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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람을 꾸짖으신 예수님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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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꾸짖으신 예수님 (막 4:35~41)  


예전에 안식년을 맞이해서 ‘하와이 코나열방대학’에 가서 3개월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주말, 토요일에 해야 할 일을 다 했기에 그날은 좀 쉬기로 했습니다.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캡틴큐’라고 하는 바닷가가 있는데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사람과 용기를 내서 코나에서 한 30분 떨어진 그곳까지 차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캡틴큐’라는 곳은 원래 원주민들이 살던 이곳에 미국 상선이 처음 들어온 지점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바다도 잔잔하고 깨끗해서 스노클링을 많이 하는 곳이랍니다. 길쭉한 보트를 타는 ‘카누’를 타고 한참 노를 저어서 들어가면 물이 맑고 휘황찬란한 고기가 많은 곳이 나옵니다. 물안경을 쓰고 물속에 들어가 보면 물속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전 사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제가 수영을 잘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사람도 수영을 잘 못합니다. 하지만 다들 좋다니까 구경하고 싶어서 용기를 내었습니다. 갈 때는 햇빛이 있고 날씨도 청명하고 남들도 많아서 안심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빨리 가자고 했지만, 집사람이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 새는 줄 모른다.’고 좀 더 하자는 겁니다. 좀 더 보자는 겁니다. 이왕 왔는데. 저는 불안해 죽겠는데 말입니다. 나이가 50이 넘으면 남자들은 소심증에 걸리고 여자들은 대범증에 걸려서 겁을 모른답니다. 그러다 제가 해삼에 발을 찔려서 다치고 나서야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많이 늦었습니다. 어두워지기도 하고, 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 가버리고 없었습니다. 출발지점까지 다시 카누를 타고 가야하는데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가 오고 점점 바람도 불었습니다. 저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헤엄도 못 치는 목사가 코나에 와서 실종사하는게 아닌가?’ 걱정되었습니다. 이제 웃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떨었는지 모릅니다. 밑을 보니 물결이 출렁되는데 캄캄합니다. 가끔 고래가 나타난다는 소문때문에 정말 긴장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집사람도 전혀 긴장하는 빛이 없습니다. 결국 무사히 잘 도착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그러나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그 때의 추억이었습니다.

바다라는 곳은 모두가 동경합니다. 여름이 되면 바닷가에 가서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모두가 바라고, 이야기만 해도 시원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또한 바다는 위험하기도 합니다. 여름이 지나고 나면 늘 바다에서 실종되는 사람들, 죽는 사람들이 꼭 몇 명씩 생깁니다. 갑자기 풍랑을 맞아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또 배가 뒤집히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바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피곤한 가운데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건너편 거라사지방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 때가 마침 저녁이었습니다. 아주 어두워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이 갈릴리호수, 워낙 커서 갈릴리바다라고 불리는 이 지역이 아주 특이합니다. 다른 지중해바다 표면보다 이 갈릴리 바다는 약 200M 내려와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주 특수한 기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갈릴리 호수에 성지순례를 가보면 아주 날씨가 변덕스럽습니다. 아침에 해가 났는데 금방 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오거나 풍랑이 일어서 배를 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도 그 배를 타고 건너가십니다. 예수님은 너무 피곤하셔서 뱃고물에서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폭풍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보통 풍랑이 아니라 큰 광풍이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집채만 한 물결들이 마구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것이 배와 부딪히고 배 안으로 물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웬만한 풍랑 정도에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아주 겁이 먹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 풍랑 앞에 속수무책,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그 풍랑을 향해서 바람을 꾸짖고,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령하셨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 풍랑 이는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그걸 보고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아니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생명체를 보고 명령하거나 꾸짖는 것은 말이 되지만 이 바람과 바다가 어디 귀가 있습니까? 거기에 대고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했더니 그렇게 고요한 바다로 변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냐?”하시면서 그들의 믿음을 힐난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오늘 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자고 제안하신 분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야! 우리 배타고 저 갈릴리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방으로 가자.” 물론 거기에 가면 지난주일 묵상했듯이 귀신 들린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그 사람을 염두에 두고 가자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가자고 제안하셨습니다. 또 그 배에는 누가 타고 있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정리해보십시다. 예수님이 가자고 해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배에 타고 계시는데 어찌 이런 풍랑이 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늘 갖는 의문입니다. 처음에 예수 믿을 때는, 전도할 때 보니까 예수만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다고 했는데, 예수만 믿으면 병도 안 걸리고, 고난도 없고 다 잘 된다고 그랬는데, 실제 믿어보니까 이게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여기에 많은 분들이 시험에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를 믿어서 우환이 많던 가정이 깨끗하게 변하고 가정에 행복이 찾아오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 밀려오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가 빨리 응답이 되지 못해서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정말 이런 고통 가운데서 제자들이 고민하고 괴로워할 때 예수님은 잠만 주무시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밀려오는 풍랑과 평안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어쩌면 예수님 앞에 부르짖고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고통당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편 1절에 보니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이런 시편 기자의 절규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 환난 당할 때 주님 어디 계셨습니까? 내가 고난당할 때 주님 내 부르짖음을 왜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안타까움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을 정확하게 따지고 보면 이 배에서 주무시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주무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은 깨어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어떻게 풍랑의 위기 속에서 헤쳐 나가는가를 주님은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은 정말 이것을 모르실까?’ 아닙니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인간의 힘으로 다 해보지만 해결할 수 없을 때는 결국 주님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다.’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안 될 때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움의 손을 펼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분명히 고난 후에 오는 축복이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연단과 고난을 통해서 그가 더 성숙되고 더 아름다운 믿음으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인생의 풍랑을 만나지만 망하는 법은 없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하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 배에 함께 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입을 벌리고 다가오는 풍랑 앞에 결국은 다 침몰할 것 같지만 침몰하지 않습니다. 그런 위험은 목도하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그들을 위기 속에서 건져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고난 후에 축복이 더 큽니다.

