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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몰약 산과 유향 산으로 (아 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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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약 산과 유향 산으로 (아 4:6~10)

  
「사랑하는 신부야, 이렇게 치유하라.」는 책을 보면 저자는 천국에 대한 경험을 고백한다.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는데 주님에게 신방을 보여 달라는 내용이다. 신랑으로서의 주님을 만나 너무 기뻐하며 든든한 믿음을 지니게 된 저자는 이렇게 질문한다.

“주님, 주님이 꾸며 놓으신 신랑, 신부의 방을 먼저 보여주시지 않겠나요?”

“나도 아직 신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왜요?”

“나는 유괴된 자녀들을 되찾아 아버지에게 드림으로서 그 분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그 피가 멈추게 되는 순간까지 결코 신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존재한다.”

저자는 천국을 가면 신방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에 실망하게 되었다. 그때 주님은 저자를 불러 군인의 옷을 입혀 준다.

“일어나 함께 전투하러 가자. 유괴된 자녀를 아버지에게 모두 되찾아 드릴 때까지...”

그래서 저자는 울어버린다. 신부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주지 못하고 전사의 옷을 입혀야 하는 신랑의 안타까운 사정이 울음을 터트리게 하였다. 아직도 험난한 손으로 낫을 들어 곡식을 거두고 성령의 검을 드셔야 하는 신랑의 모습에서 저자는 이렇게 아뢰인다.

“주님, 용서해 주세요.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래서 저자는 전사의 옷을 입고 일어선다. 아버지의 눈물이 웃음을 바뀌고 있었다. 자녀를 품고 기뻐할 때까지 결코 웨딩드레스를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한 꿈을 꾼 자신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인지 깨닫고 회개를 한다. 

  
이 책의 이야기는 어쩌면 아가서 2장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신부가 왕의 사랑을 받고 깊은 포옹 속에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차이가 나타난다. 사랑의 기를 꽂고 포옹 속에 있어야 할 신랑이 산에서 달리고 벽 뒤에 서게 된다.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인데 주님과 신부가 떨어져 있다. 무슨 연유인가?

사랑은 단꿈이 아니다. 꿈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삶의 현실이다.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면 응답 받고 주님의 만져주시는 위로의 포옹이 있을 때 신앙이 완성된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완성이 아니다. 사랑은 더 성장되어야 하는 진행형이다. 사랑이란 단꿈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의 원하는 뜻을 따르는 단계로 가야 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주님과 연합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아가서 2장은 신부가 신랑과의 단절을 맛본다. 그래서 신랑이신 주님은 음성을 들려준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아가서 2장의 ‘일어나라’는 음성 앞에서 신랑을 따르며 함께 가려고 애쓰는 신부의 모습이 엿보인다. 아가서 3장은 결국 사랑하는 자인 신랑을 찾아 나선다. 그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솔로몬의 가마를 타고 움직이는 혼인 행진이 묘사되고 있다. 아가서 4장은 혼인이 이루어지므로 왕과 연합하는 처녀 신부의 7가지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아4:6의 본문에서 우리는 시작도, 끝도 없는 신부의 말이 터져 나온다. 여인의 깊은 결단이다. 누가 가르쳐주어 선동했기에 나온 말이 아니다.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왜, 갑자기 이런 결단을 하는가?

  
1. 신부가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아가서 2~3장에서 신부는 신랑의 뜻과 자기 생각 사이에서 차이와 다름을 느꼈었다. 신부는 거기서 자기 중심의 사랑, 이기주의를 보았다. 그런데 사랑이란 자기 만족이 아니고 동행하는 것이며 상대방의 요구에 대한 귀 기울임과 순종임을 알게 되었다. 신부는 옛날의 부족했던 자신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더 나은 사랑을 알고 성숙된 실천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몰약 산과 유향의 산으로 가리라는 말을 한다. 그것이 바로 성장에서 나온 말이다.

2. 신부가 사랑을 계속 받았기 때문이다.

