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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크신 사랑 (엡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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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크신 사랑 (엡 2:4~5)


[엡 2:4-5]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옛날 한 마을이 큰 홍수를 만났습니다. 집은 형체를 찾을 수도 없었고 논과 밭들도 개울창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갈 길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 마을에 임금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놀랍게도 살기 좋은 낙원과 궁궐 같은 집들이 잘 지어진 마을을 준비하고 그 마을 입주권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누구든지 손을 내밀어 그 입주권을 받기만 하면 그 낙원 마을에 들어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을 입구에 거지 소년이 땅굴을 파고 살고 있었는데 그 땅굴마져 홍수에 없어지고 만 것이지요. 거지 소년은 내 손이 이렇게 더러운데, 내 옷은 냄새가 나는데, 내가 잃은 것은 땅굴밖에 없는데 - 임금님이 내게 낙원 마을 입주권을 주실까? 그러나 소년은 임금님의 자비로움을 믿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임금님은 거지소년의 손을 꼭잡아 주시며 "많이 추웠겠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 어서 낙원 마을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아라." 입주권을 손에 꼭 쥐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 홍수 만난 마을 사람들처럼 전혀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존재였고 스스로 살아날 가망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곧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되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이란 주어진 환경을 극복할 힘이 없어 힘에 부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향해 가지는 동정심, 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극히 사악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불우한 사람을 만나면 연민의 정을 느끼며 크고 작은 도움을 베풉니다.
이러한 마음은 때로 원수에 대해서도 일어나며 극악한 범죄자에 대해서도 일어납니다.
모든 인간에게 이러한 마음이 있기에 비록 타락한 세상이지만 자체 정화 작용이 일어나며 각박한 세상을 순화시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긍휼한 마음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한 자비한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인간의 극단적인 이기심과 교만한 마음은 이러한 긍휼함에도 숨어 있어서 자기의 유익에 크게 손상이 간다든지 자존심이나 우월 의식이 침해를 당하게 되면 단호히 긍휼한 마음을 내버립니다. 긍휼한 마음은 마음의 여유의 폭과 비례하며, 재정적인 능력 등에 크게 좌우되나 하나님의 자비는 이러한 인간의 자비와 크게 다릅니다.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하십니다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그의 품은 한이 없이 넓어서 세리도, 창녀도, 살인강도도 용납하시며 일흔 번씩 일곱 번을 범죄한 자도 사유하십니다

(마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도 용서하셨습니다.

이러한 무한한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자도 없을 것입니다.
바울조차도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자로 쓰임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차머즈라는 사람은 그의 책 “정오의 강풍”에서 유명한 건축 기사 피어홈의 긍휼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기사 피어홈은 세계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들을 건설하여 큰 명성을 얻었으나. 뒤에 질병과 실패로 인해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였습니다. 그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너무 사나운 개를 길러 위험하므로 피어홈은 자꾸 경고를 했지만 오히려 번번히 모욕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 불행은 갑자기 닥쳐 왔는데 그 개가 하필이면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이고 만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개의 주인을 비난하고 파종기가 되었어도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습니다. 노인이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은 그를 냉소했습니다. 맨 밭을 간 후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는 노인의 모습을 피어홈은 보았습니다. 

그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광에 가서 자신이 쓸 씨앗 반 되를 꺼냈습니다. 피어홈은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 주었습니다. 이웃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한 반면. 피어홈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우리들이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요구합니다. 

케이스 밀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혼 초기에 아내와 함께 ‘누가 쓰레기를 내다 버릴 것인가’로 서로 갈등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쓰레기 버리는 사람을 고용하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서로 그 일을 상대방에게 넘겨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인 케이스 밀러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속에 아내를 전도하고 싶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로가 아니라 그의 변화된 삶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쓰레기를 버리는 것인데, 처음에는 정말 자기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지만 성령께서 감동을 주셔서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몇 주 후에 그 부인인 매리알렌이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큰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의 긍휼한 마음의 동기에는 순수한 일면과 함께 매우 불순하고 온당치 못한 면도 있습니다.
어느 두 집사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집사님만 삼일 밤 예배에 참석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여자 집사님은 일이 있어서 그 날 참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남자 집사님이 삼일 밤 예배에 다녀오더니 달라졌습니다. 평소에 안하던 친절을 베풀어 주고 뜨겁게 사랑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 집사님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하! 남편이 삼일 밤 예배에 참석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구나!' 

