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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정의 한복판에서 만난 예수 (행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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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한복판에서 만난 예수 (행 9:1~9)


한성호 씨가 쓴, 몽골의 고비사막 자전거 여행기인 󰡔몽골, 바람에서 길을 찾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양이나 말은, 가축이기도 하지만, 가족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몽골에서는, 그들이 기르는 모든 ‘말’이 다 가족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성인식을 한 ‘말’이라야, 비로소 가족 대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성인식 하지 않은 ‘말’은 ‘망아지’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성인식은, 벌겋게 달군 인두로 망아지 엉덩이에 낙인烙印을 찍는 것을 말합니다. 달구어진 인두가 망아지의 엉덩이의 살을 파고들면, 털과 가죽이 타고 살이 지져집니다. 노린내가 진동합니다. 망아지가 고통스러워 몸부림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몸부림치는 망아지를 붙잡느라 한바탕 씨름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낙인식이 끝나고, 초원에 어둠이 깃들고 정적이 감돌면, 남자들은 또 다른 의식을 한다고 합니다. 망아지 엉덩이를 지졌던 인두를 마유주(몽골 유목민들이 말 젖을 발효시켜 만든 음료수)에 푹 적신 후/ 그 인두에 묻은 마유주를 남자들의 손과 머리에 바르는 의식을 합니다. 성인이 된 망아지와 자기들과 하나가 되었다는 의식이지요. 그러고 나면 그 ‘망아지’는 말이 될 뿐만 아니라, 주인의 소유가 되고, 인간세계에서 유목민들에게 가족 중 하나로 대우받으면서, 드넓은 초원을 무대로 일생을 산다고 합니다. 망아지에게 성인식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몽골 유목민들에게 망아지의 성인식을 언제하는가입니다. 성인식은, 망아지가 튼실하게 자라서 한창 힘 있는 말이 될 만큼 성장했을 때, 그 엉덩이에 烙印을 찍는 성인식을 합니다. 

▶ 히틀러 치하에서 순교한 D. Bonhoeffer가 사도바울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평가를 했습니다. “바울은 삶의 ‘변두리’가 아닌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오늘 설교제목처럼). 바울은 “자기 열정의 한복판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이라는 겁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실패의 자리, 절망의 자리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확신이 확고부동한 자리에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자기 의의 정점에서 느닷없이 그의 인생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인물입니다. 

그 만남에서, 그는 모든 것이 뒤바꾸어지고 말았습니다. 삶의 방향도 바뀌었습니다. 삶의 이유도 바뀌었습니다. 삶의 목적도 바뀌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그 열정들이 더 이상 유용하지 못했고,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 의의 정점에서, 자기 열정의 한복판에서 만난 예수님이, 그가 가진 열정의 모든 가치를 재해석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1970-80년대에 한국교회에 유행처럼 번졌던 말이 있습니다. 부흥회에 참석하면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뒤집어진다”는 말입니다. 부흥회가 열릴 때마다, 뒤집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70, 80년대 한국교회는 제대로 뒤집어지지 못했습니다. 경제성장이라는 사회변동 속에서 한국교회는 유례없는 급성장을 거듭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70, 80년대를 거쳐 90년대 들어선 한국교회에 던져진 화두는 “교회개혁”이었습니다. “한국교회, 개혁되어야 한다.” 우리가 창세기 말씀에서 보는 대로,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요? 

노아홍수로, 창조세계는 온통 다 뒤집어졌습니다.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노아의 8식구 외의 모든 인간과 호흡으로 기식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노아 홍수 후, 불과 한 세기 만에, 인간 세계에는 또 다시 홍수이전과 같은 죄악의 먹구름으로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바벨탑 문화).

70, 80년대 한국교회는 성장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과제를 안은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90년대 중후반에 들면서 성장주의에 병든 우리나라 경제가 IMF 외환위기를 겪을 때, 교회개혁에 대한 요구도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여전히 교회는 개혁의 과제를 안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 우리들이 결코 포기하고 싶지도 않은 그것, 내 인생을 걸고 살아왔던 그것, 곧 내 열정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을 만나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가지고 있는 열정을 어떻게 평가해주실지, 들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내 열정을 다시 조망해 보아야 합니다. 

