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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박넝쿨로 인하여 (욘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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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넝쿨로 인하여 (욘 4:1~11)


아밋대의 아들 요나(비둘기)는 스불론땅 가드 헤벨 출신으로 당대의 유명한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그 성(城)이 곧 멸망할 것을 외치라고 했습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에서 동쪽으로 0.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라크내에서 모술(Mosul)로 불리워지는 지역의 교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니느웨성과는 정반대되는 다시스로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이 보낸 큰 풍랑을 만나 제비에 뽑혀 선원들로부터 바다에 던지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고기 뱃속에서 삼일삼야를 회개하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큰 고기로부터 육지로 토해졌습니다(욘 2:10). 
요나는 니느웨 성에서 마지못해 3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사십일이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단순한 말씀을 선포한 결과 왕을 비롯하여 그 성의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였습니다. 요나가 생각해 볼 때 자신이 전한 메시지에 이와 같은 반응이 나타난 것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요나는 성 밖에 나가 초막을 짓고 앉아서 과연 이 성이 어떻게 될까 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한 박넝쿨을 준비하여 요나의 머리에 내려 쪼이는 햇볕을 가리게 했습니다. 요나는 폭염의 고통에서 잠시 해방되었습니다. 요나는 햇볕을 막아주는 박넝쿨로 인하여 기뻐했습니다(욘 4:6). 
하나님께서는 곧 벌레를 준비하여 하룻밤이 지난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게 했습니다. 박넝쿨은 곧 시들어 버렸습니다. 해가 뜰 때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으로 요나의 머리를 다시 쬐게 했습니다. 이때 요나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자신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탄식하는 요나에게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했습니다. 

Ⅰ 편협한 민족주의를 책망하는 말씀입 니다.

요나서 1장 3절에 『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라고 했습니다.
욥바는 지금의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항구도시입니다. 다시스는 스페인(Spain)의 무역항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했다는 말의 히브리어(리프네예호와)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 받은 사명을 피했다는 의미입니다.

요나 자신은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너무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나라는 청산될 수 없는 괴로운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전 722년 살만에셀 5세는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그 다음 왕 사르곤 2세는 완전히 이스라엘 나라를 진멸시키고 주민 27,280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왕하 17:1-6, 24; 18:11). 그 대신 자국민을 바벨론, 구다, 하맛에서 옮겨서 사마리아에 이주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열 지파는 파멸되었습니다. 그 후 사마리아인은 이방인과 혼혈되어 남방에 있는 유대인들과 반목질시하게 되었습니다(요 4:9).

앗수르는 주전 701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와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어 화를 면했습니다(대하 32:1-23). 그 후에 니느웨가 함락되어 도성을 옮겨 명맥을 이어 오다가 주전 610년에 앗수르 대제국은 멸망당했습니다. 

요나는 이러한 니느웨가 재앙을 받지 않고 용서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무시무시한 니느웨를 가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급기야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으니 생명을 취해 달라고 했습니다(욘 4:3).
편협한 민족주의 감정으로 인하여 선지자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망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편협한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정신은 아닙니다.

Ⅱ.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을 알려주는 말씀 입니다.

요나서 3장 10절에 『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그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요나의 외침을 듣고 니느웨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았습니다(3:6). 대신들과 더불어 조서를 내리고 전국에 걸쳐 절대금식을 선포했습니다(3:7). 그리고 회개운동을 거국적으로 전개시켰습니다(3:8). 

죄인들이 회개하면 무조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조건 행위가 아닙니다. 죄인들이 회개할 때 구원해주시는 것은 의무가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니느웨의 회개를 하나님께서 만족해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니느웨의 회개를 말씀하시면서 회개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 12:41). 이 세상 어디서나 초지역, 초종족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는 인간의 사고 밖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Ⅲ. 선교운동의 절대성을 알려주는 말씀 입니다.

본문 4장 6절에 『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본문 4장 11절에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라고 했습니다. 

요나의 박넝쿨에 대한 가치 평가는 자기를 태양볕으로부터 잠시 그늘을 지워준 것입니다. 결과는 요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서는 기뻐할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하룻밤 사이에 시들어 버리는 박넝쿨을 위해서는 도전하면서도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요나를 책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벌레로 하여금 씹어버리게 한 것은 이 박넝쿨이 요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 자신이 이 박넝쿨에 대한 권리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Ⅳ. 오늘의 니느웨성이 어디입니까?

