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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그림자 (출 20:12) - 어버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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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그림자 (출 20:12)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해서 사회나 교회가 가정 중심 문화 행사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의 율법을 십계명으로 주셨습니다. 가장 원리적 인간 삶의 방향 제시를 10가지로 주셨는데 다섯 번째가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으로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이 십계명은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나와 이웃의 관계인데 이웃 관계 첫 번째가 부모 관계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한국이나 중국 문화에는 효 사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부분은 십계명과 거의 다를 바 없이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우리 젊은이들과 노년층의 갈등이 깊어졌다고 봅니다. 

5천년 동안 우리 민족은 부모 중심 문화로 살아왔는데 서구 사회의 부부 중심 문화를 받아드리면서 그 과정에서 갈등이 좀 있어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귀중하게 생각하던 윤리관이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시대라고 보겠습니다. 

우리 사회를 가장 힘 있게 지켜온 윤리관에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 가지의 강령과 다섯 가지 인륜을 기초로 인간이 살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동양의 십계명과 같은 교육을 우리는 받고 자랐습니다. “군위신강(君爲臣綱)이라 하면 신하는 임금을 위해서 존재하고 또, 부위자강(父爲子綱)이라 하면 자식은 부모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부위부강(夫爲婦綱)이라 하면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런 교육에서 지금은 그 개념이 정 반대가 되었습니다. 임금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있고,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확실히 문화는 다르게 변했는데 남자들이 좀 고난스러워진 문화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심방 다니면서 많은 들은 이야기가 나이가 들면 여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밥을 하기 싫다는 반응으로 이 문제를 두고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집에서 밥을 한 끼도 안 먹는 남편을 보고 “주님”을 부른답니다. 이때 “주님”은 집주(宙)로 이 집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사용을 하고, 한 끼 먹으면 그래도 ‘님’자를 붙여서 “영감님”이라고 불러주는데 두 끼를 먹는 남편을 보면 “두식아!” 이렇게 부르고 세끼 다 먹는 사람은 이름이 세끼랍니다. 그래서 “이 세끼야!” 이렇게 부른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부자유친(父子有親)”,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군신유의(君臣有義)”, 남편과 아내는 서로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에 참견하지 말라고 “부부유별(夫婦有別)”,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하라는 “장유유서(長幼有序)”, 친구 간에 의리를 지키라는 “붕우유신(朋友有信)”으로 우리가 교육을 받았고 오랫동안 이것이 사회의 하나의 십계명과 같이 그렇게 지켜져 왔습니다. 

고종황제 밀사까지 한바 있는 미군 헐버트 씨와 미국 공사로 한국에 와있는 센제 씨, 그리고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알렌 씨 이런 사람들이 쓴 글에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나서 조선인으로 끝까지 살고 싶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나라는 노인의 천국이다. 노인 공경 문화가 이렇게 잘 된 나라는 세상에 없다.” 서구인들이 여기 와서 볼 때 이런 말들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한국의 효 사상은 십계명과 같은 의미가 있다는 말을 했는데 기독교의 효 사상과 한국의 효 사상의 차이점이 있다고 합니다. 동양의 효 사상은 어떤 면에서 맹목적인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부모는 어떤 경우에도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하는 일은 그대로 순종만 하는 것이지 함부로 의견을 제시하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불경죄에 속하는 윤리관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기독교 효 사상은 아비들에게 철저하게 책임을 줍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들 앞에서 책임 있게 살라. 이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리고 효도를 받을 수 있는 길이다.” 해서 부모의 책임을 동등하게 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옛날 우리 한국 문화에서 집안에서 전통적으로 지키는 10가지 예절이 있었는데 이 예절들을 지금까지 지키는 집안은 아마 제 생각에는 한 가정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어렸을 때는 이것을 지켰습니다. 첫째가 뭐냐 하면 문성이라고 해서 아침에 일어날 때 아들과 며느리는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 합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절을 하면서 인사를 합니다. 저녁에 잠들 때는 “안녕히 주무십시오.” 매일 365일 문성을 해야 합니다. 집안에 혹시 별식이 생기거나 과일이 처음 익은 것은 반드시 부모님이 먼저 시식을 해야지 그 자녀들이 먼저 먹었다가는 큰일 나는 법칙이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노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광 열쇠를 물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며느리들은 항상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언제 정권이양을 해줄 것인가? 광 열쇠를 언제 나에게 맡겨줄 것인가?’ 이것을 놓고 굉장한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디 출타를 하거나 돌아와서는 문중 어른들에게 반드시 보고를 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제 시절만 해도 군대 갈 때 온 동네 어른들에게 다 가서 큰절을 했습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서 군대 나가게 됐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어르신 안녕히 계십시오.” 마을 어른들 집에 모두 다니면서 일일이 큰 절로 인사를 드리고 제대하고 와서는 “잘 다녀왔습니다. 어르신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또 이렇게 인사를 해야 됩니다. 또 길을 가다가 노인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걸어갈 때도 노인이 앞을 지나갈 때는 서 있다가 노인이 다 지나가신 다음에 가야지 노인 앞을 걸어가면 큰일 납니다. 잔치 때는 연령 순서대로 상석에 앉습니다. 

