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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하지 말라 (마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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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지 말라 (마 7:1~7)   
                        

사람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감옥은 자기도취의 감옥입니다. 나르시즘, 공주병, 왕자 병에 걸리면 정말 못 말리지요. 둘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셋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절망합니다. 넷째 감옥은 과거 지향의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합니다.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 떡의 소중함은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 봅니다. 여섯째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집니다. 사람이 6가지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는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지 이 시간 각자 자신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악습에 대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걸핏하면 율법과 자신들이 만든 종교적인 계율로 이웃을 비판하고 정죄하던 풍조가 만연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비판 풍조에 물든 악습을 버릴 것을 본문을 통해서 강조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병든 심리와 병든 인격의 소유자들이 내품는  악풀의 독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모릅니다. 비판의 독기가 하늘에 사무치는 이 악한 시대에, 비판에 대한 주님의 교훈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먼저 1절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고 하면, 말씀의 본뜻에서 아주 멀리 이탈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비판이나 판단을 하지 않아야 한다면, 신자들은 그야말로 맹목적이고 무지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씀하는 비판이란, 모든 분별이나 판단을 의미하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마 7장에서만도 주님은 우리가 지혜롭게 분별하고 판단해야 할 것을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13-14절에서 좁은 문과 넓은 문을 분별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교훈하셨고, 15절에서는 거짓 선지자와 참선지자를 분별할 것을 교훈하셨고, 24절 이하에서는 건축의 기초에 있어서 모래와 반석을 잘 분간하여 지혜로운 인생 건축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씀하는 비판이란 건전한 비판까지도 금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비판하지 말라는 본문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견해가 있습니다. 칼빈은 “우리 모든 자에게 공통적인 병폐를 고치고자 하신 것”이라 하였고, 벵겔은 “정확한 지식과 사랑과 필요성이 없이는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했으며, 스타이어는 “네 자신이 심판을 받지 않고 용서를 받았으니, 이와 같이 남을 대하라”는 뜻이라고 했고, 마이어는 “네 자신 남의 심판관이 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비판하지 말라는 본문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비평하고 정죄하는 것을 금하신 것입니다. 

비판이란 단어는 원어로 ‘크리네테’ 라고 하는데, 그 뜻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곧 재판관이 재판 석에 앉아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결정적이고, 후회가 없고, 전혀 오류가 없고, 완벽하고, 그리고 마지막인 최후의 판단과 형벌을 가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어진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 판단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법대생들이 법조인의 자세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언급 되는 분이 고 김홍섭 판사라는 분입니다. 

이 분은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고 판단한다는 일에 항상 회의를 느꼈다고 합니다. 이 분이 판결을 내릴 때에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당신이나 나나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대한민국의 법관이 되어 당신을 재판하게 되었으니 널리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김홍수 판사의 말대로 올바른 비판은 오직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비판을 우리 인간들이 서슴없이 하는데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올바르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 상대방이 모두 틀리고 잘못했다는 자세를 취할 때가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1. 비판은 비판의 악순환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비판한 사람에 대해 반드시 비판할 기회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비판은 비판을 낳고, 비판은 또 다시 비판을 낳는 악순환의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옛 시인은 “말하기 좋다하고 남의 말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하는 것이,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고 다짐하였습니다. 

2. 비판하는 사람들은 배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지기 쉬운 고질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판이 가진 심리적 배타성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축복을 전하여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비판을 일삼는 사람은 편협하고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어서, 다른 사람의 좋은 충고를 받아들일 정신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의 발전과 향상을 기대할 수없게 되고, 따라서 축복을 놓쳐버리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3. 비판하는 사람은 올바로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인간관계의 단절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단절과 부자유함은 곧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부자유함을 가져오고 맙니다. 마 5:23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했습니다. 

인간관계의 단절과 부자유스러움은 분명히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지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벧전 3:7에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남편과 아내가 한바탕 싸움하고 나면 기도가 잘 됩니까? 안됩니까? 이렇게 인간관계의 단절과 위기와 불편함은 우리의 기도생활을 크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4. 비판하는 사람은 심판대에서 그 자신이 비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여기에서 “비판을 받을 것이요” 라는 말씀은 미래형으로 쓰여 졌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비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인데, 이것을 어떤 주석가는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 장면으로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 법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일 것입니다. 그런데 약 2:13을 보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비판을 삼가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비판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1)들보와 같은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3절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을 나무란다.’는 격언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반성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만 돌려 원망한다는 속담입니다. 자기 눈에는 들보가 있는데,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겠다고 하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어이없고, 얼마나 한심하고, 얼마나 미련한 짓입니까? 헬라 인들의 이야기 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사람은 두 개의 자루를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하나의 자루는 앞에 달고, 다른 하나는 뒤에다 매달고 다니는데,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집어넣고, 뒤의 자루에는 자신의 허물을 집어넣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뒤의 자루에 있는 자기의 허물은 보이지 않고, 앞 자루에 있는 남의 허물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루의 위치를 바꾸어 달아야 합니다. 곧 앞 자루에는 나의 허물을 담고, 뒤의 자루에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담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허물이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사마리아인의 허물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하늘에서 당장 불을 내려 사마리아인들을 멸해 버리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을 냉대한 사마리아인들의 허물은 티라고 한다면, 그들을 모두 불 태워서 죽여 버리기를 원하는 제자들의 허물은 들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철 없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며 꾸짖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이 같은 들보가 없습니까? 

