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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몬에서 베드로로 (마 16: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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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에서 베드로로 (마 16:13~18)
  

1960년에 나온 이탈리아 영화 <달콤한 인생, La Dolce vita>은 헬리콥터 한 대가 거대한 예수님의 조각상을 로마로 옮기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두 팔을 벌린 예수님을 줄에 매달고서 헬리콥터는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을 지나쳐갑니다. 그리고 아래서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예수님을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야, 예수님이다!> 한 농부가 소리치면서 헬리콥터와 경주라도 하려는 듯이 트택터의 속도를 높입니다. 로마 근처에 이르자 수영을 즐기던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조각상의 예수님은 아무 말 없이 저 아래 현대 세계를 내려다봅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눈으로 내려다보고 계실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떤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 질문은 매우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그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고 있는가> 하는 것처럼 근본적인 질문은 없을 것입니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대답에 따라 우리의 삶과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어떤 집에 불이 났다고 해 봅시다. 모두가 무너지는 집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갑니다. 사람들이 붙잡고 만류하지만 그는 뿌리친 채 집으로 뛰어들어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는 어떻게 불구덩이로 뛰어들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가 집 안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저 집안에 아이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내 아들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면 뛰어들게 됩니다. 상대방을 어떤 사람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행동이 결정됩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됩니다. 이번 성지 스터디를 하면서 여러 가지 특이한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걸어 내려간 일>입니다. 화면에서 보시는 곳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유대 광야입니다. 정말 황량하고 삭막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오르내리셨겠지요. 그 중간에 골짜기가 보입니다. 이것이 <와디 켈트>입니다. 비가 오면 물이 흐릅니다만, 거의 일년 내내 말라있는 건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삭막한 곳에 수도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보시는 장면이 와디 켈트에 있는 <성 조지 수도원>입니다. 저는 멀리서 수도원을 바라보면서 걸었는데, 걷는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저 안에 있는 사람들, 한 번 들어가면 평생 나오지 않는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왜 그렇게 하는가>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들은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얼마 전에 우리 교회 김대석 청년의 동생인 김은진 자매가 남편 김승훈 형제와 함께 캄보디아로 들어갔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한동대학교를 졸업하고 비전과 열정이 넘치는 젊은이들입니다. 이미 아이가 하나 있고, 둘째를 임신하여 몸이 무겁습니다. 그들에게는 국내에도 얼마든지 좋은 직장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캄보디아로 들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제 오전에 교회에 나오다가 몇 분의 교우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 어떤 분은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 분들 모두 빈손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은 청소기를, 어떤 분은 빗자루를, 어떤 분은 손걸래를 들고 계셨습니다. 그 분들은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예배당 의자를 닦고, 계단을 청소하고 계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또 오늘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할 일이 없어서 오신 것은 아니지요? 심심해서 오셨다면 훨씬 더 재미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 계십니까? 

질문이 이것뿐이겠습니까? 왜 저는 목사가 된 것이며, 왜 어떤 분은 기꺼이 장로가 되었습니까? 왜 어떤 분은 집사와 권사가 되셨습니까? 왜 감당하기 벅차고 무거운 짐 앞에서 기꺼이 <예>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오늘이 교사주일입니다만, 왜 교회학교 교사가 되셨습니까? 왜 힘들게 번 돈들을 모아 교회에 바치십니까?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수도사가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선교사가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배당을 청소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린 여기 모였습니다. 그 나머지 질문에 대한 답변도 하나입니다. <예수님 때문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이유가 됩니다. 목적이 됩니다. 우리 모든 행동을 설명해 주는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이신가>라는 문제는 우리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께도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빌립보 가이사랴>로 여행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난 누구냐>란 질문이었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제자들은 3년 동안 따라다녔습니다. 말씀을 듣고, 하시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과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조만간 하늘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남은 것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과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모든 일은 제자들이 맡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일을 맡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테스트를 하셨습니다. 그 테스트가 바로 이 질문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므로 이 질문은 3년 간의 제자학교를 총결산하는 졸업 시험문제와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왜 하필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하신 것일까요? 갈릴리에서 걸어서 하루 꼬박 걸리는 여기까지 힘들여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쉬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요. 그 곳은 헐몬산의 눈 녹은 물이 흘러 요단강이 발원되는 곳입니다. 화면에서 보시는 대로 헐몬산의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는 이 곳이 바로 빌립보 가이사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까지 오신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이 곳은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도시였습니다. 본래 이 곳은 헐몬산의 만년설이 올려다 보이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이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로마황제의 칭호인 <시이저>, 즉 <가이사>에 자신의 이름인 <빌립>을 붙여 <빌립보 가이사랴‘ Philippi Caesarean>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도시는 로마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곳이었습니다. 

이미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 시절에도 로마의 통치자를 기리기 위한 건축물이 들어섰는데, 다름 아닌 최고 권력자 아우구스투스 신전이었습니다. 화면에서 보시는 것이 신전 터의 일부입니다. 헤롯왕은 아직 아우구스투스가 살아있던 주전 19년에 그를 기리기 위해 대리석 신전을 지었습니다.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있는 신이었습니다.

