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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 바울의 우회 (행 1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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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우회 (행 16:6~10) 
 
 
❚복음의 유럽 상륙

몇 년 전 성지순례를 갔을 때 그리스의 ‘까발라’(Kavalla)라는 도시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까발라,’ 이름이 좀 이상하지요? 현재 이 까발라는 인구 약 8만 명의 자그마하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입니다. 이곳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면서 밤중에 그 아름다운 항구를 거닐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이 작은 항구도시는 기독교 역사 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까발라가 바로 사도 바울이 유럽에 최초로 발을 들여 놓은 항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1절에는 ‘네아볼리’(Neapolis)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성지순례를 가보면 옛날 이름과 다른 이름을 쓰는 도시들이 많습니다. 이 까발라에 가보니 사도 바울이 처음 상륙하던 때의 유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리스 정교회가 세운 ‘바울 도착 기념교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교회 정면에는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선교의 방향을 바꾸어 네아볼리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장면이 커다란 그림으로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낡은 돌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가이드가 하는 말이 이 돌은 당시 사도 바울이 네아볼리 항구에 발을 들여놓을 때 처음 디뎠던 돌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참 감회가 깊었습니다.

이 작은 항구도시가 중요한 것은 그만큼 사도 바울의 유럽 상륙이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회심하여 목숨 걸고 복음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소아시아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주로 선교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성경 뒤에도 지도가 나오겠지만 사도 바울은 1차, 2차,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했는데 주로 안디옥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전도여행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을 파송한 파송교회가 안디옥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조영태 조미경 선교사님을 파송한 주파송교회인 것처럼 안디옥교회는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하려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치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등반대가 적절한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그 베이스캠프를 기점으로 정상정복을 시도하는 것처럼 자신을 파송한 안디옥교회를 선교의 베이스캠프로 생각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선교여행을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사도 바울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소아시아 지역만 선교하자는 것입니다. 그가 전도하려고 했던 아시아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전체는 아니고 ‘소아시아’(Asia Minor)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터키 지방입니다. 선교학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은 주로 대도시 중심의 선교를 했는데 당시 상황에서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전 세계에 수많은 선교사가 나가 있고 우리나라만 해도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나라기 때문에 이 수많은 선교사들이 세계 각국 구석구석 오지까지 찾아가 복음을 전합니다만 사도 바울 당시는 선교사라야 고작 최초의 선교사라 할 수 있는 바울과 바나바 정도뿐이었으니 이 몇 사람이 그 넓은 소아시아 땅을 다 전도하기도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생각해 낸 것이 “어떻게 하면 최단시간 내에 최대의 선교효과를 낼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도시에 가서 선교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로 소아시아 각 주의 수도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선교를 했던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이 가장 중요한 목적지로 삼은 곳은 바로 에베소라는 도시였습니다. 신약에도 에베소서가 있지요? 어떤 분들은 아이 못 낳는 엄마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이 구약의 아가서와 신약의 에베소서라고 농담도 합니다만 이 에베소서가 바로 에베소라는 도시에 있는 교회에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인 것입니다. 당시 에베소라는 도시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도시였습니다. 

저도 참 감사하게도 이 에베소에 두 번이나 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지금도 이 에베소 유적에 가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다 쇠퇴해서 보잘것없는 시골마을로 전락했지만 로마가 이 지역을 지배할 때는 이 에베소를 아시아 주(州)의 주도(州都), 즉 주의 수도로 삼아 완전 로마식의 초대형, 최신식 도시로 개발했던 것입니다. 당시 지중해에서 가장 발달하고 번창한 도시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에베소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 에베소를 집중 공략해서 선교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지요. 이 당시 사도 바울이 정한 선교전략 두 가지는 너무나 적절한 방법이었습니다. 일단 다른 곳은 바라보지 말고 소아시아만 집중해서 선교하자, 그리고 인구가 많이 모이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하자, 이 두 가지 전략 말입니다. 정말 좋은 계획입니다.

❚길을 막으심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렇게 좋은 계획인데도 사도 바울의 전략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분명 좋은 선교전략이고 문제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안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님이 사도 바울의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과 7절을 다시 한 번 읽읍시다.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성령께서 2차 선교여행 중인 사도 바울의 길을 두 번이나 막으십니다. 먼저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나 아시아, 여기서 ‘아시아’는 아시아 주(州)를 뜻합니다만 이 아시아 주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바울은 앞서 말한 것처럼 아마도 아시아 주의 주도인 에베소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막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막으신 방법은 잘 모르나 환상을 보았을 수도 있고 환경 때문에, 이를테면 유대인들의 방해 등의 상황이 일어났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바울은 성령이 막으신다는 것을 깨닫고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갈라디아 주의 브루기아와 무시아 지방을 통과해 비두니아로 가려고 합니다. 어쨌든 계속 소아시아 지역에서만 복음을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성령이 막으십니다. 

