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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손을 내밀라 (막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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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을 내밀라 (막 3:1~6) 


어느 교회에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애독하는 장로님이 있다. 그는 종종 담임목사님의 설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고 한다. 그 교회 목사님은 설교할 때 마다 설교 감독관을 둔 것 같아서 맘이 편치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의 유형을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살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죽이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한쪽 손이 말랐다는 것은 피가 통하지 않아 마비되어 손이 오그라져 있는 장애 상태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는데 바리새인들도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예배에 있지 않았다.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치는가 아닌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만약 그 병자를 고친다면 고발할 악의를 품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마른 자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운데 일어서라!’ 
회당의 정중앙에 장애 입은 사람을 세웠다.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주목하고 있었다. 이때 예수께서 회중들을 향하여 물으셨다.

막 3:4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님은 ‘선을 행하는 것이요, 생명을 구하는 것이요’라고 대답을 기대하셨을 것이다.그러나 놀랍게도 회중들은 잠잠했다. 그들은 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쪽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회중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에 탄식과 분노가 일어났다. 5절에서,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완악함’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포로스’라는 단어인데, 대리석 일종의 돌에서 유래된 말이다. 대리석과 같이 굳어진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장애를 안고 불행 가운데 사는 동족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없었다. 불쌍히 여기지 않는 돌같이 굳어진 그들의 마음을 보고 탄식하셨고, 한편 그들의 완악한 죄성을 인해 분노가 일어나셨던 것이다. 

이윽고 예수께서 그 손 마른 자를 주목하셨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시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눌한 동작으로 손을 내밀려 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마른 손이 정상으로 회복된 것이다. 그 광경을 모든 회중들이 보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더라’는 말이 없다.

앞서서, 가버나움에서 네 친구들이 중풍병자 친구를 들 것에 메고 와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 놓았을 때 예수께서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침상을 들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막 2:12,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그런데 본문 중의 회당에 모인 그 무리들 가운데는 앞서서의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기적을 보고도 놀라지도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안식일 그 자체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 그들의 완악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 무리 중에 지도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이 밖으로 나갔다. 

막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평상시에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는 악한 일에는 서로 협력하는 비열함을 보게 된다. 

죽이는 신앙의 대표격이 바리새파 사람들이다. 불행한 일이다. 그러면 그들이 처음부터 완악한 사람들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막 1:21-22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막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제사장, 바리새파, 서기관들도 처음엔 예수님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이신가? 메시야이신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대적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악화된 근본적 원인은 유대교의 교리와 전통에 관계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2장의 사건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1)세리 마태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는 문제

막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면 안되는가? 종교적 귀족주의, 특권층의 횡포라 할 수 있다. 진정 백성들을 위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소외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돌아보았을 것이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2)금식 문제

막 2: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자기들이 금식한다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강요할 수 있는가? 그들은 매주 두차례 금식을 했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열심을 내기 위해 만든 규례에 불과한 것이다. 

막 2: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3)안식일 문제

막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제자들이 시장해서 안식일날 밀이삭 베어 먹은 일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날 배 고파서 남의 밭에 밀 이삭을 베어낸 것은 율법에도 저촉이 되질 않는다.

막 2:27-28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이 성경과 율법에 위반되지 않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와 교회 전통을 가지고 정죄하였다. 세리들과 죄인들을 멀리하는 것은 그들의 편애며 편견이며, 금식은 그들의 전통이요 관습이다. 안식일 규례도 그들이 만든 규례인 것이다.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정죄의 도구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도 그런 과오를 범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대체적으로 신앙생활을 모범적으로 잘 하는 사람, 오랜 신앙의 경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자기 신앙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다. 

주일을 잘 지키고 예배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은 예배에 참석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왜 주일날 참석치 못했으며, 왜 저녁 예배에 안 나오는가를 알아 보는 것이다. ‘집사가 저녁 예배도 빠진다’라고 책망하기 쉽다. 

금식을 자주 잘 하는 사람들은 금식 못하는 사람들을 신앙 없는 사람 처럼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금식을 잘 못하기 때문에 금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새벽기도에 모범적인 사람들이 새벽기도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경우도 있다. 기도 모임, 봉사 모임에도 안나온 것을 질책하고 비난하기 보다 먼저 왜 참석치 못하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몸이 약할 수도 있고, 믿음이 적을 수도 있고, 너무 분주할 수도 있다. 이 모양 저 모양 원인이 있을 것이다. 

자기 신앙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할 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주게 되는 것이다. 교리와 법과 전통을 갖다 대면 죄인 아닐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른 말을 했으니 고쳐질 것이다는 기대는 자기 생각이다. 바른 말이 도리어 상처를 주고 고통스럽게 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언제 어디서든지 살리고 회복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 본문 1절에서도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먼저 손 마른 자를 보셨다. 일설에 의하면 그 사람은 석수였는데 갑작스런 마비로 인해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 병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고, 손을 쓸 수 없는 불편함과 사람들의 시선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안식일에 회당 예배에 참석하였다. 어느 목사님이 성도들이 예배에 잘 참석함으로 얻는 유익에 대하여 다음과 말했다. 

‘교회는 은혜의 집입니다. 부지런히 출입하면 은혜 받습니다. 교회는 축복의 집입니다. 교회는 의로운 집입니다. 자주 왔다 갔다 하면, 축복을 받고, 의로워집니다. 교회는 치료의 집입니다. 치료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손 마른 자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참석했다가 주님을 만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주목하셨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믿음으로 그 마른 손을 내밀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몸의 회복 뿐 아니라 그의 삶이 완전히 회복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살리시는 분이다. 오늘날도 찾아오셔서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신다. 메마른 기도의 손을 내밀어라. 굳어진 봉사의 손을 내밀어라. 내 자신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그 분의 사랑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 분을 만나면 반드시 회복되고 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난다. 그 분의 음성을 들으면 반드시 치유되고 온전해지는 역사가 나타난다. 왜? 그분은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1)바리새인의 눈은 다른 사람을 감시하고 허물을 찾는 혈안이었으나 예수님의 눈은 항상 연약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살피신다. 

2)바리새인들의 마음은 메말라 비틀어져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완악한 마음이었으나 예수님의 마음은 죄인들과 연약한 인생들을 사랑으로 품으시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셨고, 심지어 바리새인들의 완악함까지도 불쌍히 여기셨다.

3)바리새인들의 혀에는 가시가 돋혔고,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칼날 같지만 예수님의 입은 세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병자의 위로가 되어 주셨다. 

4)바리새인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도록 발 거는 일에 분주했으나 예수님은 살려내고 회복시키시는 일에 용감하셨고 부지런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죽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게 된다. 바른 소리가 상대방을 찌르고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달라진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의 눈,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손이 되면 살리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 자신, 육적 자아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도 물으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 자리에 회중들 처럼 침묵하겠는가? 아니면 바리새인들 처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일에 가담하겠는가?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다. 

끼리끼리 어울리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하고 저항하기도 한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애독하면서 목사님의 설교에 감독관 노릇하는 장로님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본인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그런 행동이 교회를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손 마른 사람들이 눈에 띠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만 자꾸 보인다면 내 눈이 바리새인과 같이 되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눈과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 바란다.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기 바란다. 

예수께서 불행 속을 헤매는 손 마른 자를 즉시 보셨던 것처럼 우리의 눈이, 우리의 마음이 교회 안에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 불행의 그늘 속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큰 일 아니어도 괜찮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 병자를 회복시켜 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손을 내밀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손 마른 자와 같은 연약한 지체들을 살리는 성도가 축원한다. 죽이는 성도가 아니라 살리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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