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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우회 (창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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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우회 (창 12:1~5) 
 
 
❚맹모삼천의 신앙

맹자(孟子)의 본명은 맹가(孟軻)로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 손에 자랐는데 이 어머니는 아주 현명한 사람으로 아들 교육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습니다. 맹자가 어머니와 처음 살았던 곳은 공동묘지 근처였습니다. 맹자는 늘 동네에서 장사지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곡(哭)을 하며 장사 지내는 놀이를 하고 놀았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맹자의 어머니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이사를 했는데 하필 시장 근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맹자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꾼들의 흉내를 내며 노는 것이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곳도 아니구나 싶어 이번에는 서당(書堂)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맹자가 제사 지내는 예법에 관한 놀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맹자 어머니는 이곳이야말로 아들과 함께 살 만한 곳이구나 하고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노력으로 맹자는 유교의 최고 학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맹자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한 데서 나온 고사성어가 무엇일까요? 바로 ‘맹모삼천’ 혹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입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현대판 맹모삼천’이라는 기사가 나서 관심 있게 읽어보았습니다. 내용인 즉 요즘 부모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이사를 마다하지 않는데 서울에서는 소위 강남 8학군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이사하는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고 명문 학원 따라 이사하고, 유치원까지 명문 유치원 근처로 이사한다는 것입니다. 지방의 경우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서 아예 내신 성적 때문에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사까지 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맹모삼천일까요? 맹자 어머니가 대학 잘 보내려고 이사한 것은 아닌데, 오히려 성적이 아닌 자녀의 인격과 성품을 더 중요하게 여겨 이사한 것인데 이 뜻을 오해해서 “인격이니 성품이니 하는 것은 대학 입학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오직 성적, 성적뿐!”이라 외치며 이사하는 것은 진정한 맹모삼천을 왜곡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이렇게 자녀의 교육을 위해 맹모삼천까지 하는데 과연 우리의 신앙을 위해, 그리고 자녀의 신앙을 위해 맹모삼천을 할 각오가 되어있느냐는 말입니다. 몇 년 전 본 교단 총회가 서울 명성교회에서 있었는데 그때 참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명성교회 주변에 집값이 아주 비싸다는 것입니다. 교회 옆에 살면 밤낮으로 시끄러워서 집값 떨어진다고 원망이 많지요? 지금 우리 교회도 이웃 주민들이 교회 지으면 집값 떨어진다고 항의하는 겁니다. 그런데 명성교회는 이상하게도 교회 주변 집값이 다른 곳보다 훨씬 비싸답니다. 여러 가지 까닭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성도들 가운데 교회 근처에 와서 살고 싶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명성교회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 중에 하나입니다만 본당이 좁아요. 그래서 본당에서 예배드리려면 30분 전, 어떨 때는 1시간 전에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교회 가까운 데 와서 살며 교회도 자주 가고 새벽기도도 참석하려는 성도가 많다보니 집값도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 혹시 이렇게 할 마음 있으십니까? 교회 가까운 데로 이사 와서 살자, 예배 참석하기도 좋고, 매일 교회 한 번씩 들러보고, 새벽기도도 참석하고, 덤으로 교회 주변 집값도 오르고 말입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어떤 집사님은 오랫동안 돈을 모아 드디어 꿈꾸던 새집을 샀는데 교회에서 거리가 먼 곳이었습니다. 새집 산 것이 너무 기뻐서 부푼 마음으로 이사를 하려는데 초등학생 아이들이 반대하더랍니다. “먼 곳에 이사 가면 교회도 옮겨야 하는데 우리는 이 교회가 좋다고, 절대 떠날 수 없다고, 엄마 아빠는 수십 년 동안 다닌 이 교회를 어떻게 떠날 수 있냐”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어른들이 부끄럽더랍니다. 

새집 산 기쁨에 들떠 교회 옮겨야 한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사 가도 주일에는 이 교회 오면 되지 뭐, 그러다가 너무 멀어서 불편하면 집 주변에 좋은 교회 찾아보자” 부부가 이렇게 말하고 이사하려고 했는데 초등학생 아이들이 오히려 깨닫게 해주어서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먼 곳에서 교회 나오다가 아예 온 가족이 교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온 분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더 중요하다고, 아이들 신앙이 더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신앙을 찾아서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새집 사지 말라는 말 하는 것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지 말라고, 무조건 교회 옆에서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마음속에 교회가, 그리고 신앙이 얼마나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느냐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마음껏 신앙생활 하고, 마음껏 교회에 오는 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냐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생활을 마음껏,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깝게는 남편의 반대로, 집안 식구나 부모의 반대로 마음대로 교회 못 나오는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도 제법 많습니다. 멀리는 공산국가나 이슬람 혹은 불교 국가에서 신앙생활 마음대로 못 하는 분도 많습니다. 지난주간 제가 마카오 남중국 신학원에서 소수 민족 교회 지도자들을 교육할 때도 위구르 사태 때문에 공안의 검색이 심해져서 다 받아 놓은 비자를 압수당해 너무 안타깝게도 그토록 기다리던 교육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이 몇 분 있었습니다.