역시 자세한 방법은 모르지만 성령께서 이번에도 막으신 것입니다. 이때쯤 사도 바울은 고민했겠지요. “왜 내 선교계획을 성령이 두 번이나 막아 내 뜻대로 못 하게 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시아 지방을 지나 드로아라는 항구도시에 머물게 됩니다. 거기서 대기하면서 뭔가 성령님의 지시를 기다리려 했던 모양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은 간혹 일어납니다. 내가 계획대로 가려고 하는데 모든 환경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분명 기도하고 하는 일인데, 아무리 봐도 크게 잘못된 계획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뭐가 잘 안 되고, 자꾸 일이 꼬이고, 환경이 어려워지는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럴 때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럴 때 영적으로 예민해져야 합니다. 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입니까? 혹시 하나님의 뜻이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일이 꼬인다고 해서, 상황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해서 무조건 다 하나님이 막으시고 성령님이 막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우연히 일이 잘 안 되거나 내가 무슨 실수를 해서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일이 잘 안된다고 성령이 막으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럴 때 더욱 영적으로 예민해지고 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건이 고장 났을 때 정확한 원인을 알아야 고칠 수 있는 것처럼 일이 꼬이고 문제가 복잡해 질 때 정확한 원인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예민한 가운데 기도해보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아, 이건 우연히 일이 잘 안 된 것뿐이구나, 하나님이 막으신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실수해서 이렇게 된 거로구나.” 혹은 “아, 이건 분명 하나님이 막으신 거다, 성령님이 막으시는 거다, 하나님께서 내가 가려는 길 앞에 우회 표지판을 세우고 ‘이 길은 아니다, 다른 길로 돌아가거라’ 하고 명령하시는 거로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럴 때 조심해야 합니다. 분명 하나님이 막으시는 상황인데도 무조건 고집 부리며 내 뜻대로 관철하고 강행하려 들면 반드시 큰 일이 생깁니다. 더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우회(迂廻)로구나, 성령님이 막으시는구나 하고 깨달아지는 즉시 사도 바울이 드로아라는 항구도시에 가서 대기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린 것처럼, 우리도 잠시 길을 멈추고 대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주여, 그렇다면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언제나 바른 길을 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아주 중요한 방법입니다.

❚환상을 보여주심

두 번째로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가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두 번이나 성령님이 막으시자 드로아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과연 성령님의 분명한 지시가 내려옵니다. 밤중에 환상을 보는데 아마 꿈속에서 본 환상이겠지요. 마게도냐, 즉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난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지방(지금도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있지요) 사람 하나가 환상 속에 나타나 바울에게 요청합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보다 더 분명한 계시가 어디 있습니까? 너무도 생생히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꿈속에 나타난 사람의 생김새나 옷차림을 보고 마게도냐 사람이라 생각할 정도로 아주 생생하고 분명히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환상이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지체하지 않고 복음 들고 바다 건너 유럽 땅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유럽에 상륙한  항구가 네아볼리, 오늘날의 까발라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또 한 번 중요한 순간이 이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막으신다고 생각될 때 영적으로 예민해져서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사도 바울처럼 꿈이나 환상을 통해 보여주실 때도 있지만 이런 신비한 방법보다는 대개 사람을 통해(대화나 충고 등), 말씀을 통해(설교나 성경 읽기 등), 혹은 환경의 변화 등을 통해 우리에게 뜻을 보여주실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면 어떻게 하나? 물론 분명한 정답은 없습니다만 기도하며 영적으로 예민해지면 거의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해보았습니다만 거의 구분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할 때 반드시 그 뜻에 순종하고 바울처럼 지체하지 말고 즉시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의 순종을 통해 복음은 드디어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이 때 복음이 유럽으로 안 넘어가고 바울의 계획대로 소아시아에만 머물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바울이 성령님이 막으시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거나 환상을 본 후에도 개꿈이라며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소아시아에서만 선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복음과 기독교는 머지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왜 이런 추측을 하느냐? 성지순례 가서 터키에 가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은 오늘날의 터키 지방이라고 했지요? 터키에 가보면 기독교 건축의 최고의 걸작이라고 하는 소피아 대성당을 비롯해 수많은 교회와 기독교 유적이 남아있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비롯해 가는 곳마다 찬란한 기독교의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목숨 걸고 전도해서 교회를 세운 이래 수천 년 기독교의 찬란한 역사를 가진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이슬람의 땅입니다. 물론 아직도 기독교인들은 남아있지만 극소수입니다. 본인들은 이슬람이 국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전체 인구의  99.8%가 이슬람이고 그리스도인은 불과 10여만 명에 불과합니다. 지금 남아있는 찬란한 기독교유산은 터키 정부에게는 수많은 성지순례객들을 유치해서 짭짤한 돈벌이를 하는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복음이 사라진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터키에 성지순례를 가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바로 그 때,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았을 때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고 순종하여 유럽으로 건너가지 않았다면 복음은 이 지방에만 머물렀을 것이고 나중에 이 찬란한 기독교 유적, 그러나 자취만 남은 유물들처럼 기독교는 결국 몰락하고 이슬람의 땅 속에서 사라져가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둘째로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간 복음은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들어가고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국교가 된 후 유럽 각국으로 퍼져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러다가 청교도들에 의해 복음이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전해지고 드디어 미국과 캐나다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이 또다시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 조선 땅에 들어와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때 사도 바울에 의해 복음이 유럽에 건너가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도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우회명령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이 환상을 보고 그리스로 건너간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앞서도 설명했지만 우리 인생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그때마다 우리는 영적으로 예민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의 길을 막으신 것인가? 그렇다면 왜 막으셨을까? 무슨 뜻이 있으신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길을 막고 다른 길로 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회명령(迂廻命令)입니다. “이 길은 아니다, 물론 네가 보기에는 좋은 길 같고 맞는 길 같지만 내 뜻은 이 길이 아니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 길도 괜찮아 보이는데 하나님이 막으실까요? 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더 좋은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당시는 깨닫지 못해도 나중에 지나고 보면 반드시 하나님은 더 크고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잘 이해가 안 되고 속상해도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씀합니다. 양은 고집 세고 우둔해서 가만 놔두면 제멋대로 갑니다. 그러다가 웅덩이에 빠지거나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사자 같은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이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고 인도합니다. 시편 23편 말씀처럼 양들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제멋대로 가는 양이 있을 때 길을 막기도 하고 막대기로 툭툭 치면서 몰아갑니다. 