둘째로, 이곳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곳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신전 외에도 목자들의 신이라고 불리는 판(Pan) 신전이 있었습니다. 화면에서 보시는 것이 판신전의 일부입니다. 저 큰 동굴은 판 신에게 제물을 던지던 곳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판 신을 섬겼을 상상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바로 거기서 <내가 누구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황제의 도시에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입은 옷은 너무도 초라해서 어쩌면 신전의 노예보다도 더 초라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분이 물으셨습니다. <여기 사람들이 섬기는 신전이 있다, 그리고 최고의 권력자를 섬기는 신전도 있다. 내가 여기서 묻는다. 그들이 신이라면, 사람들이 그들을 섬긴다면, 나는 누구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따르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행색이나 입장을 보면 엘리야 정도로 보아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또 수많은 사람이 추종하는 세례 요한 정도로 보아주는 것도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에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실 첫 질문은 이 질문을 위한 연습 문제에 불과했습니다. 정말 묻고 싶은 것은 두 번째 질문이었습니다. 

그 때 위대한 신앙고백이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한 시몬이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은 정말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우선 시몬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시몬은 로마 황제도, 판 신도 자신들의 구원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황제는 자신들의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점령했고, 착취했습니다. 칼로 다스렸습니다. 아무리 권력의 힘이 강하고, 로마의 학문과 문화가 꽃을 피워도 그것으로 자신들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 당신뿐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또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당신은 그 보다 못한 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다. 아버지도 사람이고, 그 아들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므로, 그 아들도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은 <당신이 곧 하나님>이란 고백이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로마 황제 정도가 아닙니다. 그 분은 황제들의 황제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을 세우고 폐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또 그는 예수님을 <살아 계신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그 곳에 가셨을 때는 이미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지 오래였습니다. 최고의 권력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 없어지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세상이 죽일 수 없는 영원한 분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으나 그 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 분은 세상 모든 것을 태워 소멸시킬 수 있으나, 자신은 모세가 광야에서 본 것처럼 꺼지지 않는 불입니다. 

이것이 시몬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이 고백을 붙잡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수입이 좋은 갈릴리의 어부 생활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로마 정부에서 장려하던 어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고기는 아무나 잡을 수 없었습니다. 당국의 허락을 받은 소수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시몬은 <어업권>을 가진 상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 포기하고 예수님의 사람이 된 것은 그 고백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고백이 더욱 더 분명해졌고, 나중에는 후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평생을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로마의 권력자들과 맞서서 살아간 것도 이 고백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백하였기에 베드로는 지상의 황제인 로마 황제를 거부하고 하늘의 황제인 예수님께 순종했습니다. 당시 이런 고백을 가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권력에 의해 형장에 끌려나가면서도 그들은 하늘의 황제를 찬양했습니다. 

한 사람이 품는 사상과 고백은 그를 위대하게 만듭니다. 사람의 가치는 외모가 아니라, 그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신념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런 위대한 고백을 품고 있던 시몬은 더 이상 갈릴리의 어부가 아니라, 로마 제국을 진동시키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고백을 가진 사람들은 그 존재가 바뀝니다. 본문의 시몬은 그 날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그가 고백을 마친 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란 <반석>이란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신앙고백을 가지면 반석이 됩니다. 반석은 든든한 기초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한 곳에, 중요한 곳에 돌을 세우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뵈온 후에 돌을 세웠습니다. 사무엘은 블레셋을 물리친 후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이런 신앙고백을 가지면 그는 반석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런 사람들 위에 건강한 가정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신실한 신앙의 사람들 위에 건강한 나라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 안에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분명하길 원합니다. <남이 믿길래 나도 한 번 가 본다>거나, <아직은 잘 몰라>란 말을 언제까지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을 우리 각자의 구원자요,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길 원합니다.

이 고백이 분명할 때 우리의 신앙과 삶은 정당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 고백은 <왜 교회에 가느냐, 왜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집사와 권사가 되었는냐, 왜 새벽부터 밤까지 그 분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가, 왜 그 분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가> 등의 질문에 대한 정당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지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이런 고백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아닌 다른 존재, 즉 세상의 물질, 권력, 명예 등을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로마 황제와 판 신을 섬기는 사람들로 넘쳐나던 빌립보 가이사랴와 같습니다. 이런 세상의 한 복판에서 <예수님만을 구원자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가>,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사람의 생각만으로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복을 우리 모두 받게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이런 분명한 고백을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기서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 Karl Barth>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2층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두 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가에 서 있는 사람은 길거리의 사람들이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습니다. 건물 돌출부가 시야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가 길거리의 사람들이 보는 것을 함께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뛰쳐나오십시오. 개인적인 지식, 경험, 판단의 집 안에 머물지 마십시오. 은혜의 거리로 나오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분명한 신앙이 고백될 수 있게 해 달라고 엎드리십시오. 분명한 신앙고백이 생길 때까지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그 분을 위대한 스승이나, 선지자나 성인 군자 정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신실한 믿음의 동지들과 함께 하늘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분을 더 이상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지 말고, 분명하게 볼 수 있길 원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우리의 죄를 씻으신 분입니다. 우리 인생의 치유자입니다. 보호자요 인도자입니다. 우리에게 참 행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 삶은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무의미성을 극복하고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그 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독백이 아니라, 이제 우리 모두의 소리를 모아 함께 고백하십시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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