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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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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기우(杞憂)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기인우천(杞人憂天)의 약자입니다. 기 나라 사람 하나가 나무 밑에 앉아 큰 걱정을 하고 있어서 그의 친구가 까닭을 물었더니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이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지금 당장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땅이 꺼지지 않을까 하는 근심으로 음식이 제대로 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잠도 잘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친구가 말하기를 “하늘은 단지 기체가 쌓인 것뿐이니까 무너질 염려는 없다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또 “그럼 땅이 꺼지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염려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일로 지나치게 걱정을 하는 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기인의 우’(杞人의 憂) 즉 ‘기우’(杞憂)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근심 걱정, 불안과 염려들이 떠날 때가 없습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닌 진 자 누군가♪라고 했습니다. 불교에서 쓰는 용어 가운데 ‘백팔번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근심과 번뇌가 얼마나 많으면 100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서 8 가지가 더 있다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근심의 종류가 108 가지뿐이라면 그도 다행한 일이겠으나, 실로 셀 수없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근심인 것입니다. 염려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나름의 근심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대는 더합니다. 옛날 농경 사회와는 달리 고도의 문명 속에서 현대 사회는 무한경쟁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변화에 적응하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스트레스가 적지 않습니다. 전에는 먹고 살기 바빠서 스트레스를 인식할 틈도 없었다면, 오늘날에는 조그만 일에도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 때문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세상 끝날 까지 인간에게 있어서 근심 걱정은 떠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에게 근심 걱정은 커다란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산상 보훈을 하시는 중에 올바른 물질관에 대한 가르침에서 이제 염려 문제로 옮겨갑니다. 25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그릇된 물질관은 신앙 성장에 크게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잘못된 물질관이 신앙생활에 크게 저해가 되듯이, 염려는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저해하는 대표적인 문제라고 활 수 있습니다. 마치 감기가 만병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염려는 성도의 신앙성장을 크게 가로막는 불신앙적인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염려가 가득한 심령은 마치 가시밭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염려가 많은 사람을 일컬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염려로 가득한 심령의 토양에서는 말씀도 자랄 수 없고, 따라서 신앙 성장도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염려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의식주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가 가벼운 문제는 아닙니다.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고 크고 중대한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고 염려하는 너희의 삶을 생각해보아라. 

너희는 목숨을 어떻게 받았느냐?” 그 답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우리의 목숨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나님께서 음식이나 의복보다 훨씬 더 큰 선물인 목숨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그 보다 더 작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고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자식에게 자동차를 선물로 사주었다면, 그 자식에게 볼펜 한 자루를 주는데 인색하겠습니까? 결코 그런 분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의식주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들면서 우리에게 이중적인 논증을 제시하십니다. 26절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공중의 새는 나무 가지에 가만히 앉아 있는 새가 아니라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니까 가만히 앉아 아침마다 양식이 기적적으로 도착할 것을 기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게으름과 나태, 안일, 무책임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공중의 새란 먹이를 찾아 열심히 나는 새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먹이를 찾아 열심히 나는 새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벌레와 곤충들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일반 섭리로 공중의 새들까지 기르시고 먹이시는데, 하물며 그의 자녀들을 돌아보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금붕어 먹이도 사오고 먹이도 주는 아버지가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들에게는 굶거나 말거나 무관심하겠는가? 그런 뜻입니다. 

허쉘 포드 목사님의 예화가 있습니다. <물새가 참새에게 말을 했습니다. “어째서 인간들은 걱정하면서 이리 저리 허둥대며 염려하는지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참새가 물새에게 대답했습니다. “인간에겐 우리를 돌봐주시는 그런 하늘 아버지가 안 계시는 가 봐!”> 그래서 염려는 하늘 아버지께 대한 불신앙과 같은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염려는 또한 전혀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키가 작은 사람이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30cm나 더 크게 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주님께서 말씀하신 키는 사실 생명을 의미합니다. 

