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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막 2: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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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막 2:18~22)


오늘 본문에는 경건생활에 모델이 될 만큼 모범적인 두 계층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다. 신앙적으로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위험적 요소들이 있다. 그것을 영적우월감, 영적 교만이라 부른다. 자신 만큼 열심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눅18장에서 보게 된다. 성전에 나온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한다. 

눅 18:11-12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영적 우월감 속에는 자기 과시 자랑의 마음이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된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일이 쉽겠는가? 그러나 이런 열심을 가지고 있다해도 그것이 자랑이 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적 율법주의 외식주의 빠진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앞서서 예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는데 이때 바리새인들이 엿보다가 예수님의 행동에 대하여 비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세리와 죄인들과 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응수하셨다.

막 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전혀 맞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율법대로 했냐 않했냐? 

바리새인들의 비난하는 일이 끝나자 이번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나섰다. 이들은 세례 요한의 금욕적 수행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다짜고짜 예수님을 향하여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부었다. 바리새인들의 제자들과 우리는 금식하는데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책망하고 꾸짖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답변해 주셨다.(19-22)


1)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다.

왜? 혼인잔치 기간이기 때문이다. 혼인잔치 - 인륜지대사.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춤출 때이다.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보통 7일 동안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는 금식 안해도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비유했는데 이 부분을 잘 이해하려면 구속사적 접근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영혼 구원을 위한 천국잔치를 이 세상에 베설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과 계시는 동안을 혼인잔치 기간에 비유하신 것이고 혼인잔치의 주역은 바로 신랑인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전에 예수님에 대하여 자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증거했었다.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러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이라면 금식할 때가 아니라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할 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답변하실 때 반어조로 묻고 계신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슬퍼할 수 있겠느뇨?” 이 말씀의 의미는 지금은 금식의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가 이뤄지는 동안 금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2)금식할 때가 있다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금식폐기론자가 아니다. 금식할 때가 되면 금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 금식해야 하는가? -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는 예언적 메시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 때는 금식을 해야 한다. 주님 고난 당하시는데 그 때 먹고 마시고 춤 출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오늘날도 금식하는 절기가 있다. 특별히 부활절 전 한 주간은 온 교회가 고난주간으로 지킨다. 그때가 되면 성도들은 금식에 동참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한 주간 내내, 어떤 사람은 하루 한끼, 어떤 사람은 당일날 금식을 한다. 그러나 부활절날, 감사절날, 성탄절날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날이다. 

성도의 영적 성장을 위해 금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시기와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와 성숙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와 자신들과 같이 금식하지 아니한 것에 대하여 항의한 것은 그들이 아직 영적 어린 아이의 상태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갈 3:23-24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비유로 설명하셨다.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주의와 신약의 복음과의 관계를 비유로 설명하신 것이다. 생베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교훈, 복음을 가리키는 것이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유대교의 율법주의 사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생베 조각은 탄력이 있고 강하기 때문에 낡은 옷에 붙이면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옷이 더 망가지게 된다. 새포도주는 발효력이 강하기 때문에 낡은 부대에 담으면 지탱력이 약해서 부대가 터지고 만다. 

이것은 유대교의 낡은 형식에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지적하는 교훈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은 구약의 율법주의 형식주의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떻해야 하는가?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이다. 본문의 소재는 금식에 관한 것이었으나 주제는 금식에 관한 것이 아니다. 시대가 달라졌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였다.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지금은 율법의 시대가 아니다. 은혜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가 되시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사는 길이다. 

고집부리고 옛날로 돌아가는 행동은 생베조각을 헌 옷에 붙이는 것이며,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명령하고 있다.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1)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
2)심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
3)새 사람을 입는 것.

현재 우리나라의 탈북민(새터민)의 숫자가 약 1만6천명이라고 한다. 탈북민의 정착교육을 담당하는 하나원의 통계에 의하면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확률은 10%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원을 수료하면 한국 국적과 함께 주택과 정착금을 받게 되는데 대부분이 적응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탈북민들의 고민, ‘남한에 적응하여 정착하는 것이 탈북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그들이 대한민국의 국적을 얻어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할지라도 북한에서 가지고 있던 사상과 생활 습관들을 버리지 않으면 그들은 실패할 것이다. 그들이 잘 성공적으로 잘 적응하려면 남쪽의 습관과 언어와 기술을 배워야 한다. 만약 옛 습관을 고집한다면 자유 남한에서의 삶이 북한에서의 삶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인식하고 과거 북한에서의 생활 습관과 사상을 버리고 자신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열심히 배우고 익히면 행복하고 성공적인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괴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보다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라고 했다. 나의 신분이 누구이며, 내가 어디 있는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목적 의식을 상실할 때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전통과 규례에 매여서 소비적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불안하고 혼란하다. 불안한 행복을 누리는 서울 쥐와 같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자신의 신분을 인식하고 나의 구원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에 중심에 모셔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한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된다.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일 수 없으며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을 수 없다. 

주께서 말씀하시길, 잔치 자리에서 금식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하셨다. 구속의 은혜를 받은 성도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합당치 않다. 새 부대에 넣기에 합당치 못한 것들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엡 4:25-32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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