아가서 4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왕은 슐라미를 계속 아름답게 보았다. 신부의 어느 부분, 어느 모습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랑을 받으면 사람은 사랑 받은 만큼 부드러워진다. 사랑 받은 만큼 나를 내어준다. 주님이 신부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사랑은 언제나 동일하다. 주님은 계속해서 부어주신다. 계속해서 사랑하고 있다. 눅7:36에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았을 때 한 여인이 주님 앞에 나아가 눈물로,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어 드린다. 향유를 부어 세족식을 하고 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 행동을 비웃을 때 예수님은 그 여자에 대하여 언급하신다. 

“나를 청한 너는 나를 입맞추지도 않고 기름도 붓지 않고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너와 다르다.”

그래서 눅7:47에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라고 하시고 사랑을 많이 받은 여인이기에 옥합을 깨뜨리고 계산을 뛰어넘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셨다. 사랑을 변함없이 받은 신부는 이제 어떤 희생도, 고통도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드리는데 계산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기쁨으로 놀라운 일을 결단하는 것이다.

3. 신부는 때를 읽을 줄 알기 때문이다.

신부는 신랑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함을 더욱 열망한다. 그 때가 바로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다. 어쩌면 미뤄서도 안되는 바로 지금이라는 때이다.

아4:6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날이 저물었다. 그림자가 지나갔다. 이제 새 날, 새 하루가 시작된다. 찬란한 새 아침에 거하는 신부가 되려면 미리 몰약 산으로 가야 한다. 준비된 열망으로 어서 가야 한다. 하루가 끝나고 밤이 오면 아침이 오는데 그 새 날의 때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 준비를 하지 못한다. 때를 읽고 산으로 가려는 이 신부는 정말 주님과 일치하려는 열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주님 중심의 사랑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날이 기울고 우리 인새에 그림자가 갈 때에 우리는 때를 어떻게 읽고 준비하는가? 밤이 오든, 새벽이 오든 아무 상관 없이 지내는가? 때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인지, 일어설 때인지, 누울 때인지, 일할 때인지, 울어야 할 때인지를 아는 자만이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부가 결단하고 가려는 몰약 산과 유향 산은 무엇인가? 

몰약 산은 쓰디 쓴 고난의 언덕 길이다. 유향 산은 향기 나는 달콤한 언덕 길이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향기 나는 생애를 모두 다 따르려는 신부의 다부진 각오다. 

신앙 생활은 평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더 힘들 수 있는 몰약의 산으로 가는 것이다. 고통의 십자가를 따르려는 걸음, 향기 나는 주님의 생애를 닮으려는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사랑이기에 스스로가 산으로 갈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산으로 향하는 신부를 향해 칭찬한다.

아4:7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신부의 모습은 검고 게달의 장막 같다. 포도원 지기로서 햇볕에 그을렸다. 온갖 흙투성이며 시골뜨기의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은 몰약 산, 유향 산을 향하는 신부에게서 흠이 없다고 말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의다. 누더기 옷을 입은 촌부에 불과하지만 아름답게 흠없이 보아주시는 의다. 칭의란 내가 죄인이지만 죄인으로 봐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님은 오히려 놀라는 것이다. 고통의 길, 눈물의 길, 다리 아픈 길일지도 모르는 몰약 산, 유향 산으로 가려는 신부의 결심을 보고 흠 있는 신부를 흠이 없다고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다. 의롭다 여기는 은혜다. 그래서 아4:8 “내 신부야”라고 불러주신다. 그 동안 아가서 1장에서부터 4장 7절까지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내 사랑” 등 이런 표현은 있었어도 나의 신부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부터다.

주님은 신앙이 고통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하는 자에게 그냥 있을 수 없다. 주님의 거룩한 생애, 그 인품을 닮으려고 하는 자를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내 신부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삶 속에 가장 친밀한 자로 생각하시고 더 높은 곳으로 계속 이끄신다. 나와 함께 가자고 이끄신다. 그래서 십자가는 나의 자랑이고 나의 길이다.

그러면 그 길에서 누리는 것이 있는가? 가혹한 고난만 있는가? 아니다. 고난은 영광이 된다.

첫째, 주님은 신부에게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신다. (아4:8)

아4:8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주님은 성도를 높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끌려고 하신다. 즉, 신부가 새로운 것을 경험하도록 영적 세계로 이끄신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이끄심으로 몰약 산, 유향 산에서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로 간다. 높은 곳에서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이다. 넓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미처 보지 못한 경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아마나 산은 레바논 산의 서쪽 산이다. 이는 아멘의 뜻이 있다.
스닐 산은 레바논 산의 남쪽 산이다. 이는 전신갑주 무장의 뜻이 있다.
헤르몬 산은 레바논 산의 동쪽 산이다. 이는 승리의 뜻이 있다.
영적인 높은 세계는 다양하다. 