누가 염려함으로 생명의 길이를 오년이나 십년을 연장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염려란 무가치합니다. 무가치 할뿐만 아니라 심히 해롭습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질병의 원인 75%는 마음에서 생긴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잠 17: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상 보훈을 하시는 중에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를 가리키며 “공중의 새를 보라”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들에 피어 있는 백합화를 보시며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변의 사물을 바라보며 거기에서 놀라운 진리를 깨닫고 가르치시는 주님의 천재적인 교수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28절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땅 속에 뿌리를 내리고, 수분과 영양분을 부지런히 흡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백합화가 자랄 수 있는 토양과 햇빛과 우로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백합화 역시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송이 백합화 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 보물을 쌓는 길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영화가 임금이요, 그 중에서도 솔로몬의 영광은 대표적이지만, 그 영광을 상징하는 솔로몬의 옷도 백합화의 아름다움에 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꽃에는 그 형태와 무늬와 짜임새와 바탕과 색깔에 있어 사람이 온갖 재간을 갖고도 모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여기 수반의 꽃들을 보십시오. 어떤 옷이 이 꽃들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들에 피어 있는 백합화를 가리키며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하물며’ 라는 말은 비교급입니다. 그러니까 한 포기의 천한 들 풀도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입히시거든, 너희는 말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들에게 입을 것을 주지 않으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주님은 그들이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믿음이 적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꾸짖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믿음이 전혀 없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믿음이 적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로이드 죤스 목사는 “믿음이 적은 자들이란, 구원의 믿음만을 갖고 그 안에 머물러 서버리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믿긴 하여도, 우리의 음식과 마실 것과 심지어 의복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으로는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적은 믿음이란 1)성경 말씀 그대로 살며 적용하는 믿음이 아닌 것을 말하고. 2)환경을 지배하는 대신, 환경의 지배를 받는 믿음을 말하고 3)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깨닫지 못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이방인들의 삶이 어떤 것입니까? 31.32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방 종교의 특색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염려대신 꼭 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여기 ‘먼저’라는 말은, ‘대체로’ ‘주로’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염려하고 싶다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나의 영적 상태 등에 대해서 염려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 모든 것 속에는 의식주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외의 다른 것들까지 공급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그가 구하지 않았던 부귀영화를 덤으로 주시듯이 그렇게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 제일주의로 살기를 다른 무엇보다 우선순위로 구한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3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죤 뉴톤은 말하기를 <나는 때때로 우리가 사는 동안 겪어야 하는 고난들을, 우리가 지기에는 너무 큰 나뭇단으로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한꺼번에 옮기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는 자비스럽게 그 나뭇단을 풀어서 그 중 하나를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것이 오늘 날라야 할 것이고, 다른 것은 내일에 또 그 다음에 나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날그날의 짐만을 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쉽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본문 말씀의 중심 내용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까?

1. 염려는 불신앙과 같은 큰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근심이나 염려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염려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메림나오’는 원래 ‘나누어지다’ ‘분열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염려란 한 마디로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이 나누어진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반신반의 나누어진 마음의 상태가 염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한 불신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지하실에 갇혀 있다면 태양이 하늘에 떠 있어도 볼 수 없듯이, 우리가 근심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태양은 항상 떠있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태양이 더 반짝이고, 믿지 않는다고 태양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태양의 존재를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개인의 문제지, 태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믿음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항상 살아 계십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죽지 않으시고 죽을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죽으신다면 이미 하나님이 아닌 것이 됩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드린다는 막강한 교황권과 맞서 싸우던 마틴 루터가 너무도 힘든 나머지 한 때 낙심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루터가 낙심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왔더니 그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슬픈 모습으로 남편을 맞이하였습니다. 놀란 루터가 아내에게 웬 일로 상복을 입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여보, 하나님이 돌아가셨대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소복을 입고 슬퍼하고 있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루터는 너무도 어이없어서 “하나님이 돌아가셨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쏘아 붙였습니다. 그러자 루터의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왜 당신이 그렇게 낙심을 한단 말이요!”라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루터는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용기백배해서 마침내 종교 개혁의 위업을 달성했다고 합니다. 믿으면 맡기게 되는 법입니다. 아내를 믿기 때문에 돈을 다 맡기는 것이지 만일 믿지 못하면 절대로 맡기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말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문제를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 ‘무디’라고 하는 대 전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의 끝은 신앙이고 신앙의 끝은 염려다.” 그러니까 염려 버리면 믿음으로 살고, 믿음 버리면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믿음으로 사시겠습니까? 염려하시며 사시겠습니까? 염려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믿음이 고갈된 상태입니다. 믿음이 충만하면 염려는 우리에게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2. 염려는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자동차에 앉아서 기어를 중립에 놓고 시동을 건 다음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는 것과 같습니다. 기어를 중립에 놓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보십시오. 소리는 요란하고 엔진은 나 죽는다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차는 한 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에너지만 소비합니다. 소음만 요란합니다. 염려는 이와 같이 사람만 요란하게 합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에너지만 소모시켜 버립니다. 그러니까 무익하고 쓸모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많은 병은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옵니다. 육체가 병이 들지만 그 뿌리는 마음에 있습니다. 오늘날 고혈압, 류마티스, 심장병, 두통 이런 것들은 다 마음의 불안, 스트레스, 염려, 근심에서 발병한 것입니다. 한 의과대학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환자의 약 20%는 근심과 스트레스에서 병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노벨 의학상을 받은 알렌스 카렐 박사는 “근심과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고 했습니다. 위장병은 음식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심, 걱정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가장 무서운 것은 암이 아니라 마음의 근심입니다. 

내가 주도하는 삶은 항상 “만약에 그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근심과 걱정이 떠날 날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도하는 삶으로 바뀌면 항상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해결하심을 믿기 때문에 아무리 큰 문제가 닥쳐와도 능히 정복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할 때, “나의 믿음이 어디 있는가? 나의 믿음이 어디에 갔는가?” 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인생의 미래는 내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염려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평강이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미국 텍사스주 콜로라도 주립대학에서 7년간 2만 2천명을 대상으로 사람의 수명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불신자와 신자에 대한 수명을 연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은 신자는 평균 수명이 82세였고, 불신자는 75세였습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불신자보다 7년을 더 산다는 얘기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규명을 해보았더니, 신자는 주일에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면서 은혜를 받아서 스트레스를 풀고 모든 염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기고 주 안에서 평안을 얻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정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365일 동안 매일 매일 살면서 염려하지 말고 살라는 의미에서 그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염려하고 근심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다 맡겼네.♪ 근심 걱정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맡겨버리고,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성도들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서 다 해결해 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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