 저 멀리 중동의 이슬람 국가 요르단에서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집안에서 쫓겨난 젊은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가문의 수치라는 명목으로 ‘명예형’(名譽刑), 즉 가문의 명예를 위해 가족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너무 쉽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닐까요? 박해는커녕 아무도 교회 가는 것 말리지 않고, 누구도 신앙생활 방해하지 않기에 마음껏 믿을 수 있지만 오히려 긴장감이 떨어져서 신앙에 대한 감사함도, 교회 나오는 것에 대한 감격도 많이 사라진 그런 덤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신앙을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앙을 찾아서 여러 차례 이사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아브라함입니다. 지금이야 이사하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이사한다고 한숨 쉬거나 걱정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저희 집만 해도 최소 열다섯 번 이상 이사했습니다만 요즈음 직장 따라, 아이들 교육 따라 이사하는 집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사하는 것도 쉽습니다. 예전에는 일일이 다 짐을 내가 싸야 해서 불편했는데 요즈음은 대부분 포장이사를 해서 돈만 주면 사람들이 다 와서 짐 싸고 날라주고 냉장고 속까지 정리해 줍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시대에 이사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한 마을에 같은 성씨가 모여 살고 한 가문이 대가족을 이루고 대대로 산 것처럼 아브라함 시대도 강력한 씨족 사회, 가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이 친척과 가족이 모여 사는 동네를 떠난다는 것은 곧 삶의 근거를 잃어버리는 치명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1절에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신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란 바로 이 씨족 사회와 대가족이 모여 사는 지역을 뜻하는 말입니다. 기껏해야 전쟁이나 굶주림이나 죄를 지어 떠나는 일 말고는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어쩌다 부득이 고향을 떠난 사람을 구약에서는 ‘나그네’(히브리말로 ‘게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사람은 고향을 떠나 삶의 모든 터전을 잃은 불행한 사람이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더불어 3대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이사 가라는 것입니다. 고향, 친척, 아버지 집, 삶의 모든 터전을 다 버리고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갈 곳이 어디인지조차 말해주지 않고 무조건 “내가 네게 약속할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결코 순종하기 쉽지 않은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이 가라시는 대로 순종하여 떠나갑니다. 친척과 가족과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믿고 온 가족과 조카 롯을 데리고 모든 종들과 소유를 이끌고 떠나갑니다(그야말로 定處 없이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위대하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이렇게 신앙을 좇아 떠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온 창세기 11장 31-32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읽을까요?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그렇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곳은 ‘하란’이라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 일가는 집을 떠나 이 머나먼 하란이라는 도시로 옮겨온 일이 있었습니다. 데라와 그 아들 아브람(=아브라함)의 본디 고향은 ‘갈대아 우르’라는 도시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던 도시로 오늘날 이라크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아브라함 당시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대도시였습니다. 최근 이곳을 발굴하면서 토판이라고 부르는 진흙을 구워 만든 책을 발견했는데 지금 봐도 놀랄 만큼 많은 인구가 살면서 경제, 문화, 산업의 중심지로 영화를 누렸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왜 데라와 그 아들 아브라함은 그 이사가 어렵던 시절에 본 고향을 떠났을까요? 그것도 그토록 영화를 누리던 대도시를 떠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 랍비들의 가르침인 미쉬나를 풀어놓은 탈무드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 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잡신들의 형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장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외출을 하면서 가게를 소년 아브라함에게 맡겼는데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남자가 들어와 우상을 한참 고르다가 이윽고 하나를 골라잡은 뒤 값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브라함은 값을 말하는 대신 그의 나이를 물었습니다. “난 금년에 쉰 살이란다. 그런데 나이는 왜 묻니?” “아저씨, 이 신상은 바로 어제 만들었거든요. 쉰 살이나 되신 어른께서 어제 태어난 우상에게 절한다는 것이 상당히 우습네요.”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많은 값을 치루고 우상을 사갔지만 아브라함의 이 말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뒤 또 아브라함이 가게를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어떤 여인이 죽을 쑤어서 우상들 앞에 가져다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아브라함은 막대기로 신상들을 마구 부숴 버렸습니다. 다만 가장 큰 신상 하나만 남겨두고는 그 손에 막대기를 끼워 놓았습니다. 아버지 데라가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보고는 너무 놀라 펄펄 뜁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했느냐?” “아버지,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어떤 아주머니가 죽을 쑤어다가 이 신상들 앞에 놓았는데 신상들이 서로 자기 것이라며 싸웠어요. 그러니까 제일 큰 신상이 질서를 유지한다면서 몽둥이로 모두를 박살낸 걸요. 보세요, 이 큰놈이 막대기를 들고 있잖아요.” “네 이놈, 거짓말 마라, 한 마디 말도 할 줄 모르고 분별력도 없는 신상들이 어찌 싸움질을 하겠느냐?” “아버지, 이제야 진리를 말씀하시네요. 말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는 우상들한테 우리가 어찌 복을 받겠어요?” 아브라함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신 것을 일찍부터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데라 일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란으로 이사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물론 전설입니다. 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과 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2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여기서 ‘강 저쪽’이란 유프라테스 강 건너, 즉 갈대아 우르를 뜻합니다. 여호수아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 살면서 우상을 섬겼다고 설교한 것입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아브라함이 우상을 파괴해서 온가족이 하란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기록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이 탈무드의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던 안 받아들이던 간에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고 아브라함 역시 우상숭배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을 갖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2장 1절에 처음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미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창 11장)이 제1의 소명이라고 한다면, 하란에서 부르신 것(창 12장)은 제2의 소명이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우회