또, 동네에서 돼지나 소를 잡으면 ‘배장’이라고 해서 내장은 똑같이 나눠서 마을 노인들에게 다 맛보시라고 공짜로 분배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모두 노인 공경 문화입니다. 부모가 늙게 되면 궁중의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도 지방으로 내려가게 해줍니다. 그래서 부모를 가까이 모시도록 하고 돌아가실 때가 되면 유급으로 휴직시켜서 봉양케 합니다. 국가가 계속 월급을 주면서 부모를 잘 모시라고, 그것이 국가 일이라고 하는 공경 문화가 있었고 나이가 회갑이 되면 고을의 현감이 오래 살았다고, 일 많이 했다고 상을 주었고, 70세가 되면 고희가 되었다고 감사가 상을 주었고, 100세를 살면 임금님이 상을 내려주었습니다. 

이렇게 노인 공경 문화가 훌륭했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도 3년 동안 조석으로 밥상으로 차려놔야 합니다. 돌아가셨지만 부모님을 위해서 항상 밥상을 차리는 문화가 있어왔는데 지금은 이런 것을 지키는 가정 하나도 없잖아요? 그래서 이 과정에서 많이 갈등을 겪은 겁니다. 지금은 이런 것을 하는 집이 오히려 더 이상해지는 그런 문화로 변했잖아요? 매일 식사를 한 방에서 같은 시간에 하지만 밥 먹는 예절도 절대적 법칙이 있습니다. 우선 부모님은 식탁이 다릅니다. 그래서 따로 따로 차려야 됩니다. 밥상에 놓인 반찬도 다릅니다. 뭐 한가지든 달라야지 부모님 식사 반찬 내용과 자식들 메뉴가 똑같으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부모님 식탁에 있는 좋은 반찬은 부모님이 뚝 잘라서 상 옆에서 내려줄 때 그때 맛을 볼 수 있는 문화입니다. 밥을 먹는 방법도 엄숙합니다. 어른보다 먼저 먹기 시작하면 큰일 납니다. 그리고 끝나는 시간도 어른이 먼저 수저를 놓으신 다음에 그때 끝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종족도 일생에 가장 좋은 때가 결혼하고 몇 년입니다. 그래서 허니문이라고 하잖아요? 우리나라 여인들의 경우 그 시절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지나야 겨우 숨을 돌리는 문화 속에서 우리 고려와 조선의 어머니들이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나온 노래가 있잖아요? “외나무다리 어렵대야 시아버지 같이 어려우랴 나뭇잎이 푸르대야 시어머니보다 더 푸르랴 뾰족 새가 시누보다 더하랴? 씨받이 돼지 미련한들 남편보다 더하랴 밭에 가면 바랭이 귀신, 논에 가면 거머리 귀신, 집에 오면 빨래 귀신, 먼동 틈이 원수 같고 하루해가 십년 같네 고초당초 맵다더니 시집살이 더 맵구나.” 이것이 우리 한국 며느리들의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의 삶을 사는 여인들이 그 고난의 현장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시간과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하나 생김으로서 이제 쉼을 얻게 되는데 바로 자식을 낳았을 때입니다. 자식을 낳게 되면 다 어려운 사람이지만 자식만은 자기 몫이 됩니다. 만약 며느리가 대청마루에 대낮에 버젓이 누워있어 보세요.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벼락을 칠겁니다. 그러나 그 누워있는 옆에 어린이가 젖을 물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쉬고 싶으면 어린이 다리를 꼬집어서 울려놓고 젖 준다고 누워버리면 그만입니다. 유일한 쉼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여인들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문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식을 빼앗기는 시간이 옵니다. 아들이 장가를 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여인은 허무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가 옛날에 받은 그 핍박을 새 며느리에게 퍼붓기 시작하는 악순환의 역사를 5천년동안 살아왔습니다. 이제 이러한 문화는 지금 살아있는 60대 후반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이 사회에서 없어질 것입니다. 어쩌다가 우리 주변에 어머니 이미지를 흐리게 하는 사건들이 좀 일어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한 사건이요 절대 다수의 대한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 이미지는 세계에 비춰진 것이 ‘희생적이다.’, ‘헌신적이다.’ 입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계셨고 사랑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셨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사랑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뭐라고 하느냐? 아가페라고 합니다. 바로 이 어버이의 사랑은 뭐냐? 