2)다른 사람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대속의 종교입니다. 대속이란 말은 대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를 이해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나폴레옹 황제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몇 사람의 병사를 거느리고 언덕  길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 때 농부 한 사람이 짐을 지고 올라왔습니다. 짐을 지고 올라오는 농부는 황제에게 길을 비켜 주지 못했습니다. 부하 병사들이 농부를 무섭게 꾸짖을 때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만류하면서 “그대들은 저 농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는가?”라고 책망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의 전체나 그 사람의 전체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옛날에 유명한 랍비 힐렐은 “네가 그 사람의 환경이나 입장이 될 때까지는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메튜헨리는 “우리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닥쳐온 유혹의 정도를 알 수 없다. 평온하고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는, 피가 불타는 것 같고 흥분이 곧 터질 것 같은 성격 소유자의 시험에 대해서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 

좋은 가정과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은, 빈민굴이나 죄악이 활개 치는 곳에서 성장한 사람의 시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영어에서 ‘이해’라는 말은 Understanding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under 곧 ‘무엇 아래서’ 라는 말과, standing, ‘서 있다.’ 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처지와 바꾸어 생각할 때, 그리고 상대방보다 더 낮은 자리에 서 보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잘 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3)다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C. S. 루이스는 이 말씀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유명한 풍자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런던을 방문하였습니다. 런던을 여행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그 고양이의 이름은 푸쉬였습니다. “푸쉬야 푸쉬야 어디엘 갔었니?” “여왕을 만나러 런던엘 갔었지요!” “푸쉬야 푸쉬야 런던에서 무엇을 보았니?” “여왕의 의자 밑에서 생쥐를 보았지요.” “너는 런던탑과 버킹검 궁과 국회의사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보지 못했니? 그리고 여왕은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하고 매력이 있든?” 그러나 고양이는 생쥐만 보았을 뿐입니다. 왜요? 고양이 푸쉬가 찾았던 것은 생쥐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 가운데도 마치 이 고양이의 눈처럼 다른 사람의 단점만을 찾고, 국가나 교회의 어두운 구석만을 찾기에 바쁜 비뚤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났던 날 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별명은 베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별명입니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인데,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다가, 바로 그날 밤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을 했던 베드로가 어찌 반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현재만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장차 성령 충만을 받을 때에 그는 반석과 같은 위대한 신앙인이 될 것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미래의 가능성을 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일소에 붙였습니다. 그는 나사렛 같은 시골에서 무슨 메시아가 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생각을 가졌던 철저한 편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편견의 사람 나다나엘을 가리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런 일화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한 마리 개가 죽어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감싸고서 “예수님 저 개를 좀 보십시오. 썩는 냄새가 얼마나 고약합니까? 예수님 저 개의 몸에 있는 구더기를 좀 보십시오. 얼마나 징그럽습니까?” 라고 떠들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얘들아, 저 죽은 개의 이빨을 보아라. 얼마나 희고 깨끗한가?” 물론 복음서에 기록된 기사는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어떠한 눈을 갖고 계셨던 분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산상 보훈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어떤 비판이든 무조건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른 판단과 비판력은 성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즉 성령과 말씀 안에서 자기의 이성과 양심으로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하고, 진리와 불의를 분간하며,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판단하는 능력은 귀중하고 필수적인 신앙인의 조건입니다. 이러한 비판력과 판단력이 없으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들보와 같은 단점과 죄와 과오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고, 오직 이웃의 작은 허물만 찾고 또 그것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자들의 모순 된 모습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어떤 신자 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은사가 꼭 하나밖에 없어서 쓰임 받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기독교 역사에는 단 하나의 은사를 가지고도 주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런데 “어떤 은사인데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비판의 은사인데요.” 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다시 “그렇군요. 저는 그 은사도 유익하게 쓰여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 성도님이 그 은사를 가지고 남을 비판하지 말고, 자신을 비판하는 일에 쓰신다면 말입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장점을 많이 보느냐 아니면 단점을 많이 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많이 보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주게 되면 어디를 가나 사랑을 받게 되지만, 이와 반대로 다른 사람의 장점은 보지 않고 단점만 보려고 하면 자연히 입에서 좋은 소리가 안 나오고 단점을 지적하는 말만 나오게 되기 때문에,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이 되고 따라서 어디를 가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대개 이런 사람은 그 성품자체가 너그럽지 못하고 옹졸하고 편협하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환영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부부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부부는 제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압니다. 어떤 면에서는 비밀이라고 할 것이 거의 없습니다. 장점도 단점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 부부사이인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편의 단점만 보고 말한다면 이 집안은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서로 감정이 격해져서 점점 더 험한 말을 주고받게 되고 나중에는 파경에 이르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서로가 단점은 덮어주고 장점만 생각하면서 산다면 자연히 오고 가는 말이 부드러워지고 행복한 부부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부부사이에서 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이 서로 서로 장점을 보고 그 장점을 배우려고 하는 자세로 산다면 우리 교회는 훨씬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람이 정성을 드려 가꾸지 않은 밭에는 쓸데없는 잡초만 자랍니다. 또 햇빛 없는 장소에는 푸른 나무 대신 곰팡이와 세균과 벌레만 자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없는 교회도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마음에 신앙의 열정도 없이 형식만 지니고 서로 비판만 하는 교회는 사탄의 놀이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의뢰할 것은 주님의 은혜요, 지킬 것은 주님의 사랑의 계명이요, 소망을 둘 것은 주님의 언약인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함부로 비판하지 말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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