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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이사랴의 재판 (행 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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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랴의 재판 (행 24:1~9)


오늘도 김밥 씨리즈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김밥 가게 옆에 참기름 가게가 입주했습니다. 참기름 가게는 종종 김밥을 이용해 주었는데 김밥은 전혀 참기름을 팔아주지 않자 참기름이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넌 어쩌면 그렇게 인색하냐?”고. 
그러자 김밥은 참기름에게 “나에겐 네가 필요 없는 존재”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열 받은 참기름이 김밥을 먼저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김밥은 옆구리가 터지고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지만 결국 김밥만 철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답은 <참기름이 고소해서>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가 고소당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루살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더둘로라는 이름의 법률가(본문에 변호사-1절, 실제로는 검사의 역할)를 고용하여 그를 고발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가이사랴 재판정에서의 바울에 대한 고소와 응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닷새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더라.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행전21장에 보면 밀레도를 떠난 바울은 배로 두로까지 온 다음(21:1-6)다시 두로에서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21:7-14)그리고 그는 육로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21:15-16)(제3차 전도 여행 지도) 그는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매듭짓고 그 결과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고 또한 이방 교회들의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참으로 오랜만에(사실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무고하게 고발함으로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21:30) 심문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심문을 받는 중 그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임을 밝혀 최악의 고문을 면합니다.(22:25-29)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행전23장에 보면 바울을 암살하려는 시도까지 발생합니다.(23:12-14) 

로마의 천부장은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보호하고자 로마 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랴로 호송하게 되고(23:31-35) 여기서 약 2년여의 옥중 생활을 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고소자들이 도착한 후 가이사랴에서 진행된 바울의 재판 장면을 보도합니다. 여기 그들은 바울을 애매하게 고발하고 있지만 이 고소 내용은 역설적으로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재판 석상에서의 바울의 모습을 통해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재판정에서의 바울을 통해 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1. 복음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사람

바울에 대한 첫째 고소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5절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자, 우선 여기 이 구절에 사용된 ‘전염병’, ‘소요케 하는 자’라는 표현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 전염병은 본래 페스트 같은 질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런 표현은 역설적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이 당시 세상에 얼마나 급속하게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는가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라는 표현을 통해 바울이 전한 복음이 당시 세상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결국 이런 유대인들에 대한 영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대 종교의 전통주의자들이 그의 목숨을 해코자 한 것입니다.

복음이 진리라면 진리는 인간을 자유하게 하고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진리였다면 그 진리가 유대인 사회를 격동하고 변화시킴이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면 오늘의 기독교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함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까요? 

저는 오늘의 기독교가 참된 복음을 알지 못하고 전하지 않거나 아니면 복음을 알되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비겁한 침묵 속에 안주하든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 1세기 성도들에게 주어진 복음과 동일한 복음이라면 이제 우리는 다시 복음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전염병처럼 페스트처럼 이 복음을 우리 사회 모든 구석구석마다 퍼트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으로 인한 거룩한 소요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적어도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1세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거룩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과 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2.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을 사는 사람

본문 5절에 보면 또 하나의 고소의 제목이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음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바로 ‘나사렛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를 한결같이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태2:23에는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의 경험을 고백하는 장면을 행22:8에서 읽어 보십시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예수님 자신도 스스로를 나사렛 예수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최근 <열린다 성경>씨리즈를 출간하고 있는 이스라엘 류모세 선교사는 나사렛이란 단어가 바로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본래 나사렛은 히브리어로 ‘나쯔라트’인데 이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인 ‘네쩨르’에서 온 말로 본래 메시아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11:1의 메시아 예언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 지목한 것은 그만큼 그가 철저하게 나사렛 사람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증거한 반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는 실상은 어떠한지요? 정말 우리는 우리의 대화, 우리의 교제, 우리의 삶의 마당에서 그리스도 그 분을 높이고 그 분을 자랑하고 그 분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사실 우리가 행전 11장에서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안디옥에서 처음 성도들은 불신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삶의 중심이 그리스도임을 불신자들조차 알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오늘 이런 증거를 남기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요? 진실은 우리는 대부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뿐 우리의 실제 대화와 교제의 중심은 여전히 <나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그것이 오늘의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닌지요?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선배 바울이 추구한 삶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모습이 아닌지요. 