그래서 그 다음 날 과일이 잔뜩 들은 바구니를 사들고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어젯밤 설교가 참 좋았다고 하지요? 주보를 보니까 제목이 사랑이었는데 무슨 내용으로 설교하셨나요?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나요?'그랬더니 고지식한 목사님은 센스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고 했는데요.'

인간은 이웃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느끼는 우월 의식속에서 사랑을 할 수도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어려운 사람보다 자신이 낫다는 우월 의식이 여유를 가져다주고 여유 있는 마음이 동정적인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무의식 층에 숨어 있는 우월 의식의 표출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일반적으로 지대한 불이익을 초래할 때는 사랑하는 마음을 거둬들인다는 사실은 사랑을 베풀었던 것이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서 표출된 것이기보다는 우월 의식에서 표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이를 뛰어 넘습니다
상처한 남자가 50세에 재혼했습니다. 신혼 여행 때 가게의 진열장에 진열된 진주 목걸이를 구경하며 부인이 '저렇게 예쁜 목걸이는 굉장히 비쌀텐데,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으니 진열하겠지요?' 하고 불쑥 말했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났을 때, 이 부인은 불치의 병에 걸렸으며 의사는 남편에게 그녀가 6개월 이상 살 수 없다는 상황를 알려주었습니다. 

마침 결혼 10주년 기념일이 되어, 이들 부부는 자기들의 결혼식 때 주례를 맡아 주었던 포터 목사를 집에 초청했습니다. 남편은 이미 60세인데 실제로는 70세 정도로 늙어 보였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농사꾼, 그것도 몹시 가난한 농사꾼이었습니다. 조촐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이 남편은 부인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숨겨 두었던 진주 목걸이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부인의 목에 걸어 주었습니다. 목걸이를 본 부인은 몹시 놀랐습니다. 그것을 살 돈이 남편에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 훔쳐온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때 남편은 설명했습니다. 그는 결혼 당시 아내에게 진주 목걸이를 사 줄 결심을 하고 좋아하던 담배와 맥주를 끊었고, 심한 노동을 하면서도 콜라 한 병 마시지 않았으며, 푼돈을 10년 동안 모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What made you do it?)'라고 묻는 아내에게 백발이 된 남편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포터 목사는 '그 큰 남자가 유난히 작은 부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없이 함께 울던 장면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라고 술회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안 먹고 1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그 인내와 절제와 희생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단 하나의 동기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고귀한 인격으로 보고 사랑하기 때문에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인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페트릭 몰리(Patrick Morley)는 자신의 책 「거울 속에 있는 인간」(The Man in the Mirror)에서 12살 먹은 아들, 그리고 다른 두 남자와 함께 알래스카에 연어 낚시를 간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수상 비행기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알래스카에 착륙해서 하루 종일 낚시를 하고 비행기가 묶여 있는 항만으로 돌아왔을 때 밀물이 다 빠져나가 비행기가 자갈 위에 높게 떠서 도저히 날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불을 피우고 그 날 잡은 물고기를 구어 먹고 비행기 안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이튿날 다시 바닷물이 들어 왔을 때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수상 비행기 밑에 있던 고무배 중에 하나가 펑크가 나서 비행기는 날지 못하고 물위로 떠밀려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비행기에 올라탐으로써 무게가 더 나가자 비행기는 마침내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신속하게 비행기를 빠져나와 수영을 하려고 했지만 파도가 너무 사나워서 힘이 들었습니다. 

