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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에 앉을 자 (사 52:1~2, 마 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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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훈님의 ‘자기자리만 지키고 살아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무는 일 년 내내 자기자리를 뜨지 않는다. 자기자리를 뜨지 않는다고 계절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때마다 패션에 변화를 주고 하늘의 뜻을 잘 반영하여 꼭 서야 할 곳에 뿌리를 내린다.” 만물이 자기 자리에 있기만 해도 아름답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화가 밀레는 ‘무엇이든지 자기 자리에 있으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냇가에 굴러다는 돌 같지만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 가져다가 자기 자리에 두면 모든 돌이 아름답습니다. 반면에 앉을자리를 모르는 것은 참 추한 일입니다. 
  
앉는 자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회의장에서도 앉을 자리가 있습니다. 임원회에서도 자신이 앉을 자리가 있습니다. 모든 회의에는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다. 자리에 잘 못 앉으면 그것이 화가 될 수 있습니다. 자리는 지위이며 자리는 권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앉는 것도 권리이며 지위입니다. 
  
앉을자리란 물건이 자리에 놓이게 될 밑바닥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습니다. 앉을자리가 확실해야 놓인 물건도 빛이 더합니다. 놓일 자리가 바르지 못하면 놓인 물건도 바르지 못하게 됩니다. 자리도 좋아야 하고, 놓일 물건도 좋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4:10에는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앉을 자리에 바로 앉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른 자리에 앉지 못하면 창피를 당하게 됩니다. 
  
‘발자국지수’라는 게 있습니다. 한 사람들이 차지하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발자국지수’가  높을수록 환경훼손이 많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의자에 앉습니다. 의자란 앉았다가 일어나도 공간을 점유합니다. 우리 전통은 의자가 아니라 방석을 사용했습니다. 방석이란 앉고 나면 다시 원래 자리도 치웁니다. 공간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앉는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안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공간이 무한정하게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만찬에서 강연을 하려고 기다리던 연사가 돌멩이를 씹어 이가 부러졌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라고 하면서 주머니에서 틀니를 꺼냈습니다. 첫 번째 것은 너무 커서 맞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너무 작아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는 꼭 들어맞았습니다. 강연자는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가 부러졌을 때 큰 낭패라고 생각했는데 치과의사 옆에 앉게 되니 이런 행운도 있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친절한 그 사람은 웃으면서 “저는 치과의사가 아니라 장의사입니다”라고 했답니다. 내가 누구 옆에 앉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좋은 자리는 영광이요,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 곁에 앉는 것은 무한한 영광입니다. 
  
시편 1편에는 “오만한 자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죄인 길에 서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영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온전한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온전한 자리란 하나님의 나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앉을 자가 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말씀을 묵상하며 꼭 그 나라에 앉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에 앉는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11절에는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앉는다고 했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백부장 하인의 중풍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백부장은 “내 집에 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겸손하였고,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0절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앉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앉는 자격은 오직 믿음입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내용의 말씀인 누가복음 13:29에는 좀 더 포괄적으로 “동서남북으로부터”라고 합니다. 유대나라나 유대인뿐만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앉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앉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9:10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고 합니다. 로마서 10:12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4에는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합니다. 믿음과 구원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합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라는 말은 세계만민이 복음전파로 말미암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앉다’는 말은 ‘기대어 눕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의 식사 예법은 비스듬히 누워 식탁에 기대어 앉는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식탁에 앉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베풀어질 향연과 그 큰 기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앉아서 뭘 합니까? 먹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먹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 즐거운 일을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되면 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1에는 라오디게아에 주신 말씀 마지막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보좌에 앉는 것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무엇이 이기게 합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이겨 하나님 나라의 아버지 보좌에 앉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르틴 루터는 “나는 천국에 앉아 있었고 바로 내 옆 자리에는 내가 느끼는 천국을 지옥으로 여기는 한 사람이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을 천국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안 가는 게 낫습니다. 이런 자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깝습니다. 
  
삭개오는 믿음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오셨고 아마 예수님 곁에 앉아서 먹는 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옥합을 깨트린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고 예수님 곁에 앉게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두 맹인을 만났습니다. 두 맹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눈을 고쳐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라고 하였고 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믿음이 그들을 보게 하였고 예수님 곁에 두셨습니다. 

가나안인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주인의 먹이를 개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여인은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여인의 딸도 여인의 믿음 때문에 낫게 되었고 여인은 예수님 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고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낫게 하였고 이 여인은 예수님 옆에 앉는 허락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 때문에 예수님 곁에 앉습니다. 믿음 때문에 훗날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앉습니다. 
  
