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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보혈의 능력 (출 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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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혈의 능력 (출 12:1~14)


오늘은 맥추 감사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430년 만에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가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기념하여 세 가지 감사 절기를 지키라고 합니다. 첫째가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된 날입니다. 둘째가 맥추감사절입니다. 430년 동안 자신들의 땅도 없이 노예로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이 생겨 농사를 지었습니다. 밀과 보리를 거두고 하나님께 감사한 절기입니다. 셋째가 수장절입니다. 1년 동안 농사지은 곡물이나 과실들을 추수하여 창고에 저장한 후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이지만 유월절 없는 맥추절 감사절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유월절 없는 수장절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맥추 감사절도 수장절도 유월절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유월절 하면 중심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린양입니다.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어린양의 피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 없는 감사절은 생각할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에서의 삶의 기반은 어린양의 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맥추 감사절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능력을 주셨는지 말씀을 묵상하며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보혈은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좀더 나아가면 삶의 연장의 문제이고 영생의 문제입니다. 유월절은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 속에 일어난 한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는데 그 피를 통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곧 피이고 피가 곧 생명은 아니지만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피가 멈추면 모든 것이 굳어버립니다. 혈액이 멈추면 모든 것이 멈춥니다. 혈액이 병들면 모든 것이 병듭니다. 피 자체가 생명은 아니지만 피는 생명의 에너지를 운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퍅한 바로에게 10번째 재앙을 내릴 때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애굽의 장자와 짐승의 초태생을 다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를 볼 때에는 그 집 사람은 죽이지 않고 살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피가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피를 볼 때 죽음의 재앙이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재앙이 내려 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피가 어떤 피입니까? 6,7절을 보십시오. 어린양의 피입니다. 어떤 어린양입니까? 5절 보십시오. 세가지 조건이 나옵니다. 첫째, 흠없는 어린양입니다. 둘째, 일년 된 것입니다. 셋째, 수컷입니다. 특별한 어린양인 것을 봅니다. 그 어린양입니다.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 본문을 읽는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어린 양이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우리의 죄를 담당시킬 어린양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어린양이 대신 죽을 것을 말씀합니다. 

이제 이 어린 양이 누구인지 성경을 더욱 밝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점진적 계시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보십시오. 요한복음 1장 29절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아 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를 통해 직설적으로 분명하게 밝혀 주십니다. 

고전 5장 7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 5:7)” 바로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님의 모형이고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실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보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다 쏟으신 피를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은 보혈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보혈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17:11) 

그 피가 바로 예수님의 보혈이라고 성찬식을 베푸시는 예수님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예수님의 보혈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예수님의 보혈로 새롭고 산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죽음을 정복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라고 했을 때 그대로 그 말을 믿고 어린양을 잡아 피를 바른 사람만 죽지 않고 산 것입니다. “아니 피를 바른다고 살아? 무슨 미신 같은 짓이야?”라고 말하며 믿지 못하고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 보혈의 능력을 믿으면 살아납니다.”라고 말하면 뭐 미신같은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믿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이 임할 때 살 수 없고 영원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0)”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앎이 없이 믿음은 발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무엇을 듣습니까?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이스라엘 백성도 모세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듣는다고 다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의 사위처럼 농담으로 받아들이면 그냥 유황불 가운데 죽는 것입니다. 인정했으면 그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을 맡겨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앎과 승인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굴복케하는 은혜입니다. 바로는 끝까지 알고도 승인하고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고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나님 말씀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예수님의 보혈만이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류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영생을 얻게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지옥 백성이 아니라 천국 백성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생명을 얻은 것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과거 임박한 죽음을 앞에 놓고 외쳤던 모세처럼 맥추 감사절에 우리는 이 보혈의 능력을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롬 10:9)”리라. 


2. 보혈은 믿는 자에게 속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을 끊임없이 불행하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요즈음 경제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이클 잭슨을 보십시오. 그 많은 인기와 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부가 있다해도 죄를 짓고 감옥에 가 있다면 행복하지 못합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죄로 인해 감옥에 갇힌다면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비록 감옥에 가 있지 않을지라도 죄의식을 가지고 살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면 지난 과거일지라도 그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아버지가 전처가 병으로 죽자 그의 하녀를 강간하여 임신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8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제 다섯 명이 일찍 죽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벌이라고 했답니다. 그도 34살 이전에 죽을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그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원망하고 탕아생활을 계속하던 중 죄책감에 못 견디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답니다. 

죄의 문제는 심각한 것입니다. 바로 보혈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

애굽의 장자들이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기 때문입니다. 아홉가지의 재앙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에서 해방시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그리고 결국 장자가 죽는 대가를 받습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지 않게 한다는 것은 죄를 속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죄의 삯을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바로의 노예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어린양을 삯으로 지불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한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누가 속죄를 위해 피를 흘려주셨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속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를 보시면 우리의 죄는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공의의 눈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보십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으로 값없이 흘린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거나 덮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 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죄의 노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의인 만들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삯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는 그 누구도 정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와 연약함으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너가 예수 믿는 사람이냐? 너 네 모습을 보라. 끊임없이 죄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8)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죄를 도말해 주시고 기억지도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공격합니다. "봐라 너 또 죄지었지 그러고서는 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느냐?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죄를 짓지 않는다" 십자가의 보혈의 용서는 나의 자백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긍휼이 우리를 은혜로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86: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속에서 용서함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그러므로 이미 자백해 버린 죄에 대하여 계속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희 죄와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치 아니하리라"(히10:17) 

죄책감에 사로잡히면 올바르게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책감은 능력을 상실하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책을 주는 것은 사탄의 책략이요 술수입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요일 1:7; 벧전 1:18-19)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모든 죄를 씻으시는 능력의 샘물입니다. 

