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늘의 복 (마 5:10~12)

  • 잡초 잡초
  • 445
  • 0

첨부 1


하늘의 복 (마 5:10~12)
  

저는 요즘 나름대로는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먼저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믿습니까?
때로는 우리에게 져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져주시기도 하십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을 말할 때 ‘복을 주시는 분이다. 상을 주시는 분이다’하면 
일단 기복신앙과 연관을 짓고 무조건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기복신앙이라는 것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없이 
또 아무런 윤리적 책임 없이 
그냥 눈에 보이는 물질적 복을 받기만을 소원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 것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내 건강을 내가 지킬 수 있습니까? 내 재산을 내가 지킬 수 있습니까?

내 생명도, 내 자녀도 우리가 주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까지 살아온 것도 알고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는 분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복이라는 개념이 성경의 말씀과 세속적인 것이 다릅니다. 
그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건강하고,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 명예를 드높이고,
장수하는 등 이런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이기보다는
보다 내면적이고, 인격적이고, 영원한 것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소위 팔복의 말씀은 모두 
천국백성의 성품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팔복의 마지막 단계로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적인 상식으로 보면, 이해가 잘 안 되는 말씀입니다.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니요?
그런데 그냥 박해를 받은 것이 아니고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올바르게 살려고 하다가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군사독재 정권하에서는 불의를 불의하다고 지적하면 감옥에 갔습니다. 
때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11절에는 ‘나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초대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증인은 곧 순교자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헬라어 마르투스(martus)는 바로 증인이라는 말과 순교자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증인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이렇게 최후를 맞았습니다. 
“처형자들은 그를 채찍으로 몹시 때렸으며 마침내 불태웠다. 
신체의 극히 내부에 있는 내장까지 환하게 드러났다. 

처형자들은 미처 타지 못한 신체를 창 끝에 걸어 놓고 
야수의 밥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가 화형에 처하기 직전에 ‘네가 만약 이제라도 로마의 시저를 숭배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지금까지의 박해를 그만두고 특별히 대우하겠다.’

이 제안을 들은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86년간 나를 해침이 없이, 한 번도 나를 부인하지 않으신,
나에게 성실하셨던 나의 왕 나의 주님을 내가 어찌 지금 부인할 수 있겠소?
나는 주님을 사랑하오”
왜 폴리캅은 타협하지 않고 차라리 그 박해를 받아들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하늘의 상급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상급을 예비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하늘의 상급이 얼마나 좋은지 
그 동안 받았던 고난과 핍박을 잊을 수 있도록 온전히 보상해 주십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죽으면 끝나는 거지, 무슨 죽음 이후에 상급이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아주 세속적인 가치관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면, 순교자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만 불쌍할 뿐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이 세상이 전부라면, 
영생을 믿고, 천국을 믿는 자처럼 불쌍한 사람이 다시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재미도 모르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다가 가는 사람처럼 
손해 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저 자기 잇속이나 챙기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단의 거짓말입니다. 그 거짓말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죽음 너머에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하셔서 천국에 이르도록 위해서입니다.
만약 천국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며, 신앙생활은 무의미합니다. 
사랑이나 희생, 헌신과 봉사도 무가치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죽음 너머의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그 나라로 건너가는 다리와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엄마의 태중에서 10개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엄마 뱃속은 아무리 편하고 좋아도 10개월 이상은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보면 엄마 뱃속은 너무나 좁은 세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도 전부가 아닙니다. 
기껏해야 100년을 넘기기 어려운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의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삶은 바로 영원한 세계를 위한 준비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고난이 많고 아픔과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에서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롬8:18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 사도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영적인 싸움을 잘 싸웠습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이 씌워주실 
의의 면류관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 있었습니다.

딤후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씌워 주실 의의 면류관이야말로 하늘의 복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가 어떻게 아느냐? 네가 천국에 가 봤냐? 이렇게 물을는지 모릅니다. 
물론 저는 천국에 가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이 진리라고 믿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하늘의 복이 진짜입니다. 하늘의 복이 영원합니다. 
세상의 복과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이 복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늘의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마5:44)

예수님 이전까지 일반적으로 가르치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가르쳐 주십니다.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지금까지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마5:46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세리가 하는 정도로 사랑해서는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 사랑해야 하고 오히려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숨겨진 의미이지만 하늘의 상이 있을 것이라고 웅변하고 있습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네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는 원수를 내 손으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내게 손해를 끼치고 나를 아프게 한 것보다 더 크게 갚으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원수를 도와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늘의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 우리의 힘으로는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셔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길 바랍니다. 

2. 사람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합니다.(마6:2) 

예수님께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가르쳐 주시면서 강조하신 것은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마6:2, 5, 16)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하늘의 상으로 갚아주신다는 겁니다. 
의로운 일을 하는 것도, 구제하는 일도, 기도와 금식도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으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사람 눈에 잘 띄는 곳에서만 하려고 합니다. 
사람에게 칭찬받을 수 있도록 빛이 나는 것만 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도 상을 받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칭찬입니다. 
그러나 이미 자기가 받을 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받을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알아 주든, 안 알아 주든, 칭찬을 해 주든, 안 해 주든,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야,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뜻 아닙니까?
사실 누구든 사람들의 칭찬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고래도 칭찬을 들으면 춤을 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은 칭찬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뭔가 잘한 사람에게는 칭찬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행을 하는 사람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늘의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칭찬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칭찬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이 훨씬 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선한 일을 했는데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하늘에서 받을 복이 있음을 믿고 기뻐하고 감사하기 바랍니다. 

3.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때 하늘의 복이 있음을 믿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마5:10-12)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자기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은 아무런 상이 없습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였는데도 고난을 받았습니까? 너무나 억울합니까? 
그래도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벧전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고난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기도 합니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고난은 죄에 형벌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인도 고난을 당합니다. 

욥의 고난을 보십시오. 요셉을 보십시오. 
그들은 극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은 변장된 축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은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그 고난 때문에 시험에 빠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약1:2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벧전1:3-4 하나님은 우리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에 간직한 유업을 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복을 사모하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좋습니다. 하늘 복 많이 받으세요.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