니 그러면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그 은총을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하나님께서는 의의 영인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십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죄에서 해방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롬8:2절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은 율법을 따라 살려고 애썼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을 이길 수가 없음을 알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성화(거듭나는 삶)의 역사를 베풀어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꾸짖어 주시고 죄의 길이 아닌 의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심판에 대하여 찔림을 주십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여 조금씩, 조금씩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곡식이 열매를 맺으려면 일 년이 걸립니다. 사람이 성년이 되는 데도 20년이 걸립니다. 하물며 죄악가운데 있다가 새 사람으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이 되기까지 어찌 시일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끊임없는 회개와 결단을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점점 변화되어 의인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기와의 경건, 이웃과의 경건, 하나님과의 경건'을 잘 지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붙잡고 계속 노력하면 열 번 넘어지더라도 열한 번째는 점점 거룩한 백성답게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④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면 '능력의 손'이 우리를 안위하십니다(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팔레스타인은 지형의 특징상 기복이 심한 산지가 많습니다. 어둡고 험한 골짜기, 협곡이 많습니다. 특히 요단 지대는 좁고 급격한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사나운 짐승들이 많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나갔다가 늦어졌습니다.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들판에서 무서운 짐승들을 만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면 양들을 다 잡아먹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우리로 빨리 돌아가기 위해 위험을 무릎 써야 하는 계곡을 선택합니다. 짐승과 싸울 것을 각오하고 양떼를 몰고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도 살다보면 위험할 때가 있습니다. 곤경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고통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여기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가 어디겠는가? 건강이 나쁠 때, 사업이 실패할 때, 직장에서 쫓겨날 때, 아니면 우리의 모든 계획이 무너지고 어려움이 닥치는 길이 바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고 망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깨닫고 뉘우치고 바로 서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이 새롭게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감사하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 분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능력의 손입니다. 잠깐 '하나님의 능력'에 손을 알아보자! 
  
성경에는 손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또한 그 의미를 매우 크게 다루고 있습니다. 복된 손이 있는가 하면 저주의 손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무엇인가에 붙이면 계속 잡히는 손이 있는가하면 자꾸 빠져나가서 텅 비어 있는 손도 있습니다. 또 수고한대로 축복을 받는 손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손이 다 달토록 수고해도 축복을 받지 못하는 손도 있습니다. 
  
또 만사가 형통하는 손이 있는가하면 가는 곳마다 불통하는 손도 있습니다. 그래서 잘 되는 것도 그 손만 닿으면 다 막히고 맙니다. 또 간구하는 손도 있고, 교만한 손도 있습니다. 하늘높이 들고 하나님께 구하는 손도 있고, 잡힌 손을 뿌리치는 손도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아름다운 손을 잡아 보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주님의 손을 붙잡는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럼 하나님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⑴역사를 움직이는 손입니다. 렘16:21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역사를 움직이는 손은 대통령의 손도, 잘 나가는 대권주자의 손도 아니요 재벌의 손도 아닙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손은 하나님의 손입니다. /믿/ 오늘도 이 역사를 움직이시는 그 능한 손이 우리 속에 운행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손은 늘 생명마다 저울에 달아보고 계십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한때 바벨론에 하나님의 손이 나타났습니다. 벨사살 왕이 1천명의 술객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할 때 갑자기 손이 나타나서 벽에 글자를 쓰는데 그것을 본 왕의 얼굴빛은 변하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래서 술객과 점쟁이들을 불러오게 했으나 그 누구도 그 글자를 읽고 해석을 못했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글자를 풀었는데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으로 그 뜻은 하나님이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왕이 자격에서 '함량미달'이 되어 왕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 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음을 당했습니다. 
  
⑵심판의 손입니다.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는 영벌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에, 그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심판하십니다. 
  
⑶재물을 주장하는 손입니다. 여러분 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자 가운데 불행하게도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 땅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 재물이 남의 손에 넘어간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친히 손을 내밀어 그 모든 것을 다시 돌려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너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⑷사람을 붙잡는 손입니다. 모세를 붙잡았습니다. 여호수아를 붙잡았습니다. 다윗을 붙잡았습니다. 원수의 나라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니 문둥병이 깨끗하게 치료받았습니다. 하나님! 그 능력의 손으로 나를 붙잡아 주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⑸지식과 지혜의 말씀을 주는 손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더니 가는 곳마다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성경 66권에는 이 세상의 모든 비결이 총망라되어 집대성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속에 복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효도하는 비결, 돈 버는 비결, 장수하는 비결, 화목 하는 비결, 천국 가는 비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고 능력에 붙잡히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환경마다, 거리마다, 기업마다, 가정마다 온통 지식의 바람이, 지혜의 바람, 말씀의 바람을 일으키는 날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⑹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털어 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는 손이 하나님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힌 자는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는 역사가 일어난 줄 믿습니다. 

