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마 7:7~11)

  • 잡초 잡초
  • 1657
  • 0

첨부 1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마 7:7~11)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너무도 유명한 가르침인데, 특별히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면 많은 오해와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조심스러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을 오해하기 쉬운 것이 무엇입니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면 너희가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 말씀은 자칫 잘못하면 내가 원하고 소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다 주신다는 의미로 생각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하다가 자신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낙심과 절망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보다 더욱 불행한 상태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지 않는 모양이구나.” “하나님은 혹시 안 계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 믿는 일이 다 쓸데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성도가 이렇게 불신앙과 의심에 빠지게 되면 큰일이지요.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문자적인 해석 방법이고, 둘째는, 역사적인 해석방법이며, 셋째는, 영적인 해석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있어서 배경과 문맥도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이단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성경의 배경과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의 한 두 구절만 뚝 떼어서 억지로 해석을 하며 자기들의 주장을 펴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주님은 어째서 여기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이 말씀이 어찌하여 산상보훈 이 대목에서 나오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헨드릭슨이나 로이드 죤스 목사 같은 분은 모두 본문 말씀을 마 7:1-6의 말씀과 연결하여 해석을 합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것이 주님의 경고입니다. 

이것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의 교만은 꺾이게 됩니다. 누가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판단할 자격이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표준에 맞추어 살 수 있습니까? 이 표준 앞에 서게 되면 우리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닫게 되고,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 필요함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이렇게 먼저 자신의 궁핍함과 부족함을 느끼는 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사람은 먼저 구하기 전에, 자신의 궁핍을 올바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의 궁핍에 대한 깨달음이어야 하느냐 할 때에,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를 생각하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자기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의로움이나 거룩함이나 공로가 전혀 없고, 대신 있다면 죄와 허물과 불의만 가득한 죄인 중의 괴수임을 느끼는 마음이 바로 가난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을 깨닫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다음 단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애통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죄와 허물만 가득한 것을 깨달은 사람이, 그 죄를 원통히 여기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애통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런 단계 있는 사람이라야 그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하는 사람에게 또 한 가지 필수적인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곧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뱅이라는 사실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자각할 때, 그는 비로소 구하는 일을 올바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구하는 일을 주님께서는 세 마디로 표현하셨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여기서 우리는 점진적인 강도의 변화에 유의해야 합니다. 

1. 구하라고 했습니다. 

구한다는 것은 자기의 결핍을 깨닫고 하나님께 그것을 채워주시도록 호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님 앞에 겸손과 믿음이 전제됩니다. 왜냐하면 겸손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오직 자기가 얼마나 선한 사람인가를 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를 합니다. 구한다는 것은 사람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자는 응답하실 능력이 있고, 실제로 응답을 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믿음을 갖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찾으라고 했습니다. 

찾는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하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이 마음의 소원이라면, 찾는 것은 행동으로 옮겨진 탐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찾으라는 것은 행동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기도는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광부가 광맥을 찾아 온 산을 뒤지는 것과 같고, 또는 온천을 찾아 산야를 헤매는 탐구자와 같으며, 환자가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치유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감나무 밑에 가만히 팔을 베고 누웠어도 저절로 홍시가 입에 굴러 들어오듯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밥숟가락이 저절로 날아와서 배부르게 해주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가 우리의 신앙행위의 전부가 아니고, 기도는 행동과 함께 온전해집니다. 

예를 들면, 깊은 성경 지식을 얻기를 구하는 성도는 성경을 부지런히 상고해야 하는 것이고,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참으로 원하는 성도는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며, 참된 신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단순하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소원에 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일어나 찾아 나섬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보다 풍성해지게 됩니다. 기도 없이 행동만 내세우는 것도 행동만능주의로 치우치는 것이 되고, 행동 없는 기도만능주의도 잘못된 방법인 것인 줄 알아서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지만 응답되지 않으면 그만 잊어버리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찾아 응답받겠다는 뜨거운 마음이 부족한 탓입니다. 

우리는 구한다면 찾아야 될 것이고, 열리지 않으면 결국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렘 29:12.13절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전심으로 부르짖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아서 응답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하고, 그 위에 참는 것을 더한 것을 의미합니다. 문을 두드리는 기도는 불가능이 가능해질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며 끊임없이 부르짖는 간구를 말합니다. 보통 사람은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립니다. 그러나 술주정꾼의 경우는 다릅니다. 문을 두드렸다가 문이 열리기도 전에 잊어버리고 가버리기도 합니다. 

