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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강과 감사 (골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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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과 감사 (골 3:15~17)
 
(골3:15-17)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당신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당신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주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느 날 사냥꾼이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 날은 저녁 무렵이 다 되도록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냥꾼은 실의의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커다란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곰이었습니다. 사냥꾼은 속으로 ‘오호, 아무 것도 사냥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재수가 좋네!’라고 생각하며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불발이 되어 소리만 요란하고 발사가 되지 않아 거꾸로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당황한 사냥꾼은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도망을 치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냥꾼이 살아날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이 때 사냥꾼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제가 죽게 되었습니다. 저 곰이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을 배워 저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곰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사냥꾼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어 기뻐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그 곰이 어떤 기도를 하는지 귀를 기울여 들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오늘 하루 종일 굶었는데 맛있는 만찬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감사하는 데 있습니다. 곰도 감사하는 마당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감사의 고백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감사는 나를 앎에서 출발합니다.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이 본문은 감사는 평강의 삶에서 출발하며, 또한 그 평강을 위하여 부름 받은 존재.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君者三樂’ 이라 하여 사람이 즐거울 때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모 형제가 병고 없이 지내는 것이 첫째 낙이요,
둘째 낙은 하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는 것이며,
셋째 낙은 천하에 영특한 재사들을 제자로 교육 할 수 있는 일이다.
여러분들은 이런 즐거움이 있으십니까? 이러한 즐거움이 가득한 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즐거움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우리에게 삶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깨달아 알고, 그것에 헌신하는 삶이 될 때 평강이 내 안에 거하게 됩니다. 또한 평강으로 말미암는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평강이란 에이레네(eijrhvnh)인데 히브리어로는 샬롬(!/lv;)이라고 합니다. 평안함, 원만함, 평화로움, 평강 등을 의미합니다. 즉, 평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풍요로운 영적 상태와 화목을 가리킵니다. 결국 우리가 누리기 원하는 평강은 이 땅의 삶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이 땅의 조건들에 의해 평안을 누리거나, 행복해 하거나 기뻐합니다.
우리들은 이 땅의 것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혼동을 겪습니다.
신앙 안에 있을 때에는 이 땅의 현상과 관계없이 행복하고, 즐겁고, 기쁘고 감사의 고백이 넘치는데, 현실로 돌아오면, 조금 전의 행복과 기쁨과 감사는 정신없는, 현실감 떨어지는 자의 고백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치 “사랑 하나면 돼”라고 외치는 아직 여드름 보송보송한 20살 난 청년에게, “사랑이 밥 먹여 주나”하고 인생을 달관한 듯 훈계하는 결혼 20년차 아줌마를 생각해 보면 될 듯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럼 김철, 너는 평강의 삶을 누리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저는 지난 한 달 동안 지난 21년의 목회 이력 중 얻었던 휴가 보다 더 짜릿한 휴가 아닌 휴가기간을 얻었습니다.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을 보면서, 원치 않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적어도 내 삶에 이런 순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보면서, 때로는 분노, 때로는 절망, 그리고 어떤 이를 향한 연민의 정들이 서로 교차되고 뒤섞인 감정을 갖고 1달 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이만하면 하나님의 일 앞에 성실하지 않았나? 이만하면 혹시 큰 일을 맡기시려고 예비하신 연단의 시간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짐짓 능청도 부려 봅니다.
그러다가 "제자 훈련"에 갔다가 던져진 질문 앞에 직면하여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으로 족합니까?” - 예수님 한 분이면 됩니까? - 십자가 복음 하나면 충분합니까?

어느 한 날, 후배 목사에게 설교 초청을 받은 한 목사님이 설교 본문과 제목을 전화로 불러 줍니다.
“시편 23편 1-6. 제목은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후배 목사님이 이를 받아 적으면서 “그 다음에는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마 그 뒤에 뭐가 더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약속한 주일 오후에 그 이웃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안내를 받아 강단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아 주보를 펼쳐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후 예배 설교제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사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다윗의 고백은 말 그대로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내 입으로 분명히 “예수님만으로 족합니다.” 고백하면서도 예수님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듯 합니다.
내 가정이 조금 더 넉넉해져야겠습니다.
직장에서 입사 동기들에 비해 중간 이상 정도의 자리까지는 가야겠습니다.
투자한 주식이 다들 반 토막 이상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은행 이자에 5배 정도, 많이 바라지도 않습니다. 5배 정도는 되어야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들이 적어도 이 정도까지는 이뤄져야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만으로 족합니다.”는 명제를 신앙인의 당연한 악세사리 마냥 고백용 선언으로만 치부해 버립니다. 그리고 현실의 실제적인 선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만으로는 안 되겠어요.”라고 타협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 되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더 이상 이 땅의 논리나 가치관이나 주제가 내 삶의 평화를 좌우할 권세가 없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에서 3대 절기에 대한 계명을 주실 때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출애굽하여 아직 광야에 있을 때입니다.