정 말 안 들으면 막대기로 때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말 안 들으면 사나운 양 몰이 개(여기서 shepherd라는 개 이름도 나왔습니다)를 시켜 몰아오기도 합니다. 그때는 양들이 이해 못 하지요. 목자가 왜 내 맘대로 못 가게 하는지, 왜 때리기까지 하고 개까지 풀어 나를 몰아가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이윽고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에 도착하면 그제야 “아, 다 이런 뜻이 있어서 나를 몰아 온 것이로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고집대로 간 양은 어떻게 될까요? 길을 잃거나 사나운 사자의 밥이 되겠지요.

하나님은 또한 발람 선지자의 길을 막기도 하셨습니다.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이 모압 왕 발락이 보낸 관리들의 거듭된 요청과 그들이 가져온 많은 예물 때문에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 보니 타고 가던 나귀가 갑자기 멈추어 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서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도 주인도 저 칼에 맞아 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도 주인 발람 선지자는 이 칼을 빼든 사자를 못 보고 애꿎은 나귀만 채찍으로 지팡이로 때리면서 왜 안 가냐고 닦달합니다. 돈에 눈이 멀어서, 황금에 눈이 어두워 못 본 것입니다. 답답하다 못한 나귀가 입을 열어 사람처럼 말합니다. 나를 왜 때리냐고, 주인님 눈에는 저 사자가 칼을 빼든 것도 안 보이냐고 말입니다. 선지자라는 사람이 나귀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의 길을 막으십니까? 발람처럼 돈이나 명예나 세상 욕심에 눈이 멀어서 가지 말아야 할 길, 멸망의 길을 갈 때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나귀의 입을 열어서라도 우리의 길을 막으십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혹은 환경을 통해 우리에게 이 길이 아니라고 경계하고 막으십니다. 못 보고 못 알아들으면 끝입니다. 또 양처럼 각기 제 고집대로 제 가고 싶은 대로 갈 때 막으십니다. 

그 길은 멸망의 길인데도 제 뜻대로 가겠다고 고집합니다. 하나님은 안 되면 때려서라도, 그래도 안 되면 개를 풀어서라도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개는 원수나 환난이나 실패를 뜻하겠지요. 문제는 이렇게 얻어맞고도, 개에게 물린 후에도, 실패와 아픔을 경험한 후에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마이 웨이(My Way), 내 길로 가겠다고 우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앞에는 멸망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경험을 통해 때로 우리의 길을 막고 돌아가라고, 다른 길로 우회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길을 막으실 때 빨리 알아채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다음에는 무조건 즉시 순종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그 길에는 반드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준비되어 있고, 반드시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과 축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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