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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대의 요청 (요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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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요청 (요 1:1~26)


삶의 무게에 지쳐서 사람들의 배신과 관계의 어려움으로 갈등하며 살 소망을 잃어버린 한 여인의 일기를 여러분에게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외에는 아바 아버지의 위로하심 없이는 일어설 수 없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창가로 비쳐지는 아침 햇빛에 뒤척이며 힘겹게 일어났다. 내 옆에 누워있는 한 사람은 아직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의 삶을 기대어 보려했으나 이 사람도 나에게 더 큰 근심과 고통만 가져다 줄 뿐 나의 공허와 힘겨움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한참동안 창밖을 바라보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이내 내 마음은 우울해졌다. 나를 배신하며 떠나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생각이 난다. 머리가 아프다. 언제부턴가 계속되는 이 두통이 나를 더욱 힘들게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삶 가운데 새로움과 신선함은 온데 간데 없다.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인간의 삶이란 다 이런 것일까? 배신당하고 배신하고 무시하고 무시당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내 삶의 전부일까?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물을 기르러 가야한다. 하루를 살고 또 하루의 삶을 연명하기 위해 물이 필요하다. 또 하루의 양을 채워야 살아갈 수 있겠기에 매일 매일 그렇게도 가기 싫은 길들을 지나 물을 찾아가야한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두렵다. 흘겨보며 속삭이는 그들의 비아냥이 두렵다. 사람들이 가장 드문 정오의 시간은 나에게 평안을 가져다준다. 일순간이지만 사람들이 없는 곳,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없는 곳 난 그곳에서 순간의 자유를 맛본다.

뜨거운 햇살을 등에 맞으며 야곱의 우물가로 빠른 걸음을 내딛는다. 오늘도 재수가 좋아야할 텐데 오늘은 영 틀린 모양이다. 유대인처럼 보이는 남정네가 피곤에 지쳐 우물가에 앉아 있다. 그래도 다행이다. 낯익은 얼굴은 아니다. 빨리 물을 뜨고 가면 그뿐이다. 그때 들려오는 한소리가 있었다. 

"물 한 모금만 축일 수 있을까요“ 재수 없게 시리 유대인 남정네가 말을 걸어온다. 평소에는 우리들을 상종조차 하지 않는 족속 아닌가? 
“왜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당신에게 물을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당신은 나에게 생수를 구하였을 것입니다”
“당신은 물 기를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나에게 생수를 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야곱보다 큰 자입니까?”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있습니다”
“그런 물이 있다면 나에게 주어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주세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지껄이는 이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시간이 점점 흘러간다. 도망치고 싶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이 사람의 말에 빠져만 들어간다. 

“당신의 남편을 불러 오실 수 있겠습니까?”
“난 남편이 없습니다”
“당신이 남편이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당신의 남편 다섯이 있었지만 지금도 한 사람이 당신과 동거하고 있지만 당신 남편이 아닙니다. 당신 말이 진실이군요”

어떻게 알았을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나의 치부를.. 이 사람은 누구지? 어떻게 어떻게 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거지.. 순간 두려웠다. 나를 배신한 사람의 지인인가? 그들도 나의 모든 과거를 아는 것은 아닌데..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혹시 선지자는 아닐까?
그렇다면 나의 아픔을, 나의 고통을 조금쯤은 위로해 줄 수는 없을까? 섣부른 기대를 또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복잡해졌지만 호기심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나를 붙들었다. 아니 이 사람에는 그 무언가 삶의 해답이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가 나의 마음속에 들기 시작했고 굳어 있던 내 마음이 어느샌가 열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던데”

갑자기 뚱딴지 같이 나에게서 이상한 질문이 터져나왔다. 예배란 걸 드려본 적도 없으면서 왜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지??

“그리심산도 말고 예루살렘도 말고 당신들이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합니다. 아버지께서 이러한 사람들을 지금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만 예배 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예배, 아버지, 영과 진리 한번쯤은 들어보았지만 그렇게 깊게 생각하거나 그것들이 나의 삶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나의 고통을 아버지라는 분이 해결 할 수 있을까? 어렸을 적 예수 메시야가 오면 세상을 구원한다고 한 기억이 어렴풋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온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나의 고민과 아픔과 슬픔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낯선 유대인의 한 마디 말이 나의 심령을 꿰뚫었다. 나의 단단한 마음도,... 갈갈이 찢어져 있는 마음도 그 사람의 한 마디가 이러한 나를 감싸주는 듯했다.

