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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약 1:5~8) -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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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약 1:5~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삶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우리교회는 금주부터 5주간을 ‘여름CM연합사경회’로 모여 야고보서의 말씀을 나누고자 준비했습니다. 무더운 계절이기에 CM모임이 가정별로 또는 소규모 단위로 모이는 것에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습니다. 휴가철 가정단위로 특별한 계획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기에 CM 모임의 시간을 맞추는 일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섯 주간 주일오후 연합으로 예배당에 모여 말씀을 연구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경회(査經會)란 ‘일정한 기간 동안 한데 모여 성경을 공부하는 교인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성경공부를 통해 영적(靈的) 각성과 믿음의 생활 쇄신을 도모하고자 일정한 기간을 정하고 모이는 집회’인 것입니다.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 ‘J. I. 네비우스’는 1890년 6월 한국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들의 초청 세미나에서 선교사업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여럿이 함께하는 체계적인 성서연구'를 권장한 것입니다. 특히 그는 한민족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이 운동을 일으키고 이끄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 초대교회는 이 사경회 운동을 계기로 부흥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사경회는 선교사 ‘H.H.언더우드’의 집에서 7명의 교인이 모여 행한 ‘사경반’(査經班) 이었습니다. 조직적인 사경운동은 초교파적으로 연합하여 각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번져갔습니다. 1910년부터 1930년까지 20년간에 걸쳐 129만 2000명의 회집 인원이 집계된 것을 보면, 이 운동에의 호응과 결과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한국초대교회의 부흥과 성숙의 역사를 재현되기를 기대하며 ‘여름 CM연합사경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과 능력이 우리 안에서 성육화되어 생명과 능력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됨으로 변화와 함께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지도록, 우리 모두는 기도하면서 적극적으로 열심을 다하여 참석하도록 노력합시다. 물론 오후시간의 어려운 특성이 있을지라도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믿음으로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이번 여름CM연합사경회의 텍스트는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바른 믿음을 세워주기 위한 말씀의 책입니다. 곧, 바른 실천적 삶을 실행하는 믿음을 세워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이런 믿음의 삶을 이루기 위해 기도와 함께 해야 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로 이 사경회를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하며 참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삶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기도와 함께 출발했고 기도와 함께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알렉산더 화이트라’는 “세상의 어떤 남자나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크고 좋은 재능을 주셨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의 재능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중요한 기도의 삶이 잘못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4:2)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생명 있고 능력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의 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목적이나 방법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야고보서 안에서 기도가 왜 필요한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기도가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함으로서 하나님과의 가족적인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적인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함께 나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5절) 이심을 말씀했습니다. ‘고난당하는 자는 기도하고 즐거워하며 차송하라’(5장 13절) 면서 하나님과 함께 기도로 나눌 것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함께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시며, 우리의 아픔과 염려에 함께 아파하시기도 하시고 함께 염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께 구함으로 해결 받는 것임을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문제와 삶의 과제를 해결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시험을 깨닫고 극복하기위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며 기도하라(1:5)고 했습니다. 병든 자를 위해서도 기도하라면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라”(약5:15)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기도가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께 구함으로 받을 뿐 아니라, 행함을 드러내는 믿음을 구현하게 해 주는 것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기도는 믿는 바를 실행하게 해줍니다. 야고보는 성도가 서로 다투는 것을 보며 기도할 것을 말씀(4장2절) 했습니다. 온전한 성도로의 성숙함은 기도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는바 대로 실행하는 믿음은 기도함으로 이루어 갈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믿는 바를 실행하는 행함을 이루도록 기도해야 할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진리의 삶을 실생활로 드러내는 믿음의 역사를 이루기가 어려운 때입니다. 
  
교육학자인 ‘현용수 교수’는 우리 시대의 문화구조를 ‘수직문화’와 ‘수평문화’로 구분했습니다. 수직문화는 인생의 의미성을 찾는 문화로 세 가지 단계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심연의 가치 및 지혜의 차원(전통, 뿌리, 역사), 철학적 차원(형이상학적인 영역, 인간과 우주의 본질추구, 사상), 종교적 차원(신성함, 종교성)입니다. 
  
수평문화도 세 단계로  표현 했는데, '외형적 표면의 단계(눈에 보이는 육을 자극하는 유행문화), 인간기본욕구차원(물지, 명예, 권력, 성sex), 인간지식의 차원(IQ, 현대학문과 지식, 과학의 영역)입니다. 
  
현대인들은 ‘수평문화’에 살면서 그 문화에 물들어 있고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수직문화’가 낯설고 멀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수평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복음과 진리를 전해도 수평문화에 어떻게 길들여져 있느냐에 따라 그 복음의 진리가 낯설고 쉽게 와 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평문화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미국 LA에서한국에서 이미 방영되었던 TV연속사극 “한명회‘가 인기리에 방영되었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 그 드라마가 너무 재미있어서 기다리지 못하고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 4개를 빌려왔답니다. 토요일 장로님은 너무 재미있어 절재하지 못하고 그 비디오를 8시간 연속으로 모두 보았는데 새벽 4시에야 끝났습니다. 다음날이 주일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장로님이 주일11시 예배시간에 기도를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장로님은 아차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장로님은 회중 앞에서 엄숙하게 기도를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성은(聖恩)이 망극하나이다.” 장내는 폭소가 터졌습니다.  
  