제가 복무하던 군부대에서 있었던 일화입니다. 우상병이란 한 병사가 술에 취하여 상황실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술김에 전화를 받는 우상병은 “여보세요, 여보세요”라고 응답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따르르 하고 전화벨 소리가 울리니까 짜증이 나는 큰 소리로 “여보시요, 여보시요” 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었습니다. 그러나 따르르 하는 전화 벨 소리는 계속 울렸습니다. 알고 보니 술김에 전화를 받는다는 것이 그만 후렛쉬를 들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했으니 통화가 될 리 만무하지요. 

우리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는 세 개의 동사가 현재 시제의 명령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드린다는 동사에서 가장 강한 뜻은, 바로 끈기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눅 11:5-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게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내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문을 두드리는 기도는 이처럼 강청의 기도요 인내의 기도를 말합니다. 

그다음 8절에 보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권면과 함께 정확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구하라-주실 것이요. 찾으라-찾아 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에 더욱 약속이 강화되는데, 구하는 이마다, 찾는 이마다, 두드리는 이마다 곧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 중 한 사람도 실망치 않고 응답을 받게 되리라는 놀라운 약속인 것입니다. 

믿음의 행동이 따르는 끈기 있는 기도가 응답될 확실성을 보십시오. 9-11절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기도 응답에 관한 주님의 논증을 보십시오. 

어떤 부모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속일 자가 있겠느냐? 어떤 부모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과 같은 해로운 것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어느 보모가 자식이 계란을 달라 하는데 독사를 줄 사람이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부모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인간 부모 중에도 그런 부모는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 줄 줄 알거든” 육신의 부모는 도덕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죄 많은 인생입니다. 

그러한 부모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물며’라는 말은 비교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부모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논증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애로운 부모들의 모든 애정을 한 그릇에 담아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긍휼에 비교한다면, 그것은 마치 한 자루 촛불과 태양과도 같고, 그리고 한 방울의 물과 대양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에게 해로운 것은 결코 주시지 않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어리석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해로운 것을 줄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초콜렛을 사달란다고 해서 쵸콜렛을 잔뜩 사주는 부모가 있다면, 이 사람은 자식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선은 맛이 있을지 모르지만 장래에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완전하시고 절대 선하시고 절대 지혜로우시므로, 우리에게 해로운 것은 절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날카로운 칼이나, 아직 덜  익어서 먹으면 해로운 과일이라도, 달라고 떼를 쓰며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명한 부모라면 이와 같은 아이들의 요구를 무조건 다 들어주지 않는 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도, 성도들이 아무리 기도할지라도 그에게 해로운 것은 끝내 주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좋게 생각되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나쁜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바울은 인간적으로 자랑하고 교만할 만한 것이 많은 분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사단의 사자로 불리는 가시와 같은 질병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데, 참으로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눅 11:13절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욕설 중 가장 큰 욕은 ‘갓뎀’입니다. “성령이 너를 떠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보다 더한 욕설은 “성령 없이 목사 노릇하라.”는 욕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성령은 우리 신앙의 생명과 같습니다. 그때문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제자들에게 주신 선물이 성령님이십니다. 제자들은 그 성령의 권능을 받고 나서부터 세상을 이기는 사자처럼 용맹스러운 믿음의 용사들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 모든 은사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좋은 것, 곧 성령과 성령 충만함을 구하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은사를 위해서 끈질기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도생활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없이 신앙생활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야말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생명줄 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도의 수준은 곧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기도하느냐? 어떤 자세와 내용으로 기도하느냐? 혹은 계속적으로 기도 응답을 받고 있느냐에 따라 신앙의 수준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우리들의 삶 속에 문제들이 산재해 있습니까? 기도가 부족한 연고인줄 알아야 합니다. 삶 속에서 실패를 경험했습니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르게 기도하고 시작한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응답과 성공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설령 잠시 곤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충분히 기도했다면 아무 염려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그 곤경 또한 순경으로 가는 과정일 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에 대하여 유대 랍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가 입에 가까이 있는 것만큼,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에게 가까이 계신다.”  “인간은 두 사람이 한꺼번에 말하는 것을 듣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세계가 동시에 부른다 해도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사람은 자기 친구의 요구로 인해 걱정되어 괴로워하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 필요한 것과 요구를 내어놓는 그 사람을 누구보다 더 사랑하신다.”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간절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구하는 이마다, 찾는 이마다, 두드리는 이마다 실망하지 않고 응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끈질기게 드린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실한 논증도 해주셨습니다. 인간 부모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비교에서, 악한 인간 부모도 자기 살붙이인 자식들에게는 어찌하든지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악한 인간 부모와 비교할 수 없이 좋으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시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교훈은 모든 기도, 어떠한 소원도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만 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나쁘고 해로운 것은 절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여 성령을 구하면 반드시 그렇게 살 수 있는 성령의 능력들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성도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놀라우신 지혜대로 각 사람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