마침내 비행기 안에 타고 있던 두 남자는 수영을 해서 다시 해안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팔을 꼭 낀 채 바다 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갔습니다. 혹한(酷寒)의 물결 속에서 해양 경찰대는 이 아버지와 아들의 체온이 급격하게 저하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12살 먹은 아들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버지의 품안에서 깊이 잠이 들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기 팔에서 떼어놓기만 하면 얼마든지 해안으로 다시 돌아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까지 아들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아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값없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이와 같이 놀라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긍휼이 연민의 정으로 끝날 때 그것은 값싼 동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걸인에게 동전 한 닢을 적선했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긍휼이나 사랑을 베풀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동전 한 닢'이 걸인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도움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삶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그 사람이 온전한 한 인격체로서 당당히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참으로 사랑을 베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이러한 종류의 긍휼입니다. 

어떤 탈북자가 몇 년 전 북한에서 탈출해서 중국에서 숨어 지내다가 베트남을 거쳐 한국에 왔습니다. 그분이 한국에 와서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받으면서 쓴 글이 있습니다. 

“나는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주민등록증을 받는 순간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고생의 여정들이 눈앞을 지나가며 감회에 젖었습니다. 밤에 자는 사이에도 머리위에 주민등록증을 놓고 자다가 잠이 오지 않아 다시 불을 켜고 주민등록증에 자신의 얼굴이 선명하게 있는 것을 보고 잠을 잤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주민등록증이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그러나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을 통과하고 베트남을 거쳐 한국에 온 사람은 이 주민등록증이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지옥가야 하는 우리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데 그 신분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때에 우리가 이 감격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이 분이 북한에 있을 때는 어떤 신분이었습니까? 압제아래서 죽지 못해 살았지만 대한민국에 오니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새롭게 태어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과거의 죄와 허물을 벗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 삭개오, 바울 등은 예수를 통해 변화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남으로 인생의 질적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죄의 사유가 있었고, 예수께서 생을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존재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존재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받은 자들이니, 이러한 은혜와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식구들과 이웃들에게 이 사랑을 전하며 봉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유명한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뮐러는 20세가 되기 전에는 방탕과 좀도둑질과 거짓말로 소위 청소년 범죄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1825년 11월 중순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그 날 베타라는 여인을 통해서 기독교 집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듣고 깨어졌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그 날 밤이야말로 내 생애의 전환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받은바 은혜 감사하기 위해 30세에 브리스톨에서 고아원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처음 고아원을 시작할 때 준비한 것이라곤 선물 받은 접시 세 개, 쟁반 스물여덟 개, 대야 세 개, 물병 하나, 컵 한 개, 소금 병 받침 세 개, 칼 네 개와 포크 네 개, 그리고 채소를 깎는 강판 한 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무릎을 꿇는 기도를 통해서만 62년 동안 약 30억 원 이상이 그 고아원과 선교사들을 위해 보내지는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일본 사람이 쓴 소설 중에 [아끼루]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뜻은 "산다"는 말입니다. 노벨상 수상 작품 후보로 들어 갔다가 상을 받지 못했지만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 소설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25년 동안이나 시청에 근무하던 어떤 사람, 아주 몸이 건강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위암입니다. 의사는 말하기를 6개월 산다고 선언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고민을 합니다.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니까 모든 것이 귀찮아집니다.

 물론 직장에도 가고 싶지 않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셔도 재미없고, 누구를 만나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는 아주 절망하고 삽니다. 그러다가 어떤 꽃 파는 불쌍한 어린애하고 앉아서 얘기를 합니다. 말동무가 됩니다. "나는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는 슬픈 얘기를 합니다. 이 철없는 어린애의 대답이 "그래도 6개월은 있잖아요" 합니다. 아, 그 말이 맞단 말입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립니다. "6개월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6개월은 있다" 이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새로운 용기를 얻어 가지고 6개월 동안 "내가 뭘 할까" 하며 그는 가능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귀중한 일을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면서 신실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 선한 일만 하시다가 구원해주신 하나님 앞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라는 주제로 여름 어린이 성경 학교가 예수님의 유혹(제지도)으로 중고 수련회가 시작됩니다

우리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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