“당신과 대화하고 있는 바로 제가 그리스도입니다.”

순간 온 몸의 전율이 일어나는 듯했다. 이 사람이 바로 메시야라고 이 사람이 조상들이 말했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 그리스도라고.. 믿겨지지 않았지만 아니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내 몸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내 영혼이 이 사람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믿고 있었다. 어느샌가 눈물이 터져나왔고 내 마음속에 차오르는 벅찬 감동과 평안과 기쁨 때문에 나는 정신없이 물동이를 버려둔채로 마을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소리쳤다. 

“내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나를 일순간 변화시킨 그 사람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참 구주였고 기쁨의 구주였다. 

만약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본인 자신을 들어내시지 않았다면 그 여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변하지 않는 삶에 지쳐 또 다른 기댈 대상을 찾아 방황하지 않았을까요? 혹시 여러분 주위에 사마리아 여인처럼 목말라 생수를 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그 한사람 한 사람을 외면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전도의 본을 몇가지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1. 전도는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할 때가 있다.

예:지하철 전도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없는 말을 지어 요한보다 제자를 많이 삼는다.. 세례를 많이 준다는 등의 소문이 들려왔고 그들과의 괜한 논쟁을 피해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하셨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갈릴리로 갈 때에 뵈뢰아로 돌아가는 것이 상례였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통과하려고 마음을 정하십니다. 사마리아의 어둠의 땅을 빛으로 밝히려고 하셨는지.. 예수님은 그 당시의 의례 유대인들이 했던 데로 뵈뢰아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사마리아로 들어가십니다. 피곤에 지치신 예수님 야곱의 우물가에 그대로 앉으신 채 잠시의 휴식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외적, 내적으로 곤고한 상태였으나 예수님은 그러한 장애물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목마름으로 가득 차 있는 여인에게 본인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삶의 피난처가 누구인가? 진정한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본인에게 있는 장애물들을 가뿐히 뛰어넘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도 아깝지 않다라는 캐치플레이어를 숱하게 듣고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우리의 전도의 열정은 어떠한 장애물로 인해 식어지고 가로막혀있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오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우리 주님께 대답하시겠습니까? 

2. 전도는 기도로 준비될 때 힘을 얻는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와 현재의 영적인 상태를 알고 계셨습니다. 성령세례 이후 예수님의 믿음의 눈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그랬고 나다나엘과의 대화에서도 그랬듯 알 수 없는 그네들의 영적인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항상 성령님과 동행하셨던 예수님이였기에 성령님께서 예수님에게 그네들의 모든 영적인 상태를 알려주었습니다. 기도하고 겸손의 종으로 사셨던 예수님, 항상 기도하셨기에..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도 귀신들을 내어 쫓을 때에도 본인의 영광이 아니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돌리며 기도하셨던 예수님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의 가슴앓이를 가지고 기도하는 우리에게도 성령님은 우리의 전도와 복음전파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혹여 우리의 복음전파는 나의 영광을 위하여는 아닙니까? 내가 목회자이기에, 장로, 권사이기에 의무적으로 기도 없이 사랑 없이 하는 행위 그 자체뿐은 아닌가요? 우리가 한 영혼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겸손함을 배우며 나아간다면 우리의 전도의 길은 더욱더 활짝 열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3. 전도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종교를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를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전하십니다. 영적인 담대함과 기도로 무장되어있었기에 예수님은 결코 사람들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보여지지 않는 공간 가운데 승리는 보장되어 있었지요! 사마리아 여인의 죽은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은 그 빈자리를 예수로 채우십니다. 성령으로 채우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그 딸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하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 쪽팔리십니까? 여러분에게 참 기쁨과 평안을 주신 그 분, 예수님을 여러분들의 남편과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알리는 것이 창피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맛보신 것이 거짓이십니까? 

아주 특별한 여름!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전하지 않는 다면 이 자리에 앉아있는 어떤 분들에게는 아주 무의미한 여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본을 받아 우리의 삶의 장애물을 뛰어넘고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여 아버지의 가슴앓이로 지금도 울고 계시는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시는 한 분 한 분에게는 평생 기억에 남을 아주 특별한 여름이 되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것도 꺼이꺼이 우시면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시는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너희만 예수 믿고.. 너희만 성령과 교통하고 너희만 너희만 하고 울부짖으시는 아버지의 통곡에 귀기울이시기를.. 그 아버지의 울음소리에 귀기울여 아직도 어둠의 땅 덩어리에서 신음하고 있는 바로 여러분들의 vip들을 위해 힘차게 나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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