① 넓은 의미에서 니느웨는 전 세계의 하나님을 모르는 영역을 말합니다. 
② 좁은 의미에서 니느웨는 우리와 직접 관련이 있는 중국과 일본과 구소련 등 비기독교 국가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평화스러운 때가 없었습니다. 
병자호란은 우리 민족의 국치입니다. 후금은 새로이 대청(淸)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황제국임을 만천하에 공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후금은 1636년 12월 청 태종이 여진족군 7만, 몽고군 3만 등 도합 12만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청군은 조선의 맹장 임경업 장군이 지키고 있는 의주의 백마산성을 피해 파죽지세로 남하했습니다. 청군이 서울을 유린하고 있는 동안 임경업은 인조에게 역으로 청의 수도 심양을 점령하겠다는 전략을 세웠으나 무산되었습니다.

인조 자신은 강화도에 피신해서 장기전을 펼치려고 했으나 청군은 이미 강화도 가는 길을 막았기 때문에 인조 자신은 가지 못했습니다. 인조는 궁리 끝에 일단 남한산성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이미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왕세자와 종친들이 청군에게 잡혀 남한산성으로 압송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인조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항복의 조건이 발 빠르게 교섭되고 이른바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송파구)의 굴욕이 현실로 닥친 것입니다. 조선은 청군에게 완전히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의 호곡(號哭)을 뒤로한 채 심양으로 끌려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등 왕자들과 대신들은 조선왕조로서는 만고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겼습니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군신의 예를 받은 후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왕자들과 척화론의 주모자, 이른 바 삼학사로 불리는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을 볼모로 데리고 심양으로 향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때 조선의 부녀자들을 함께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여전히 조선은 숭명반청(崇明反淸)을 고수했습니다. 숭명반청(崇明反淸) 정책을 지지하는 조선인들은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남탑 거리에는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을 사고파는 노예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당시 만주측은 조선인 포로들을 팔아 포상금을 마련했습니다. 남탑 거리주변에서는 팔려가는 조선인들의 울부짖음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소현세자는 조선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인 포로들은 어림잡아 50만이 넘었는데 한 사람당 몸값은 소 여섯 마리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포로들의 송환은 비싼 몸값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소현세자에 이어 봉림대군이 볼모에서 풀려 나올 때 최명길의 청과의 교섭으로 35,000명의 포로들이 귀환했습니다. 

그들을 이름하여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자진을 강요하자 많은 여인들이 자살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인조가 교지를 내려 도성과 경기도 일대는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경상도는 낙동강, 충청도는 금강, 전라도는 영산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회절강(回節江)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강에 몸을 씻을 것을 명하고 만약 이렇게 해도 돌아온 여인들을 받지 아니하면 국법으로 다스린다고 했으나 일부 사대부들은 끝까지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환향녀'란 이름이 붙여지고 이 말이 '화냥년'으로 와전되어 일부종사하지 못하고 특별히 성적으로 문란하고, 여성으로서 정조관념이 온전치 못한 여인들의 대명사로 세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중국과 우리와의 관계는 호의적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6ㆍ25가 발발하고 아군이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갔을 때 이북에는 중공군이 가담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이른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전선마다 싸움이 치열했고 후퇴와 공격을 거듭하던 중에 오늘의 휴전선이 생겨났습니다. 
일제 36년간의 강점기는 조국산하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정신까지 빼앗아 갔습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걸고 약탈과 강포를 일삼았습니다. 

① 정치적인 유린으로 인하여 체포와 구금을 능사로 삼고 전국에 2,770여 경찰서를 설치하였으며 대표격인 예로 평안남도 1개 지역에 옥사가 1,300여건이나 되었고 158,000명이 구금 희생되었습니다. 한인 군경 기관을 해체시키고 언론, 집회, 출판 자유를 유린했습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과 정신대로 끌려간 부녀자들의 희생은 현실로 남아 지금도 울부짖고 있습니다. 

② 교육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한인들의 가혹한 입학 제한과 제정적인 제한과 사상 및 신분적인 제한으로 엄청난 교육의 불이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③ 경제적인 파멸을 가져옴으로 농업생산, 수산업, 광업생산, 임업생산을 강제 아니면 헐값으로 갈취했습니다. 