신부는 신앙의 견고함을 얻게 된다. 아멘의 산에 오른 것이다. 
전신갑주 무장의 산에 오른 것이다. 승리의 산에 오른 것이다.
주님이 높은 곳으로 이끄실 때 올라가는 신앙, 함께 따르는 신앙, 고로 3천 개의 산이지만 그 산으로 가는 신앙, 그 신앙은 영광이 된다. 흔들리지 않는다.

  
둘째, 주님은 영적 사탄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아4:8下)

아4:8下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

높은 산에 위치한 성도는 모든 것을 내려다보지만 사자의 굴과 표범 산도 함께 본다. 내려다보는 것은 좋지만 시야가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가까이서 으르렁 거리는 사자가 있고 표범이 있다. 우리의 영적 세계, 높은 곳에 오른 천상의 세계는 아멘과 무장, 승리의 자리인데 어두움의 세력이 노리고 있다. 신앙은 언제나 깨어있을수록 악령을 대적하는 생활이다. 악의 세력이 존재한다. 악의 세력은 곁에 있다. 우는 사자는 멀리 있지 않다. 이것을 망각하지 말고 깨어있어야 한다. 언제나 영적 대결을 기억하며 유혹의 산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가자.
  

셋째, 주님은 신부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음을 보여주신다. (아4:9)

신부의 영적 성장과 깨어있음, 사랑은 단꿈이 아니고 현장으로 뛰어드는 것임을 실천할 줄 알 때 몰약 산으로 가는 결심이 더 큰 성장을 가져다주고 그런 신부에게 주님은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다. 

아4:9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아4:10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주님은 우리가 신령한 세계로 올라가는 성장을 계속하면 우리를 누이로 불렀다. 신부로 불렀다. 사랑스러워서, 아름다워서, 예뻐서 어찌할 줄 모른다. 주님도 신부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라고 하였다. 왕의 궁중에 있는 포도주가 얼마나 많은가! 왕의 궁중에 향품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많아도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따를 수 없다. 만 가지 포도주 중에 최고의 포도주가 주는 기쁨의 포도주를, 만 가지 향품 중에 최고의 향품, 그것이 바로 높은 고지에 오른 우리 성도의 가치다. 

우리는 이제부터 올라가자. 산으로! 몰약 산과 유향 산으로 가기를 피하지 말자. 

우리교회는 성전 건축을 할 때 -17억은 몰약 산으로 가는 걸음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해 유향 산으로 가는 걸음이었다. 성도들이 모두 그 길을 걸음으로써 우리는 복을 받고 있다. 금번 9월 6일 건축 헌금 드리는 날! 우리는 피하지 말자. 올라가려 하되 적극적으로 가자. 더욱 더 일어나서 가자. 레바논에서부터 높은 경지의 자리로 올라가자. 

주기철 목사, 그는 신사참배 반대로 옥 중에 갇혔다. 회유하기 위해 그를 풀어주고 가정을 되돌려 보냈다. 그러나 사모님은 안일을 찾아서 나온 주 목사를 냉정하게 대했다. 순교의 길, 십자가의 길, 주님이 원하는 고통의 몰약 산을 오르라면 가야 한다고 등을 밀었다. 순교라는 영적 높은 세계를 향해 주 목사는 옥으로 돌아갔고 그 사모님은 순교의 영광을 회피하지 않았다. 

유혹과 도전, 넘어뜨림이 있다. 하지만 주의 신부된 자들은 똑바로 내려다보자. 사자 굴과 표범 굴도 있음을 알자. 거기서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산 꼭대기에서 보는 성도가 되자. 그것이 주님의 마음을 빼앗는 신부의 진정한 모습이다. 가장 흠이 없고 아름다운 성도는 어떤 고난의 길이라도 피하지 않고 가는 것이다. 금번 기도향연 축제, 그 일주일동안 은혜를 내려주셨다. 몰약 산과 유향 산으로 가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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