▶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대단한 열정의 사람을 만납니다. 사울(바울)이라는 인물입니다. 그의 열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열정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이었습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해괴망측한駭怪罔測한 열정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핍박할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열정이 있습니다. 아니, 있는 것이 아니라 많습니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否認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의 증언에 따르면 바울은, 초기예루살렘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가장 정점에 서 있던 인물입니다. 기독교역사의 첫 순교자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증인됨을 자처했던 사람이 그입니다. 그 때, “증인들이 자기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7, 58; 유대법 미쉬나에 따르면, 돌로 쳐 죽이는 재판에도 절차가 있습니다. 죄인을 성 밖으로 끌어냅니다. 

죄인의 옷을 벗겨 발가벗깁니다. 옷을 벗긴 다음에, 죄인의 키에 두 배 정도 되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돌을 던져 쳐 죽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스데반의 옷이 벗겨진 것이 아니라 그를 돌로 치는 자들이 옷을 벗었습니다. 정식재판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이야깁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건은 私的인 폭력이었다는 이야깁니다. 그 중심역할을 한 사람이 누굽니까? 사울입니다). 사도행전 8, 1에 보면 그렇게 스데반을 죽이고도 “사울은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했습니다. 사울은, 불법적인 폭력에 해당하는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사도들 외에는 예루살렘에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유대광야로 숨었습니다.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다메섹까지 도망쳤습니다(예루살렘 북동쪽 약 2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도시;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네로 황제 박해 때, 다메섹에서 유대인 10,500명이나 학살 되었다 함). 

그 핍박에 정점에 누가 있었습니까? 사울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사울이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런 사울이, 예루살렘교회 핍박으로 그칠 리가 있겠습니까? ‘산헤드린공회의 체포영장’을 가지고 다메섹까지 손을 뻗칩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기세였습니다. 다메섹 가까이 이르자, 그는 재차 굳은 결의를 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그 때, 그의 발걸음을 강제로 멈춰 서게 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가던 길바닥에 사울을 꼬꾸라지게 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태양 빛보다 더 강렬한 빛 앞에서 사울은, 길바닥에 그대로 꼬꾸라지고 맙니다. 자기 열정의 한복판에서 꼬꾸라진 겁니다. 강한 빛 앞에서 눈이 멉니다. 그리고는 빛 가운데서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너무 놀랐습니다. “주여(Sir), 당신이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 5). 자기 열정의 한복판에 극적으로 개입하신 예수님 앞에서, 그의 그 강렬했던 열정이 갑작스럽게 정지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열정에 강력한 브레이크가 걸린 겁니다. 열정의 한복판에서, 자기 열정의 정점에서, 자기 義의 정점에서, 그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작동정지 되고만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 20의 고백에 따르면 사울에게 있어, 다메섹 사건은 ‘자신의 죽음’의 사건이었습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분석심리학자였던 C. G. Jung은 “사람은 누구나, 중년이 되면 자기인생에 뻥 뚫어진 구멍을 매워줄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흔히 중년을 ‘인생의 하프타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만 보고 열정적으로 달려왔던 인생의 전반전을 평가하고 후반전을 준비하는 때가 중년이라는 겁니다. 열정의 한복판에서 낡은 가치들을 버리고, 내 인생의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찾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열정은, 어떤 열정입니까? 예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열정입니까? 하나님 나라 복음말씀에 합당한 열정이라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의 열정 얼마나 대단한 열정이었습니까? 예루살렘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행동 대원이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유대교 신앙에서 왔습니다. 율법주의에서 왔습니다. 선민주의에서 왔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바리새적인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것을 자랑하던 자가 아닙니까?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임을 자랑하던 자 아닙니까? 그러나 그 모든 자랑, 열정에도 불구하고,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 앞에서, 그 모든 것이 일순간에 작동정지 되고 말았습니다. 도리어 자신에게 害가 되어버렸습니다. 배설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의 열정을 재평가하셨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바울 같이, 내 열정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내가 가진 ‘열정’을 예수님께 재평가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는 열정이, 자신과 교회와 가정에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열정의 한복판에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평가하신다하여도, 여전히 그 열정들이 내 인생과 교회와 가정과 이웃에게 유익한 열정이라 할 수 있을까요? 