여전히 쓰러지고 낙심도 하고 온전히 서 있지 못할 때이고, 가나안에 정착하지 못한 불안정한 때입니다.
아직 광야에 있을 때, 즉 머나먼 시련의 행진을 하던 때였습니다.
이 절기들은 단서 조건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즉 광야에서는 안 지켜도 된다거나 또는 가나안에 가서 잘 살게 되거든 지키라는 등의 단서는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은 어떤 외부적인 상황에 의하여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그 무엇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감사할 환경 때문에 감사와 평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의 유일한 이유로 하나님께 조금 더 초점을 맞추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형편은 본래 죽은 자였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던 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게 없었다면 어떤 삶의 존재 이유와 보람을 얻을 수 없던 자였습니다.
그런 나를 살려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일을 맡겨 주시고 오늘도 우리 통해 영광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감사는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내 속에 주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운동선수는 훈련 시간에 얼마나 성실하였는가가 경기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시즌 후반에 가서도 꾸준한 실력이 드러나는 선수들은 한결같이 동계 훈련을 착실하게 임한 선수라고 합니다.

옹알이 없이 말 시작한 아이가 있을까요?
뒤뚱 뒤뚱거리다가 넘어져 본 적 없이 뛰어 다닌 아이가 있을까요?
모든 일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결혼 생활에도 우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잘 알아 들어야 결혼 생활이 편안하다는 것을 결혼 10년차에 들어서야 알았습니다.
* 자기, 나 사랑해? - 나 사고 싶은 게 생겼어요.
* 자기, 날 얼마나 사랑해? - 나 오늘 일 저질렸는데...
* 개가 짖는 것 같아요. - 당장 나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봐.
* 맘대로 해요. - 하기만 해봐
* 우리 얘기 좀 해요. - 내 불만이 뭐냐면...

그리고 결혼 20년차가 넘어 서면서 좋아하게 된 기도문이 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신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평안히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늙어 여생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저는 저의 우둔함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자동화 기계가 만능인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자동화된 기계를 이미 사용하고 있습니다. 회전하는 선풍기도 역시 그 처음 단계의 자동화 기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자동 청소기가 있어서 혼자 스스로 방을 움직여 다니면서 청소를 하고, 세탁기, 식기 세척기 등등 인간의 삶에 유용한 다양한 자동화 기기가 만들어지고 상용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휴보’라 명명된 인간을 닮은 휴먼 로봇이 있어서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차원을 지나서 지정된 과제를 수행해 나가도록 지속적으로 발전을 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정부 로봇이 만들어지면 제일 먼저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휴먼형 로봇이 만들어져도 실제로 인간의 동작, 혹은 감각, 능력에 버금가도록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훈련이 반복되어 져도 가능한 일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코를 후비는 동작 하나만 하여도 사람들이 코를 후비는 감각과 그것에 반응하는 속도와 아픔을 허용하는 한계치를 결코 흉내 낼 수 없답니다.

훈련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에서든 서투를 수밖에 없습니다.
운동을 하더라도 기본기가 다져지지 않으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실력이 늘 수 없습니다.
이미 감사할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 내지 못합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들을 때나 기도할 때에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좋은 시어머니가 기도 하던 중에 자식이 없는 며느리를 목사님에게 가서 기도를 받게 해야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믿음이 부족해서 썩 내키진 않았지만 어머니 부탁이니깐 그냥 받기로 했는데....
“아가야! 목사님이 손 얹고 기도 하실 때 무조건 ‘아멘’ ‘아멘’ 해야 된다.”
목사님의 기도가 이어졌지만 며느리는 “아멘”이란 말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이때 다급해진 시어머니. 며느리 대신 연신 “아멘!”을 외칩니다.
그리고 결국 기도가 응답되어서 시어머니가 아기를 가졌답니다.

바라는 것을 강하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아멘으로 시인하십시오.
콩 심은데 콩 나는 것처럼 긍정은 긍정을 낳습니다. 부정을 통해선 긍정이 나오질 않습니다.
‘아멘’도, 긍정도, 시인도, 그리고 고백도 모두 훈련을 통해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의 고백에도 역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감사의 고백은 감사한 상황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의 고백은 감사할 마음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상황이 복스러워야 감사가 나올 것 같습니다.
우리가 좋아하고 원하고 기대하는 것에 대한 강렬한 열망은, 기필코 그것이 이루어져야 만이 감사할 것이라고 하나님을 압박하기도 합니다.

시편은 복을 노래한 보고입니다. 그 시편은 복 있는 자에 대한 선언으로 그 문을 엽니다.