요즘처럼 비가 많이 오면 홍수가 나기도 합니다. 예전 제가 살던 시골 동네에도 앞에 큰 강이 있었는데 보면 붉은 물이 지나갑니다. 때론 밭들이 침수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낚시를 좋아하는 분들은 망을 들고 나옵니다. 투망을 던지면 그렇게 고기가 많이 잡힙니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큰 장화를 신고, 그물을 던지면 쏘가리, 뱀장어, 메기, 잉어 등 가득 잡습니다. 홍수가 나면 이 강바닥을 한번 뒤집어엎습니다. 그러니까 고기들이 다 몰려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가 고기 잡기가 좋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인생에도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서 더 좋은 일을 예비하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련당할 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 인생에도 풍랑이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에게도 풍랑이 있습니다. 여러분! 욥을 보십시오. 욥은 동방의 의인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잠시 환난이 있었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자년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육체의 병까지도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끝까지 붙들어 주십니다. 마지막에 욥을 다 회복시켜주시는데 그가 곱절의 복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도 풍랑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재밌는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명절에 시골집에 다녀왔답니다. 그런데 손님이 왔다갔는데 그 손님이 도둑놈이었습니다. 온 집안을 다 뒤엎어놨습니다. 아이들은 무서워했지만, 뭐 목사님 댁에 가져갈게 별로 없어서 청소만 좀 하고 정리했습니다. 목사님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기분이 좀 언짢을 뿐이지. 그래서 어떤 모임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내가 명절에 시골에 다녀왔더니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심각해졌답니다. ‘어떻게 목사님 댁에 도둑이 들을 수 있나?’ 여러분! 목사님 집에도 도둑이 들을 수 있습니다. 장로님은 늘 사업만 하면 다 성공할까요? 장로님도 망할 때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이런 금융위기가 오면 물론 피해가면 좋지만 우리 교인들도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업이 어려움 당하고, 부도가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 비가 오면 안 믿는 사람들만 비 맞습니까? 믿는 사람도 다 비 맞습니다. 우박이 치면 예수 믿는 집사님의 머리는 피해갑니까? 다 똑같이 내려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를 아주 넘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일으켜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피할 길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집사님 가정에도, 권사님 가정에도 아픔이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목회자 가정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실 줄 믿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 야고보서 1장에 보니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이로 인하여 내가 오히려 인격이 성숙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만약 불 시험을 당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불 시험 후에 더 좋은 축복의 때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에게 늘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 믿는 신자라면 고난이 와도, 풍랑이 와도 오히려 그것이 축복의 기회가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재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오면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기회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의 풍랑 속에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그 배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배에 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예수님이 그 배에 타고 계신다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풍랑이 일고 있어도 배는 출렁거리지만 결코 배는 침몰되는 일이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신다면 그 풍랑은 반드시 멎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인생의 항해라면 반드시 목적지, 소원의 항구에 도착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풍랑이 불어와도 주님이 내 배에 계신다면, 우리 가정에 좌정하고 계신다면, 내 심령의 주인으로 계신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 한시도 눈을 떼는 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보호와, 주님의 감찰하심과, 주님의 인도하심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조건이 있습니다. 인생의 풍랑을 이기기 위해서는 제자들이 부르짖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풍랑을 당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하시 바랍니다. 예레미야 33장에 보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을 우리 앞에 전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면 어떤 풍랑이 몰려와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향하여 부르짖을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할 때 반드시 주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제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풍랑을 향해서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했다는 것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도 고요히 주무시고 계셨는데 제자들이 흔들어 깨웠습니다. “주여 우리가 다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를 왜 돌아보지 않습니까?” 원망 투였을 것입니다. 좀 섭섭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흔들어 깨우니까 예수님이 그때서야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38절, 39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저는 이 바람을 꾸짖었다는 표현이 너무 재밌습니다. 여러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말을 안 들으면 꾸짖습니다. 또 아이들이 좀 말을 안 들으면 꾸짖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람을 향해 꾸짖을 수 있는가? 참 신기합니다. 지나가다가 고목나무가 말 안 듣는다고 고목나무에게 꾸짖습니다. “야 이놈아! 내 말 안 들을래?” 우리는 인격이 있는 것들에게는 그럴 수 있습니다.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놀랍게도 바람을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 이 꾸짖었다는 표현은 주로 귀신을 향해서 꾸짖었다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악한 영을 향해서 주님이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주석가들에 따르면 바로 이 풍랑 이는 물결, 이 광풍의 배후에는 악한 사탄과 악한 영들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고 추측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당할 때는 물론 우리가 잘못해서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통사고 나는 것 보면 교통법규를 안 지켜서 큰 사고를 만날 수 있습니다. 위험하게 운전하다가. 