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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삽니다 (고후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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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삽니다 (고후 5:6~9)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6-9) 

넬슨(Tommy Nelson)이 쓴 <성공적인 경건생활의 열두 가지 요소들>(The 12 Essentials of Godly Success)이라는 책에서 컬트(Curt)라는 소년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컬트는 13세 된 지체지적장애자이다(Physically and mentally disabled). 그는 말도 못하고 약간 허약한 체질이다. 겨우 스스로 화장실에 갈 수 있고 밥을 먹을 줄 안다. 그는 당신을 포옹할 줄 알고 당신을 사랑할 줄도 안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좋아한다. 덩치가 크든 작든, 남자든 여자든, 어떤 인종이든지, 수입에 관계없이, 성공했든지 부랑아든지, 그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만약 여러분이 컬트를 포옹하면 그도 여러분을 포옹한다. 그는 어떻게 느끼는지 표현할 줄 모른다. 대신에 기뻐 소리친다. 그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모두 그를 잘 보살핀다. 그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는 안다. 그는 큰 눈을 갖고 있다. 만약 당신이 그에게 질문하면 한참 생각하는 듯하다가 “예,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하고는 깔깔대며 웃기만 한다. 무엇이든 그를 기쁘게 하기만 하면 소리치며 좋아한다. 

컬트는 아침에 일어나서 요구르트를 욕조 위에 앉아서 먹는다. 삶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 다음 식사가 어디서 올 것인가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에게는 관심 밖이다. 왜냐면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는 줄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빠는 6.2feet에 280파운드가 나가는 거구이다. 힘이 장사다. 아프리카로 사냥을 가서 사자도 잡아오고, 호랑이도 잡아오고, 곰도 잡아온다. 그것들을 박제해서 집의 벽에 걸어 놓는다. 남자 중의 남자다. 엄청난 거구의 아빠가 손을 뻗어 아들 컬트를 번쩍 들어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컬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거칠고 힘이 센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기에 컬트는 아무런 염려가 필요 없다. 기쁘기만 하다. 

이것이 컬트의 세계요, 그의 인생이다.’ 여기 컬트의 인생을 보면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컬트의 인생은 아버지가 있는 한 행복할 것입니다. 그에게 지적장애가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멋진 성경을 봉독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개역개정 번역, 고후 5:7)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표준새번역, 고후 5:7) 

표준새번역이 훨씬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신뢰)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는 것만이 다 인줄 압니다. 보는 것만 인정하려고 합니다. 인생의 문제가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늘의 아버지,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컬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인생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컬트의 인생관에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아빠를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단순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미 그 진리를 알고 있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우리 인생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It means we cannot know the future). 인생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때는 인생이 흥미진진하다가도 일순간에 매우 잔인하고 잔혹한(exceedingly cruel) 늪에 빠져 눈물과 한숨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인생입니다. 

‘리더십’을 연구하는 존 맥스웰은 그의 책에서 뉴욕에 사는 ‘아주 불행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로렌스 한러티(Lawrence Hanratty)입니다. 이 가련한 남자의 이야기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즈(the Los Angles Times)에 실렸습니다. 1984년 그는 건축현장에서 전기감전으로 몇 주 동안 무의식 상태로 누워있었습니다. 그를 위해 책임보험 배상의 법정 소송을 맡았던 변호사들 중에서 한명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두 명은 죽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러티(Hanratty)의 부인은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와 함께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러티는 큰 충돌사고로 자동차를 잃었습니다. 

더 나쁜 것은 경찰이 사고 현장을 떠나자 강도들이 몰려와 그를 강탈해 갔습니다. 보험회사는 그의 실업급여 수당을 깎기 위해 법정투쟁을 제기했고 그의 집주인은 그에게 집을 비우라고 독촉했습니다. 그의 인생이 잔인한 늪으로 점점 더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울증과 광장공포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산소통에 의지해서 숨을 쉬고 있었고 심장과 간을 위해 42개의 약을 복용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시 상담원이 그의 사건을 위임 맡아 처리하게 되었고 이웃들이 그를 돕기 위해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참으로 믿지 못할 일은, 로렌스 한러티는 그의 인생을 이렇게 요약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항상 소망은 있습니다”(There is always hope)