④ 종교적인 압박은 기독교에 집중되었습니다. 내선일체 사상으로 인한 신사참배강요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신사참배는 민족정신을 말살하겠다는 일본의 야심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굴복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죽음을 각오한 항거가 있을 뿐 이었습니다. 

이때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알게 모르게 희생되었습니다. 
일제는 민족정신을 말살시키는 작업을 집요하게 추진하였습니다. 청계천의 본래 이름은 개천(開川)인데 일본인들이 청계천이라고 지었습니다. 상수도는 우물이 담당하고 하수는 개천이 담당했습니다. 

덕수궁(德壽宮)은 본래 경운궁(慶運宮)으로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였는데, 고종 때 덕수궁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덕을 끼치고 살면 목숨은 보장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우리 궁궐에다 동물원을 만들고 돌을 걷어내고 잔디(떼)를 깔았습니다. 원래 잔디는 사초(莎草)라고 하여 죽은 사람 묘에만 사용했습니다. 일본인들의 속셈은 궁을 잊어버리라는 메시지입니다. 심지어 1915년에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 공진회를 개최했습니다. 이것은 궁궐의 개념을 잊어버리도록 박람회를 연 것입니다.

소련은 6ㆍ25 동족상잔의 비극의 주인공이 분명합니다. 김일성을 훈련시켜서 남침을 감행케 조종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남북 분단의 냉전체제에서 민족의 양심과 학문의 자율성을 유린당하였고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신흥재건국 베트남도 우리와는 월남파병이라는 전쟁역사로 더 뚜렷한 국가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일제 식민정치와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강대국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전국적으로 수많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총살당하였고 신앙의 절개가 꽃처럼 조국의 산하에 희고도 붉게 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이들을 언제까지 적대시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허물과 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편협된 민족주의 사고방식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일본은 경제대국입니다. 소련과 중국은 방대한 자원과 함께 초강대국들입니다. 일본의 경제 위에, 중국의 힘 위에 복음을 태워야 합니다. 신흥개발도상국이 된 베트남에 우리 교단이 장로교단을 세운 것처럼 말입니다. 

구 소련 지역에 교회운동이 세차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외 브라질과 인도와 특수지역에 선교활동이 세차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택한 주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면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선교사명을 받은 오늘의 교회가 의심 없이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폭을 넓혀 그들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박넝쿨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영혼이 있습니다.
우리의 박넝쿨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명예입니까? 자녀입니까? 오늘의 교회가 박넝쿨의 귀중함을 알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영혼의 가치를 생각할 줄 모르는 캄캄하고 답답한 부분이 없지 아니합니다.
박넝쿨의 가치를 인간 영혼의 가치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비정한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박 넝쿨만 아끼고 사람의 영혼을 아끼지 아니할 때 하나님은 벌레를 보내어 우리의 박넝쿨을 씹어 버리게 할 것입니다. 뜨거운 동풍과 햇볕을 보내어 그 잎마저 시들게 하고 날아가 버리게 합니다. 박넝쿨이 내 머리를 덮고 시원하게 할 때 교회운동을 생각해야 합니다.
데이비드 흄이 인간의 본성론에서 말한 "내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한 살인적인 이기주의가 부끄럽지 않는 시대입니다. 

로마서 11장 12절에 나오는 '충만'이란 단어는 종말론적 의미를 갖습니다. 곧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의 완전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먼저 유대인의 충만한 수입니다. 로마서 11장 12절에 『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입니다. 이 양자를 합한 수가 온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입니다. 로마서 11장 25-26절에 『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 숫자는 곧 14만 4천입니다.
계시록 7장 4절에 『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 '십사만 사천'은 여자적 숫자요 구원받을 총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7장 9절에 『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라고 했습니다. 선택받은 수가 찰 때까지 우리의 전도 운동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시기가 반시동안 고요한 시간입니다. 계시록 8장 1절에 『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은 제한된 짧은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고요한 잠정적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예고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는 시간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간은 성도들의 기도가 제물로 드려지는 시간입니다. 

계시록 8장 3-5절에 『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사랑하듯이 박넝쿨보다 인간의 영혼을 더 사랑합니다. 박넝쿨은 인간 영혼 구원을 위한, 즉 교회운동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고 박넝쿨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는 주님 앞에 오늘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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