바울의 유명한 갈2:20의 신앙 고백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 영혼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사람

바울 사도에 대한 세 번째 죄목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였습니다. 바울이 이런 고소를 당한 연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우리는 이 비난의 배경을 바울이 체포되던 행22:28-30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바울)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이 곧 닫히더라” 

진실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에베소 출신 이방인 드로비모를 데리고 아마도 이방인의 뜰을 거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 나온 것으로 넘겨 집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 법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이방인의 뜰을 지나 성전으로 들어가거나 이들의 출입을 도와주는 유대인들은 돌에 맞아 죽거나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실수를 범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가까이서 서성거린 것은 위험한 일이었음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요? 물론 여기서부터 조금은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한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만 에베소에서 자신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에 까지 동행한 에베소 출신의 이방인 신자 드로비모에게 바울은 가능한 한 이 거룩한 도시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의 사건을 잘 설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방인과 나란히 성내를 다정히 걷는 바울의 모습이 유대인들의 레이다 망에 포착되는 순간 갑작스런 예기치 않은 사태로 발전해 간 것입니다. 

결국 진실은 한 영혼에 대한 바울의 애틋한 사랑과 친절이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으로 바울은 가아사랴 감옥에서 2년, 다시 로마의 감옥에서 2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 사건을 후회한 흔적은 없습니다. 왜냐구요? 그의 존재의 목적, 생존의 이유가 영혼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혼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사람-그것이 바로 바울이었고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드로비모를 언급한 기사를 그의 마지막 서신 디모데 후서4:20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그것은 드로비모에 대한 바울 사도의 마지막 배려였을 것입니다. 아름답고 기후 좋은 항구도시 밀레도에서 병든 그가 요양을 하도록 선처한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킨 바울의 도전은 그가 만난 한 영혼에 대한 애틋한 사랑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틴 루터 킹은 그의 노벨상 수상 연설문(1964.12.11)의 대미에서 요한 일서4:7이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리고 이런 고백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사랑만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열쇠입니다.”(Love is the key to the solution of the problems of the world) 

1968년 2월 9일 그는 그의 조부가 목회하고 그리고 그가 부친과 동역했던 그의 고향 교회 조지아 주 애틀란타 에벤에젤 침례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그는 사실상의 유언의 메시지를 남깁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내가 죽는 것을 보실 분이 있다면 나를 위해 긴 장례를 할 생각을 하지 말아 달라는 나의 부탁을 꼭 전해 주십시오. 긴 조사도 하지 말아 달라고 말해 주십시오.

또 내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것도 언급하지 말아 주십시오. 내가 그밖에 수상한 상들이 300-400개가 있다는 것도 언급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들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언급이 필요하다면 다만 말틴 루터 킹이 이웃을 섬기는 일에 그의 인생을 드리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틴 루터 킹을 누군가를 사랑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해 주십시오.” 이 마지막 설교 후 꼭 2달 만에 그는 암살당했고 그가 남긴 이 마지막 설교문은 그의 장례식에서 녹음으로 다시 전달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말틴 루터 킹 목사처럼 그리고 바울 사도처럼 복음의 감격을 회복하고 복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높이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우리 곁에 다가오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참으로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바울이 경험한 그리고 말틴 루터 킹이 갈망한 세상 변화의 드라마는 바로 오늘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오늘의 사도행전의 드라마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오늘이란 시간을 살고 계시는 지요?

당신은 당신의 삶의 마당에 결코 숨길 수 없는 거룩한 영향을 끼치고 계십니까? 당신은 참으로 당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드러내고 계십니까? 당신은 누군가를 참으로 사랑하기 위해 오늘을 살고 계십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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