아가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그림자가 되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버이 사랑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라고 어버이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지니고 있는 힘 가운데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세 번씩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다가 점심때가 되면 누구나 다 간단한 고민을 합니다. ‘오늘 뭘 먹지?’ 누구든지 그럽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먹을 게 얼마나 많습니까? 수백 가지의 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 몇 천원 가지고 나가면 양식 먹어도 되고 중국식, 일본식, 한식 어느 집에 가도 수백 가지 음식이 산더미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때가 되면 고민입니다. ‘오늘 또 뭘 먹으러 가냐?’ 거의 직장에 나가면 같은 말을 하면서 점심 식사를 합니다. 왜 그럴까? 또 사회에서 음식 만드는 사람들은 전문가들입니다. 거의 가 다 요리사 자격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그런 음식점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고민합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을 생각해 보세요. 메뉴도 항상 비슷합니다. 어머니는 요리학원에 다니는 법이 없습니다. 요리사 자격증도 없습니다. 그런데 평생 같은 음식을 같은 자리에서 먹어도 자기 집에서 밥 먹는 것을 질력 내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 인간이 그렇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이 교환되는 우리 식탁에서는 엔도르핀이 스스로 나와 반찬 하나 놓고 소박한 음식을 먹어도 괜히 맛있고 괜히 사랑스럽습니다. 인간이 최초부터 그렇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호텔이 얼마나 좋습니까? 깨끗하고 번쩍번쩍하고 경치 좋고 말할 수 없이 시설이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호텔 가서 한 달만 살아보세요. 지긋지긋해서 살지 못합니다. ‘언제 이 호텔을 빠져나갈 것인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일주일만 지나도 호텔이 지긋지긋합니다. 왜 그래요?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데…. 우리 집은 비록 오막살이 판잣집이라도 집에서 자는 것, 집에서 생활하는 것 진력내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 인간은 사랑의 분위기가 교환되는 곳에서 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본래 인간의 모습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마가복음 7장과 마태복음 15장에 예수님이 두로 지방 심방 가셨을 때 큰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헬라 혈통의 이방 여자 수로보니게 족속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길거리에서 막 울면서 소원을 말합니다. 이럴 때마다 제자들은 아주 기분이 나빴습니다. “예수여! 빨리 저 여자를 쫓아 보내소서. 계속 따라오나이다.” 제자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권위란 혈통적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우리 같은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지 너 같은 수로보니게 헬라 혈통은 관계가 없다. 그런데 왜 따라오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따라오게 허용했기 때문에 따라온 것입니다. “예수여! 보내소서.”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반응을 보고 “그래? 그러면 내가 한번 해볼 테니 너희들 어떤 반응인지 보겠느냐?” 

그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자존심 상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너 왜 나 따라오느냐?” 여기서 자녀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을 말하는 것이요 개들이란 바로 이 여자, 이방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길바닥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자의 자존심 짓밟히고 말았잖아요? 여인은 창피해서 얼굴을 붉히며 숨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고 물러나지 않습니다. 자기가 더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합니다. 