그렇습니다. 지금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해도 거기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산다는 것이 너무 잔인하고 잔혹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거기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발견하는 사람이 미래를 행복하게 만들어 갑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절망과 소망이 함께 공존하는 곳입니다. 슬픔과 기쁨이 함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거기에서 소망을 보는 사람은 미래가 열려집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지, 결코 보는 것에 의해 살지 않습니다(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We have no idea what might happen tomorrow). 내일의 인생이 잔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오늘밤 편히 잠들 수 있습니다. 내일을 모른다하여 불안한 잠을 자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의 도움만 있으면 우리는 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Whatever occurs, with God's help, we can make it).

우리 앞에 무엇이 놓여질지,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어떤 이는 차량사고로 하루아침에 두 다리를 잃었습니다. 어떤 이는 생명과도 같은 자식을 잃고 망연자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엎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도움만 있으면 충분히 그것을 핸들 할 수 있습니다(Whatever it is, with God's help, we will handle it). 

텍사스의 미디어 거물 밥 뷰포드(Bob Buford)가 쓴 <후반전>(The Second Half)이라는 책에는 저자 뷰포드가 몇 년 전 리오그란데 강에 익사한 아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로쓰>(Ross)였습니다. 익사한 아들 로쓰를 찾기 위해 45명의 구명요원과 사냥개를 투입시켰습니다. 비행기, 헬리콥터, 배, 그리고 경찰견 등 투입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습니다. 엄청난 경비가 났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Buford was at his wit's end). 강 상류의 200피트나 되는 절벽 아래를 걸으며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에 그는 휩싸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아들을 찾는 일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뷰포드는 “우리가 가는 길에는 전혀 꿈 꿀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돈을 갖고 살 수 없는 것도 있고, 당신이 일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들도 많다. 다만 당신이 가는 길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실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오직 믿고 신뢰할 수밖에 없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시편 23편은 온 인류가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

여기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는 영어로 “They comfort me”로 되어 있습니다. “Comfort”라는 말은 “위로한다. 안락하게 한다”는 의미가 강한 반면에 일시적인 위로와 안위가 아니라 희망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피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골짜기를 통과한다 할찌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하신다(We can make it)는 말씀입니다. 해내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소아암을 연구하는 다이안 콤푸(Diane Komp)라는 학자가 소아암 진료 중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늘로 가는 창문>(A Window to Heaven)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주로 소아암 환자의 가족들이 겪는 지옥과 같은 얘기들입니다. 죽음을 앞에 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부모는 그 아이 앞에서 강해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은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낯설고 적응이 안 되는 것은 죽어가는 그 아이가 의외로 평온하고 침착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다는 두려움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차 있는 그들에 비해 죽어가는 아이는 정반대로 평온하고, 행복해 하고, 너무 침착하였습니다. 수수께끼(Puzzle)와 같은 일입니다.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으로 사는 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부모에게 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지를 말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He had met Jesus)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에게 오시더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Everything would be all right)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아이는 더 이상 두려울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년은 열려진 하늘나라를 본 것입니다. 그 아이는 예수님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Rev. Cynthia Bacon, Http;//www.heritagemadison.org/cb011903.htm). 그러니 두려움이나 염려가 있을 리 없습니다. 평안히 죽음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이는 믿음으로 높은 경지의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이 아이처럼 갖고 있다면 우리 앞에 어떤 것이 놓여 있다 해도 핸들 할 수 있습니다. 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 우리 앞을 가로 막는다 해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과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까?(How do you acquire such trust?)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요, 교육학자인 에릭 에릭슨(Eric Erikson)은 그의 발달심리학의 가장 기초적 과제로 신뢰감의 형성(the establishment of a sense of trust)에 두었습니다. 