어떤 남자가 아가씨에게 “아가씨, 옆자리 비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자는 “아저씨가 앉으면 금방 빌거예요”라고 하였습니다. 옆에 앉으면 자신은 일어나겠다는 말입니다. 옆에 앉으면 좋은 사람이 있고,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리에 함께 앉기만 해도 영광인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대통령 옆에서 사진 찍은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아마 대단한 자랑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옆에 있게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앉게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합니다. 믿음의 상급을 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다 쓰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본래의 자손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납니다. 

12절에는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합니다.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그 나라를 상속하게 된 자들입니다. 유대 민족을 말합니다.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앉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한 혈통적 순수성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본 자손들이 쫓겨 어디로 갑니까? “바깥 어두운데”로 갑니다. 메시야의 잔치가 아닌 바깥에 쫓겨 갑니다. 그 곳은 영영한 절망과 죽음과 형벌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운다’는 말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이를 간다’는 것은 깊은 바다에 빠진 것처럼 절망을 의미합니다. 
  
“더러움이란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아름답지만 물에서 나와 흙에 딩굴고 있을 때는 더럽습니다. 아름답던 고기가 더러워지는 것은 ‘본질’ 때문이 아니라 ‘자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더러워집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를 보세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사는 것이 더럽습니다. 그는 돼지와 같이 시궁창에서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을 보세요. 음란하고 방탕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떠나서 자신의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이 얼마나 더러운 삶이었습니까? 성경에는 나쁜 왕들이 많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19왕이 있었지만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남 유다는 20왕이 있었는데 12왕이 나쁜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왕은 더러운 왕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 4:6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버리고, 하나님이 잊으면 망합니다. 멸망은 하나님의 품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2:13에는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고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한 달란트를 받아 남기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30에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어쫓김을 당하면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어 쫓기면 멸망입니다. 
  
우리 옛말에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말이 있습니다. 뒤에 온 것이 원래의 것을 대치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본래의 자손들은 쫓겨나고, 이방인들이 들어가서 앉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뒤에 온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안방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자말에는 ‘객반위주’(客反爲主)라는 말이 있습니다. 손님이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한다는 말입니다.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도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서로 뒤바뀐다는 뜻으로 사물의 경중, 선후가 서로 뒤바뀜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런 사태가 많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중 온 자가 먼저 된다고도 하셨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 뜻을 따라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고도 하셨습니다. 
  
먼저 온 것 내세우고, 대가에만 관심을 가지고, 감사보다 불평이나 하는 이런 자가 늦게 온 자에게 자리를 빼앗깁니다. 믿음 없이 전통만 내세우고, 혈통만 붙잡고 사는 사람들은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쫓겨난 다음에는 후회하지만 이미 늦습니다. 
  
에베소교회를 보세요. 첫사랑을 버리고 습관적으로만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십니다. 두아디라교회를 보세요. 이세벨을 용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음행하게 하고 죄를 짓게 합니다. 예수님은 큰 환난에 던지겠다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교회를 보세요. 차지도 덥지도 하는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토하여 버리리라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다 좋은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변질되었습니다. 교회의 좋은 모습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지금은 가보면 폐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시대별로 온 사람들을 구분하면 첫째는 백인들일 것입니다. 둘째는 아시아인들일 것입니다. 셋째는 흑인들과 아메리카의 인디오들일 것입니다. 최근에는 유색인종이 주류일 것입니다. 본래 처음으로 복음을 받고 세상의 복도 받았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본래의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울고 이를 갈고 있을 것입니다. 구원에서 가장 멀어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앉아 있을 것입니다. 

결론 
  
한 어부가 잡은 물고기를 시장에 내어 판 후에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여행자가 다가오더니 “왜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지 않죠?”라고 물었습니다. “난 오늘 치를 다 잡았고 이제 쉬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여행자는 “어획고를 높이세요. 그래서 모터 달린 배를 하나 사고 또 한 사람의 어부를 고용하세요. 모터 달린 배로 하루에 두 번 고기잡이를 하면 지금보다 네 배는 더 많이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직원을 고용하여 해산물 레스토랑을 하든지 아니면 통조림 회사를 설립하면 됩니다.” 이 말을 들은 어부가 말합니다. “그리고 나면요?” “그러면 더 이상 일할 필요 없어요. 온종일 이 곳에 앉아서 행복하게 바다를 바라볼 수 있지요.” 

이 말을 들은 어부는 말했습니다. “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걸요.”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행복은 많은 고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만족 때문입니다. 바닷가는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만족이 있습니다. 이 영원한 만족은 믿음만으로 가능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앉읍시다. 오랜 전통이나 혈통이 걸림이 되지 않게 합시다. 하나님의 나라 보좌에 앉는 최후의 복을 누리는 주님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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