시1:1-8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 시편의 말씀에 의하면 복은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건화 된 그 무엇에 우리의 관심과 복됨의 여부를 판단하려 합니다.
이 땅 위에 복을 추구하는 방법은 모두 사건화 되어 있습니다. 복권에 한번 당첨이 되어야, 멋진 배우자를 만나야, 원하는 무엇인가를 해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복의 사건화’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전부 이교적인 방법입니다.
무당과 점쟁이를 찾아가면 모든 행운과 액운은 연관되어져 있습니다. 또 사건화 시킵니다.
‘당신은 지금 이런 일 때문에 불행하다. 그러니까 이러 이러한 처방을 하면 액운이 물러간다.’
이것이 무당과 점쟁이가 가르치는 행복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복은 사건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의 원리나 방법이나 목적은 모두 사건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복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은 내가 행하려는 어떤 의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받는 복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복된 상황은 내가 어떻게 내 앞에 있는 사건을 다루느냐에 의해 복과 화로 구별되어집니다.

그래서 복 없는 악인들은 이렇게 됩니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상황에 의하여 바람부는 대로 쉽게 날려 흔들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날을 뒤돌아보며 자신을 먼저 훈련해 보고자 했습니다.
상황을 사건화 시키지 않고 감사할 마음을 먼저 가져 보려 시도했습니다.

저는 1988년 목회를 시작한 이후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혹간 부모님이 제 집을 방문하셔도 하룻밤 주무시고 가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도 목회하시는 입장이시기도 하고, 자식도 목회하는 입장이니 서로의 현장에 바쁘다는 이유였습니다.상황적으로는 이해할 수는 있어도 내심 많이 섭섭하기도 했었습니다.
부친께서 은퇴 후, 소천하시고 어머니 홀로 되셨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당신의 집을 벗어나려 하지 않으십니다.

조르고 졸라서, 이 핑계 저 핑계로 집에 모시기를 1주일. 겨우 1주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시고 있다 보니 조금 불편합니다. 당신도 불편하고, 저도 불편합니다. 워낙 오래 떨어져 살다보니 서로 삶의 패턴에 달라서 생기는 불편함입니다.
자식은 어머니 배려해 드린다고, 어머니는 자식들 배려해 주신다고 조심하는 것이 오히려 서로 불편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6월 첫 주 이후, 어쩔 수 없이 1달 가까운 시간을 한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불편한 것들이 조금씩 완화됩니다.
생각 같아서는 1년 정도 더 이런 상태라면 정말 서로가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침 수술을 받으셔야 할 일이 생겨서 모시면서 수술을 잘 마치고 병원에 모시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아픔의 시간들로 보였던 이 시간들이 없었다면 어머니나, 저나, 자식들이 모두 많이 힘들 수 있었는데 장남 노릇을 제대로 한 것 같아 동생들에게 면목을 세워 볼 수 있었습니다.
모시고 산 것이 아니라 얹혀 산 것이 되었지만 상황에 내몰리는 듯 생활한 1달이 주는 감사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목회 시작한 이후 다른 이의 설교를 들어 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일은 늘 맡겨진 현장에 있어야 하기에 은혜가 넘치는 크고 작은 교회를 탐방하며 예배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1달 간 또 다른 귀한 현장에서 예배하며, 각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며 참으로 좋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고, 동시에 설교 시간에 졸아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시간들을 통해 설교자가 성도들을 졸게 하는 것은 설교자가 행할 수 있는 죄악중의 가장 큰 죄악일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란 제자 훈련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고백합니다.
다른 일을 하는 분들에 비해서 목회자들은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은 편인데, 지난 한 달은 한 순간도 떨어져 본 일이 없을 만큼 가까이서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뭔 일이 많아지겠어요?
스트레스가 많은 시간들이다 보니 예민해지고, 결국 말다툼도 하게 되고, 제가 삐치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경험해 보니 결국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알고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힘든 여러 시간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힘들기는 했지만, 누군가를 공격하고, 힘들게 하는 시간이 아니었음에 감사합니다.
독화살을 맞은 듯, 총 맞은 것처럼, 휘청거리는 아픔이 있었지만, 누군가를 향해서 독화살을 날리거나 총 쏘는 데 시간을 쓰지 않고 기도하는 일에 더욱 전념케 하신 하나님 앞에 오히려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 여겨졌습니다.
발생하는 모든 일이 도무지 모두들 처음 겪는 일들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실수들 앞에 자책하고, 또 누군가를 향해서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음에 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상황에 따른 결과물이 아닙니다.
감사는 내 뜻대로 이루어진 일에 대한 리포트가 아닙니다.
감사는 감사할 마음을 지닌 자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런 고백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감사할 마음을 먼저 가지십시오. 감사한 상황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감사의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을 봅니다.

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최고의 찬양입니다.

정리합니다.
나를 아는 것에서부터 감사는 시작이 됩니다. 죽었던 나를 살리시고 사명을 주시고 지금의 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상황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애써 여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환경과 조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되어질 수 있기를 훈련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 돌리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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