현대인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낯설고 어색하고 힘들게 느껴지면서 즐겁게 신중하게 들려지지 않는 이유는 수평문화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수평문화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의 종교적 성향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길가와 자갈밭과 가시나무의 밭과 같은 것입니다. 
  
수평문화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으로 뿌려지겠습니까. 하나님의 강하신 역사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수평문화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을 향하여 궁여지책으로 대중적인 ‘빅 이벤트집회’를 통해서 사람 모으기나 ‘수평문화 도입 프로그램’으로 사람 모으기를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즐겁고 재미는 있었는데 변화나 부흥의 열매가 희귀한 행사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더욱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생명과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고 ‘수평문화’에서 만들어진 교회생활은 진리의 생활을 드러내지 못하기에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의 역사가 우리 신앙공동체 안에서 회복되고 부흥되도록 기도하면서 참여하자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대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1903년 선교사들의 기도회 모임이 도화선이 됐습니다. 그 기도의 역사는 1904년 1월에 열린 원산 감리교와 장로교 연합사경회에서 원산 교인들 사이에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1905년 11월 이후에도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지속되었으며, 1906년 서울에서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이 연합으로 인도한 부흥회가 두 주간 동안 열렸고, 개성에서도 연합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실질적인 도화선이 되는 평양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의 연합 사경회가 8월에 1주일 동안 열렸으며,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하디가 인도했습니다.
  
1907년 장대현 교회에 1,500여 명이 모여 사경부흥회가 시작되었는데 당시 부흥회를 인도했던 장로교'리(G.Lee)’ 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월요일 저녁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질는지 모르는 상태로 예배에 참석했다.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기를 하나님께 비는 마음뿐이었다. 예배당에 도착해서 우리 모두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짧은 설교가 있었고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통성기도로 들어갔다. 통성기도는 이 때 집회의 특징이었다. 기도가 끝나고 몇 사람이 나와 간증한 후 인도자가 찬송을 인도한 후,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가고 새벽까지 남아 기도하며 자기 죄를 회개할 사람은 남아 있으라고 광고했다. 대부분이 돌아갔으나 5, 6백 명 정도가 남았다. 우리는 그들을 ‘ㄱ’ 자로 꺾어진 교회 중앙으로 모았다. 그리곤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기도회는 지금까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그런 형태로 진행됐다. 

기도를 마친 후 회개할 사람이 있느냐고 하자 그 순간 하나님의 성령이 모인 사람들 위에 임하였다. 한 사람씩 일어나더니 자기 죄를 자백하고는 쓰러져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루에 몸을 뒹굴며 주먹으로 마루바닥을 치면서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우리 집 요리사도 자복하면서 뒹굴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목사님 말씀해 주세요. 내게 소망이 있습니까? 과연 제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면서 내게 달려와 몸부림치며 울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집회는 이튿날 아침 10시가 되서야 끝이 났습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사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평양 대 부흥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어른들의 부흥운동은 평양 숭실학교, 광성학교, 숭의여학교 등 학생들에게 확산됐습니다. 감리교와 장로교와 합동으로 운영되던 숭실대학교에서는 봄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2주간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학생들은 매일 수업이 끝나고 오후 4시부터 집회에 참석했는데, 어른 집회와 마찬가지로 학생 집회에서도 통성기도와 회개 자복이 일어났습니다. 숭실대학 학장으로 있던 ‘베어드’(W. M. Baird)의 부인은 그 때의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학생들은 자기 이마 혹은 손으로 마루바닥을 쳤으며, 말 그대로 고뇌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가 그들을 찢어 놓는 듯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버티고 앉아 있기가 어려웠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울면서 자기 죄들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쏟아놓은 자백들은 충격적이었다. 마치 지옥이 발칵 뒤집힌 것 같았다. 살인, 간음 등 온갖 더럽고 추한 행위들에서 시작해 방화, 술주정, 도둑질, 강탈, 거짓말은 물론이고 시기와 질투, 멸시와 미움 등 별의별 죄들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듣고 있던 사람들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끄집어낼 수 없는 고백들이었다.” 

이런 변화와 부흥의 역사는 기도와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철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하나님은 우리기도에 신실하시고 철저하실 뿐만 아니라 정다우시며 풍성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하나님은 우리기도에 신실하시고 철저하실 뿐만 아니라 정다우시며 풍성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 안에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꾸준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기도하며 구하는 우리에게 후히 주시며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기도하는 성도로 그 하나님 안에 살아가시며 승리하시는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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