“옳소이다만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떡을 그 자녀들이 다 먹고 버려진 부스러기라도 있거든 내게 주옵소서.” 그랬을 때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봐라. 저 믿음을 봐라. 너희들이 쫓아버리라고 했지? 저런 믿음은 내가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면 그 여인은 왜 그렇게 자존심을 짓밟히면서 그랬을까요? 지금 예수님에게 얻고자 하는 은혜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녀를 위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길바닥에서 사람들에게 개 취급을 받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떠하든지 내 딸만 회복시켜 주십시오.”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소원 때문에 자존심을 다 짓밟히면서도 끝까지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뭐라고 그러셨어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랬더니 그 시로 귀신 들린 딸이 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자식을 위하는 어머니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버이 주일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인간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왔을 때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침 뱉고 욕하고 때리고 죄수로 만들어 사형장으로 끌고 가며 저주하고 핍박하며 촌사람이라고 무시하며 직업이 천하다고 멸시했으며 출신 고장이 빈민굴이라고 했으며 시장 바닥에서 별스런 대우를 다 했지만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인류 구원해야 되는, 바로 내 자녀들의 영혼을 회복시켜야 되는, 그래서 그 모든 천대가 문제가 되지 않으신 겁니다. 나중에는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 자녀들을 위한 일이라면 십자가에 달려 죽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런 아가페적 하나님의 사랑을 어디에서 배울 수 있는가? 가장 가까운 그림자가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어버이주일을 지키는 겁니다. 

여러분은 3만3천리의 뱃길 이야기를 아십니까? 1962년 2월 10일 여수에 있는 남초등학교 졸업식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졸업식장에서 회색 스웨터에 검은 낡은 바지를 입은 한 여인이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모범 어머니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섬에는 전체 인구가 20명입니다. 학교가 없습니다. 교육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 어머니의 딸이 초등학교 입학 시기가 되었을 때 ‘내 딸은 나와 같이 살게 할 수가 없어.’ 그 섬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딸을 육지 학교에 입학시킨 것입니다. 남편도 말리고 동네 사람도 “이 섬에서 매일같이 육지 학교를 어떻게 다니느냐? 교통편이 하나도 없는데….” 

그러나 어머니는 고집 피워서 입학시켰습니다. 뱃길이 수십 리입니다. 6년 동안 아침, 저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에 어린 딸을 태우고 자신이 노를 저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를 육지에 내려놓고 뱃머리를 돌릴 때 둘은 한없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데리러 가는 길이 너무 늦어져서 아무도 없는 바닷가 달빛 아래서 엄마를 기다리며 울고 있는 딸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서 6년 동안 날마다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섬에는 시계 가진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그 어린 아이는 지각 한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6년 동안 그 뱃길을 계산하니까 3만3천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3만3천의 어머니’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우리 한국 기독교 초기 선교사 게일 박사의 글에 “대한민국이 그 많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이렇게 건강한 가정 문화를 지킨 이유는 조선의 어머니들이 헌신이다. 조선 어머니들의 헌신 때문에 이 나라의 가정은 튼튼하게 지켜져 왔고 이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된 것이다. 그들은 정말 희생의 여인들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게일 박사가 말한 조선의 어머니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한번 보시겠습니다.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여름 뙤약볕을 머리에 인 채 호미 쥐고
   온종일 밭을 매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고된 일 끝에 찬밥 한 덩이로 부뚜막에 걸터앉아
   끼니를 때워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꽁꽁 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해도 
   그래서 동상 가실 날이 없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난 괜찮다, 배부르다, 너희들이나 많이 먹어라
   더운 밥, 맛난 찬, 그렇게 자식들 다 먹이고
   숭늉으로 허기를 달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가 죄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고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게 닳게 문드러져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술 좋아하는 아버지가 허구한 날 주정을 하고
   철부지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외할머니 사진을 손에 들고
   소리 죽여 우는 엄마를 보고도
   아! 그 눈물의 의미를 이 속없는 딸은 몰랐습니다.
   내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낡은 액자 속 사진으로만 우리 곁에 남았을 때
   비로소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인 줄을 알았습니다.
   엄마는…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 우리의 어머니! 기도하겠습니다.

「 저희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를 주심으로 가정이라는 따뜻한 사랑 안에서 성장하게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다 또한 그런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대한민국의 거룩한 가정 문화를 하나님이 지켜주시옵소서. 이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는 하나님의 은총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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