우리는 이렇게 창세기 11장과 12장을 통해 아브라함의 우회(迂廻)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사가 어렵던 시절 아버지와 가족과 함께 본토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 첫 번째 떠남은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신앙을 찾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려고 했던 목적지는 사실 하란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에도 나온 것처럼 데라와 아브라함 일가가 가려고 했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으로 가려던 도중에 중간지점인 하란에 정착해 꽤 오래 눌러 살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아버지 데라는 세상을 떠나고 아브라함과 형제와 조카들은 거기서 제법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갑자기 그 누리던 것을 다 버려두고, 애써 타향 땅에서 얻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라는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이야말로 약속의 땅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가길 원하신 최종 목적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얻은 것을 다 내려놓고 또다시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브라함도 참 기구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사 경로를 한번 추적해 볼까요? ①처음에 본향인 갈대아 우르(우상의 도시)에서 하나님의 제1의 소명을 받고 첫 번째 결단을 합니다. 바로 우상을 끊는 삶입니다. ②그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 정착한 땅이 하란입니다. 중간 기착지인 셈입니다. 그런데 제법 안정된 삶을 누리던 하란에서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떠나라 하십니다. 거기가 네가 정착할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제2의 소명입니다. 이 소명을 받고 아브라함은 두 번째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약속 하나만 믿고 순종하여 가는 것입니다. 

③그래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최종 목적지인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보세요. 얼마나 우회를 많이 합니까? 그냥 쉽고 편한 길을 쭉 가며 살면 되는데 안정되고 편한 삶을 떠나고 또 정착하고, 또 떠나고 정착하면서 결국 최종적인 약속의 땅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도중에 두 차례의 하나님의 소명, 부르심이 있었고, 아브라함의 두 차례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아브라함은 기구한 삶을 산 것입니까? 왜 그 편한 삶, 보장된 삶을 버려두고 떠나고 또 떠나 빙빙 돌아야 했습니까?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신앙을 찾아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찾아 다 포기하고 떠난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약속 그 하나만 믿고 그 약속을 이루실 최종적인 목적지인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인생은 비록 기구하고 복잡해 보이지만, 어쩌면 편안하고 보장된 삶을 거듭 포기한 어리석은 사람 같지만 그의 이름이 영원히 남게 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분명 아브라함의 인생은 상당히 돌아왔습니다. 약속을 이루기까지 상당히 오래 걸렸습니다. 힘든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때론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때론 편하고 안정된 넒은 길을 버리고 아주 좁은 길을 가야할 때도 있고, 좋은 것을 포기하고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론 신앙을 향한 힘든 결단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믿고, 다른 어떤 좋은 것보다 올바른 신앙을 얻기 위해 순종하고 갔습니다. 결단하고 이사하고 떠나고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으나 그 세상 모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의 약속을 잡고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은 무엇을 잡기 위해 달려갑니까?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무엇을 얻기 위해 가고 있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 목적지를 향한 최단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빠른 길이 어디일까 골몰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문 학교도 가려고 하고, 좋은 직장에도 취직하고, 시집 장가도 잘 가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삶의 최종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요 최단 거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신앙을 위해서라면 좀 멀리 돌아가도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기 위해서라면 좀 험한 길을 가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최종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라면 좀 멀리 돌아갈 수도 있고, 이사도 갈 수 있고, 포기도 할 수 있고, 손해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이 결국 하나님이 약속하신 길이라면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거룩한 우회의 길입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선택의 길 두 개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믿으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빠르고 편한 신앙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멀리 돌아가는 힘든 길을 가느냐에 따라 여러분이 도착할 최종 목적지와 여러분이 잡게 될 최종적인 약속이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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