매일 삶 가운데 짓는 죄는 스스로 인정하고 회개하면 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불의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시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 회개했으면 계속적인 죄의식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연약하여도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능력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3. 보혈은 믿는 자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끝났다고 인생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잘사느냐 못사느냐 삶의 질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모두가 잘 살길 원합니다. 무엇으로 잘 살 수 있겠습니까? 물질로, 권력으로 잘 살 수 있을 것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보혈의 능력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유월절 어린양의 사건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노예에서 자유민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상태가 변화되었습니다. 새로운 삶의 문화가 생겼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죽음에서 구원받은 날, 노예에서 해방된 날을 여호와의 절기로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신관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절기 문화를 갖는 것입니다. 주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들이 보혈의 능력으로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감사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들이, 성탄절과 부활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문화를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원한 규례로 삼습니다. 나 당대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대대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시간관이 달라집니다. 삶의 기준점이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 유월절으로 인하여 달력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출애굽하는 유월절 사건이 첫달이 되는 것입니다. 기존의 시각 환산법을 초월하여 새로운 월력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자연인으로부터 하나님의 은총으로 선택, 구원받은 선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바로의 통치권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역사의 기준점이 BC와 AD로 바뀌는 것처럼 어린양의 피, 보혈로 인하여 인생의 기준점이 바뀌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유월절 양을 기준으로 하여 변형된 가족관이 생깁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달 열흘에 가족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어린양 한 마리를 먹을 만큼 식구가 되지 못하면 이웃과 더불어 한 마리 양을 먹을 수 있는 의미상 가족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자유자나 노예나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막힌 담을 허시고 동일한 시민, 권속으로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 2:19)”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고 하였습니다.

재물관이 달라집니다. 양과 염소 중에 흠없는 일년된 수컷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14일까지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질 때에 그것을 잡아 그 피로 집 문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에 구워 먹고 남은 것은 다 불태워 버리라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으라고 합니다. 날로나 삶아서 먹지 말고 다 불에 구워 먹으라고 합니다.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고 남은 것은 다 불에 태워버리라고 합니다. 일용할 약식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재물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주님께 돌아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합니다. 떠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나그네 삶을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영원한 본향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 인생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430년 동안 지속되었던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번거로운 것같이 보이고 손해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살았다는 감격, 자신들이 해방되었다는 감격을 가지면 이것은 결코 번거로운 것이 아닙니다. 마지못해 의무감에서 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감격하고 눈물 흘리고 감사하는 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이 백성,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기도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악한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영권을 허락받았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이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 보혈의 능력으로 신앙인의 가족관, 신앙인의 인생관, 신앙인의 시간관, 신앙인의 재물관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제 완전히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 마귀의 자식(요8:44; 행13:10)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상태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생명의 단절, 교통의 단절이 되었습니다. 영생의 특권과 교통의 특권을 상실하였습니다.
 
생명의 단절로 영적 사망(인생의 시작에서)이 왔습니다. 육적 사망(인생의 종말에서)이 오게 됩니다. 영원적 사망(내세에서)을 맞이해야 합니다. 교제 단절의 결과로 영적 소경이 되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습니다. 친죄 성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혈의 능력으로 영적 사망과 영적 소경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정죄의 신분으로부터의 구원받아 의롭다 칭함을 받고 양자가 되었습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친죄 성향으로부터의 구원받아 성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육체적 사망으로부터의 구원받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적 사망으로부터의 구원받아 영화로운 몸으로 천국에 살게 될 것입니다. 

삶의 질은 다 주관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어떤 환경에서도 바른 신관, 인간관, 시간관, 물질관, 가치관을 가지고 만족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 수 있습니다. 
평생 보혈의 능력으로 살았던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노년입니다. 아들 딸도 없습니다. 가난합니다. 사랑했던 사람들도 떠났습니다.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 때 뭐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2-13)” 

지난 주 일간지에서 “두 팔 두 다리 없이도 축구, 수영·서핑 즐기는 20대 청년”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20대 호주 청년 닉 부이지크(26)는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났답니다. 다만 왼쪽 엉덩이 부분에 작은 발이 달려 있을 뿐 이었답니다. 닉의 아버지는 신생아실에서 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병실을 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넋이 나간 어머니는 넉 달 동안 닉을 안아 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답니다. 닉은 죽으려고도 했답니다. 그는 그의 왼쪽 엉덩이에 붙어 있는 작은 발은 삶의 많은 부분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생후 18개월일 때 수영을 배웠다고 합니다. 6살 때 발가락으로 타이핑하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의 부모는 닉을 장애인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보냈답니다. 닉은 대학에서 재정과 부동산을 전공했답니다. 닉은 "'너무 힘들어서 어머니에게 울면서 자살하고 싶다'고 했고, 하나님을 원망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장애를 극복하고 현재 24개국 이상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고 약 11만 명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장애를 주고 태어나게 했는지 깨달았다.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을 평생 해나가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또 "그 어떠한 것에도 불평하지 않고 항상 감사하며 산다. 나는 팔과 다리가 없지만 나의 맑고 아름다운 눈은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고 덧붙였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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