▶ 1930년대 한국 신학계를 대표하는 ‘혜성과 같은 신학자’ 鄭景玉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1903년 전남 진도, 부잣집에서 태어나 1945년 4월에 해방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난 목사님입니다. 1919년 삼일운동 때 학생시위에 참가했다가 그 후 투옥되어, 옥중에서 전도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 분입니다. 정경옥 목사님이, 1932년 봄 학기부터 감리교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당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명교수였습니다. 

그런 정경옥 교수가 감리교신학교에 부임한 지 5년만인 1937년 3월에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교수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진도로 내려갔습니다. 잘 나가던 교수가 느닷없이 교수직을 버리고 낙향하게 된 것을 두고 얼마나 말이 많았겠습니까? 

그가 말하는 신학교를 떠난 이유는, 신학교에서 강의한 지 5, 6년이 지났지만, 자신을 명교수라고 칭찬하고, 학생들의 존경은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고갈로 인한 내적인 위기감 때문이라 했습니다. 자신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못한 영적고갈이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나는 감각의 세계에서 방랑하는 탕자이다. 

시대에 미봉(彌縫: 잘못된 것을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꾸며대어 맞춤)하여 환경에 아첨하려는 것 밖에 더한 것이 무엇인가?···나는 이렇게 황폐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황폐의 극한에 있어서 자아반성의 새로운 길을 찾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아직도 나의 교만이 있고, 나의 명성이 있는 동안은 내가 나를 반성할 기회를 주지 못한다. 

현재의 나 전체를 매장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좀처럼 나를 버리지 못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경험한 성도의 체험을 가지고 싶었으나, 현재의 내가 죽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생명 전체에 대하여 총결산을 감행하기 전에는, 새로운 생명을 가질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나는 신학교를 떠나 이 촌으로 찾아왔다···. 나는 나라는 인간 그대로를 숨김없이 살아보고 싶다. 나라는 이 기괴한 존재를 첩첩 둘러싸고 있는 假裝(겉으로 거짓 태도를 취하는 것) 벗기고 알맹이 그대로의 내가 되고 싶다. 이 假裝이 너무나 무거워서 이제는 견디기 어렵다···.” 고뇌하는 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정경옥, “위기․흙․나”,⟨새사람⟩7집, 1939. 7. pp. 11-12).

정경옥 목사님이, 고향 진도에 내려가 자기성찰생활을 하면서, 아주 귀한 분을 만납니다. 그 분은, 우리나라의 성자로 추앙받는 이세종李世鐘 선생님이라는 분입니다. 이세종 선생은 목사도 아닙니다. 신학을 공부한 분도 아닙니다. 남의 집에서 40년이나 머슴살이 하던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목사보다, 신학자보다 탁월한 영성을 가진, 예수님 닮은 성인이었습니다. 그 분의 제자가 한국의 프란치스코라 불리는 ‘맨발의 성자’ 이현필李賢弼 선생입니다. 

이세종 선생님이나 이현필 선생님은, 서양의 수도원 운동을 배운 적도 없고, 소개받은 적도 없습니다. 선교사나 한국인 목사로부터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福音의 道를 깊이 통찰하고 순명한 성인들입니다.

이세종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봉분을 만들지 말고 평토장할 것을 당부한 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답니다. “행여 나 죽거든 지금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입혀 묻으시오. 수의 해 입힌다고 멀쩡한 옷 땅에 묻어 썩히면 죄가 되오. 그런 옷 있으면 거지들 갖다 입히시오. 나 죽고 내 옷 벗기면 벌 받소.” 

정경옥 목사님이나, 그가 만난 한국의 성자 이세종 선생님이나 그의 제자 이현필 선생님 같은 분들이 가지고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열정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그 예수님 앞에서, 더 이상 유용가치가 없는 낡은 가치들을 내다버린 사람들입니다. 만일, 내 열정의 한복판에도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면, 우리의 열정은 어떤 가치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혹, 우리도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말씀을 듣는 자가 되지는 않을까요? 

[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그릇된 열정에 사로잡혀 다메섹으로 돌진하던 사울의 발걸음 멈춰서게 하시고, 길바닥에 꼬꾸라지게 하신 주님, 오늘 우리의 헛된 열정의 인생걸음도 멈추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도 바울처럼,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부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새로운 열정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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