 
⑤주님을 나의 목자로 삼는 자는 '내 잔이 넘치게 채워' 주십니다(5). 
  
본문 속에 5절은 23편의 절정기를 이르는 대목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선언으로 시작하여 만족과 즐거움의 상태를 유지하다가 이제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조차 축복해 주시고 '잔이 넘치게 채워주시겠다'는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기 의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좇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의인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다'는 의미는 주께서 우리를 가장 귀한 자로 인정해 주심을 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의 축복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무궁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님의 축복은 영적인 구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서도 그릇이 넘칠 때까지 정말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부어 주십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 죽음이 꺾지 못하는 평화! 세상이 이길 수 없는 담대함! 그리고 퍼주고 퍼주어도 마르지 아니하는 물질의 축복까지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부어 주십니다(눅6:38).
  
본 절에 '주께서'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아니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한번 열면 닫을 자가 없고, 한번 닫으면 다시 열 자가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자를 있게 하시는 주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영원히 살아 계신 그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에서 몇 가지 진리를 발견합니다. 
  
⑴내 그릇에 비해 부어주신 은혜가 과분하다는 뜻입니다. 
  정직하게 표현해 보면 내 그릇은 작은 종지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동이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천한 그릇에 불과한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귀하게 쓰십니다. 사실 나의 사람됨은 선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선한 사람도 받지 못할 축복을 쏟아 주셨다면 이것이 내 잔이 넘치는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은 원래 미천한 목동이었습니다. 또 그는 왕의 자리에서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추악한 죄를 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잔이 넘치는 은혜 속에 살았습니다. 
  
⑵내 잔이 넘친다는 말은 '내 노력에 비해 성과가 크다'는 감격의 표현입니다. 
  크게 봉사하지도 못했는데, 크게 부르짖는 기도도 못했는데, 하나님이 은총을 쏟아 부어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크게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격하는 찬양 시를 많이 지었습니다. 
  
⑶내 잔이 넘친다는 이 말씀 속에는 지금 계속 이어지는 진행형입니다. 
  어제까지 넘치게 부어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지금, 현재 이 시간에도 넘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의 잔을 채워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⑷'내 잔이 넘친다.'에서 '잔'은 기업 즉 재산을 비유한 말입니다. 이러한 잔이 단순히 가득한 정도가 아니라 흘러 넘치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다윗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음으로 보여 줍니다. 실제로 그가 차지한 왕실의 재산과 사유 재산은 실로 엄청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대상27:25-31, 29:2-5).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많은 풍성한 재물을 자기의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데에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그 분이 채워 주셔야 ▶우리의 일생이 풍부합니다. ▶삶이 풍성해 집니다. ▶신용의 잔도 넘쳐 납니다. ▶기쁨의 잔이 넘칩니다. ▶행복의 잔이 넘칩니다. /할/ 

 
⑥주를 나의 목자로 삼는 자의 최고의 축복은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6). 
  
'나의 평생에' 즉 지금부터 죽는 순간까지, 아니 죽은 뒤 천국에서라도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계21-22:5절에 보면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해 줍니다. 
  
①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른답니다. 이 땅의 모든 물은 오염된 물입니다. 저 천국의 생명수는 오염되지 않은 물입니다. 
  
②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답니다. 그런데 그 생명나무에서는 달마다 열두 가지의 실과를 맺히게 한답니다. 
  
③저주가 없는 곳입니다. 계21: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 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땅은 어떤 곳입니까? 울고 탄식할 만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집은 저주도 사망도 애통도 이별할 것도 아픔도 없는 곳이랍니다.  
  
④주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계22:4절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하나님은 너무나 높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감히 그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구약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주님의 얼굴을 직접 대하는 곳이랍니다. 
  
⑤그곳에서 저와 여러분은 세세 무궁토록 왕 노릇하게 된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늘나라의 왕자요 공주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 다윗처럼 풍요로운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림의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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