그러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가오는 풍랑이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바로 악한 영의 실체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모든 고통이 다 악한 영의 의해서 일어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수많은 인생의 고난과 고통들이 악한 영에 의해서 일으켜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좌절시키고, 나를 낙심시키고, 주저 않게 만드는 배후에는 악한 영들의 역사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 실체를 알기 때문에, 아마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서 이제 군대귀신 들린 자, 거라사 지방의 한 사람을 구원하실 것을 악한 영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길을 막기 위해서 거대한 풍랑을 일으켰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그 바다를 향해서, 바람을 향해서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랬더니 그 순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 바다가 잔잔한 바다로 변화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그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도대체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우리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움직이는 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 온 우주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본문에 보면 이 자연을 정복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넘어가서 5장 첫 부분에 보면 우리가 지난주에 묵상했던 거라사 지방의 한 귀신 들린 사람을 치료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군대귀신을 내어쫒으시고 그 군대귀신이 2천 마리의 돼지 떼들에게 들어가서 돼지 떼가 다 몰살해 버렸습니다. 악한 영 귀신들을 정복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다음 본문 5장 중반부에 보면 열 두해 혈루병 앓는 여인이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옷깃에 손만 대도 병이 나을 것 같은 믿음이 있어서, 와서 옷깃에 손을 댔더니 혈루의 근원이 말라버린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서는 질병을 정복하신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서 마가복음 5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열두 살이 되었는데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셔서 “달리다굼”하고 말씀하시니까, “소녀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럴 때 그 죽은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자연을 정복하시고, 귀신을 정복하시고, 질병을 정복하시고, 그리고 죽음을 정복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 저와 여러분의 구주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제 예수님처럼 그 권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뭘 좀 얻을까 구걸을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하고 명령하자 이 앉은뱅이가 다리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걸으며 뛰며 하나님을 찬양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했더니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질병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풍랑이 몰려올 때, 경제적인 풍랑이 몰려올 때, 질병의 풍랑이 몰려올 때,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명령하셔야 합니다. “파도여 잠잠하라. 고통아 잠잠하라. 고통은 해결될지어다.” 여러분! 믿음으로 명령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40절, 41절 같이 읽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제자들은 아직 여기까지도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이고 하나님인 것을 몰랐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아! 이 분이 메시아구나.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저 분이 과연 누구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을 아직도 좋은 선생님으로, 공자 맹자와 같은 반열에 두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정말 우리 인생의 구주이시고 생명의 주인으로 예수님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이 풍랑 기사의 문제는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왜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인생에는 늘 풍랑이 있습니다. 고난도 있습니다. 햇빛 나는 날도 있지만 요즘처럼 이렇게 게릴라성 호우가 쏟아지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구주되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면, 그분이 나를 돌보고 계신다면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극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약해서 살다보면 환경에 의해서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건강 때문에, 사업 때문에, 자녀들 때문에, 인간적인 어떤 갈등 때문에, 때로는 정신적인 공허함 때문에 의심이 들고 믿음에 회의가 생길 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한번 구원받은 구원은 결코 취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합니다. 그보다 더 강한 것이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칼빈의 교리 중 영원한 안전의 교리, 견인의 교리라고 합니다. 한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절대로 그것은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불꽃과 같은 눈길로 여러분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때로 우리가 열심을 다할 때도, 때로 게으를 때도, 때로 방황할 때도 주님은 긍휼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교독문 고린도후서 4장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넘어지나 아주 망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작가 중에 ‘렐리아 모리스 여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50세부터 눈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52세에 완전히 시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찬송가를 작사하고 작곡했습니다. 그는 믿음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모리스 여사님! 힘들지 않습니까? 피곤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 받을 때마다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영원하신 팔이 저를 붙들고 계시는데 어찌 피곤할 수 있습니까?” 영원하신 주님의 팔이 그녀를 붙들고 있다고 그는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찬송가 406장을 아시지요? 예전 찬송은 464장입니다.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바로 이 찬송은 ‘모리스 여사’의 간증이고 그녀의 찬송입니다. 포구에 정박한 배가 아무리 풍랑이 몰려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저 깊은 바다 속에 그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주님께서 우리 인생의 배에 타고 계신다면, 그리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면 어떤 풍랑도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풍랑 속에서도 결코 우리가 탄 배는 침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 자연을 정복하신 주님,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명령하시는 그 주님을 전적으로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고해와 같은 인생의 바다, 이 항해에서 오늘도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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