인간은 생애동안에 8단계로 성장한다는 이론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심리학의 타이틀이 “발달심리학”(Human development theory)이라고 합니다. Trust vs. Mistrust, Autonomy vs. Shame & Doubt, Initiative vs. Guilt, Industry vs. Inferiority, Identity vs. Role confusion, Intimacy vs. Isolation, Generativity vs. Stagnation, 그리고 Integrity vs. Despair 등 8단계입니다. 이 이론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역시 신뢰감의 구축(the establishment of a sense of trust)입니다. 인간은 신뢰감 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신뢰는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성장해갑니다. 우리는 신뢰하는 것을 통해 신뢰를 배웁니다(We learn to trust by trusting).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의 순간을 거듭하며 주님께 대한 신뢰가 자라게 됩니다. 실패를 거듭한다고 내 인생 전부가 실패하는 것 아닙니다.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경험합니다. 그 경험이 확신(confidence)을 갖게 하고 그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8-9)

몸이 갖는 한계가 있으나 주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의 삶의 목표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힘을 쓰면 우리의 믿음은 큰 믿음으로 자라서 미래의 우리의 인생을 보다 더 큰 인생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로이드 오질비(Dr. Loyd John Ogilvie) 박사가 좋은 예를 들었습니다. 서커스에서 공중곡예사들의 훈련과정에서 좋은 교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중곡예 중 절정인 장면은 공중 그네에서 높이 나르는 곡예입니다. 고도의 훈련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추락의 공포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공중그네 곡예사가 되려면 추락의 공포를 극복해야만 됩니다. 처음에는 아래에 그물이 쳐있어도 아찔할 만큼 높은 곳에서 매달려 오는 다른 그네를 향해 몸을 던져 그네줄을 잡는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실수하여 반복적으로 그물 위로 떨어지다 보면 그물이 충분히 나를 받쳐줄 수 있을 만큼 든든하다는 확신을 얻게 된답니다. 내 몸이 공포심으로 경직되거나 그물을 향해 저항하면 몸에 상처를 얻는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떨어질 때 내 몸을 그물에 부드럽게 내맡기며 떨어지면 안전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때부터 아무리 높은 정점에서 그네를 탄다 해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욱 모험심이 생기면서 공중에서 몸을 날려 다른 그네로 몸을 옮겨 탈 때 짜릿한 기분을 느끼며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중곡예사들은 떨어지는 훈련을 거듭하면서 그물이 나를 안전하게 받쳐줄 수 있다는 확신(confidence)이 생기면 그때부터 모험심이 발동하여 훌륭한 곡예를 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물에 대한 믿음과 신뢰감이 그를 더 높이 날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팔로부터 멀리 도망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팔이 안 미칠 만큼 멀리 떨어지지 않습니다. 시편기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시139:7-8)

이 고백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 까닭에 내일을 기다리며, 모험을 할 수 있고, 지금의 고통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당신의 미래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있고, 당신의 미래의 여정을 희망을 갖고 계획할 수 있게 합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설교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헨리 와드 비쳐(Genry Ward Beecher)목사님이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바닷가재(lobster) 한 마리가 어쩌다가 높은 바위 위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메마른 바위 위에 남겨진 이 가재는 바닷물이 바위 꼭대기까지 들어오지 않는 한 말라 죽을게 뻔합니다. 바닷가재는 바위에서 내려와 바닷물로 돌아갈 만큼 머리가 명석하지 못합니다. 바닷물이 들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만약 바닷물이 거기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그 가재는 계속해서 바위 위에 머물러 있다가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재가 파도를 향해 1야드 정도만이라도 그 몸을 뒹굴려 굴러 떨어지게 한다면 언젠가는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파도가 멀다고 바위 위에서 떨고만 있으면 끝내는 말라죽고 말 것입니다. 

비쳐 목사님의 요점은 우리 인간들이 바닷가재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 인생 가운데서 자신이 높고 메마른 바위 위에 남겨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비친 인생은 너무 처참합니다.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나에게 올 수 있고, 당신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만일 이때 인생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쓰라린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어려움을 하나님과 함께 맞이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몸을 굴려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 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더 큰 인생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두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과 함께 그 두려움을 맞게 되면 당신의 믿음은 더욱 자랄 것입니다. 당신을 떠받치는 곳에 당신을 안전하게 받쳐줄 사랑의 손길이 있음을 발견하는 날,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믿음은 하늘에 닿을 만큼 자랄 것입니다. 스스로 해낼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당신 앞을 가로 막는다 해도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믿음과 신뢰는 어떤 일이든지 해내고도 남을 만큼 자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지, 결코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인생의 여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이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여정을 기쁘게 마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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