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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후 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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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후 12:1~10)


일전에 신문을 보는 중에 유명한 축구선수 박지성에 대한 기사가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평범하기만 했습니다.  축구선수로 키가 크고 몸무게도 좀 나가야 하는데, 그는 약한 편으로 수원공고 1학년 때 키가 158cm에 불과하였습니다.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축구선수인데 그는 발이 평발이었습니다.  발바닥이 평발이라면 축구선수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학창시절에 그를 본 축구감독들은 “일단 몸부터 만들고 오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키175cm에 71Kg으로 우수한 체력은 아니지만, 평범한 수준을 넘어 특별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축구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축의 심장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신령한 안목이 있어야,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의 모든 일을 은혜로 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고난을 간증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 간증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자들이 바울을 시기 질투하여 그는 사도가 아니요, 자칭 사도요, 사이비 사도라고 대적하고 흠담하고 비방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떠났더니 교회가 사분오열되어서 바울을 비방하는데 도를 넘었습니다. 

고후1:8-9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고후11:23 이하에 보면 불사조의 정신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였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라고 간증합니다.  

오늘 고후12장에 와서 바울은 그가 체험한 환상과 받은 계시를 말하면서 그의 사도됨을 간증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바울의 인생관을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1-6절의 말씀을 보면 그는 먼저 엄청난 은혜 받은 사람이요, 자랑거리가 정말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사도로서 정말 주님이 직접 선발하신 사도라는 어떤 확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는 정말 주의 사도였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체험하지 못한 신령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의 환상과 계시를 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바울은 주님이 선발한 사도가 아니라, 자칭 사도라는 말을 하고 그를 폄하 하니, 나도 사도됨에 정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 무익하다고 판단하였으면 자랑하지 않으면 되는데, 부득불 하겠다고 하십니다.  사도바울이 아주 조심스럽게 결정하고 간증하는 것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그는 교회를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하고, 자신의 간증이 교회의 유익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시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오묘한 표현이고 심오한 듯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증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면서도 제삼자를 말하는 것처럼 둘러대면서 조심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사실은 자기 자신을 말하면서 제삼자의 사람을 인용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의 사람이요, 자기를 낮추기 위함입니다. “그는 십 사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14년 동안 한번 그 같은 간증을 하지 않은 것은 복음만 자랑하고, 오직 주님만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환상과 계시가 사도직을 옹호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득불 자랑하고 있습니다.  

셋째 하늘이란 해와 달과 별들이 있은 우주 위에 있는 하늘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하여 고통 받은 것을 간증하셨는데, 지금은 당신은 천국에 들어가 보았다고 말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 보았다고 간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간증입니다. 우리들이 가장 궁극적으로 믿는 신앙, 종말적으로 믿는 신앙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원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 믿느냐고 물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믿는다, 구원받기 위하여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기 위하여 믿는다고 하는데,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하늘나라에 이끌려 들어가 보았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었습니다.   낙원이란 의인들이 들어가는 파라다이스로 에덴 동산과 같은 낙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의 뜻하는 것은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말”, “인간의 능력으로 표현할 없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말이 필요 없는 즐거움,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고 오묘하고 기기묘묘하고, 형용색색으로 세상의 그 어떤 언어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정말 정말로 아름나라에 들어갑니다. 

5-6절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자기의 자랑거리가 많음에도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려는 순수한 의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자랑할 것 다 해놓고 이제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린도교회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간증이란 하다보면 늘어나고 증폭되어 본래의 의미가 퇴색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간증이란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인데, 이제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로 인정받으려는 마음에서 한 말이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참 자유인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삼층천을 체험한 영적인 자아를 말하면 엄청난 사람이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면 한없이 초라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2세기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바울과 데클라의 행적”이라는 외경이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책을 사도행전의 유형에 속하는 외경이라고 합니다.  이고니온에 ‘데클라’라고 하는 헬라의 처녀가 살았는데 약혼중에 있었습니다. 이 처녀는 창문을 통하여 들려오는 바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순결의 중요성을 말씀하는 바울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남자와 파혼하고 감옥에 있는 바울을 방문하여 선교사역에 힘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후에 무라에 있는 바울을 만나 은혜를 받고, 이고니온에 돌아와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합니다.   

데클라가 바울의 외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는 키가 작고, 두 눈썹은 거의 맞붙었으며, 코는 매부리코였으나 은혜는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키가 작은 사람들이 큰일을 합니다.  역사를 빛낸 위대한 사람들은 대개 키가 작았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외모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대 사도요, 셋째 하늘에 이끌려가서 가히 사람들에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인데, 육체의 가시가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7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받은 영적인 체험,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영광, 그런데다가 전세계를 다니면서 교회를 설립한 열정, 정말 대사도로 손색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자만하면 그 때부터 넘어집니다.  “그런즉 사람이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고전6:12)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사탄의 사자였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받은 것이 정말로 엄청나게 컸습니다.  자칫하면 그는 신흥종교의 교주가될 수도 있었습니다.  자만하지 않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만일에 육체의 가시가 없고, 사탄의 사자가 없었다면 자만에 빠져 잘못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도대체 무슨 병이 있었습니까?  그런 대사도가 질병에 일생 고생한 것을 보면, 신앙이 좋고 나쁜 것과 질병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질병도 있고, 자만하지 말라고 심어주신 질병도 있고, 아예 사탄의 사자로 심어주신 질병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목회하면서 질병의 문제만은 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없는 인간의 난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질병이란 정말 다양하기가 질병은 이것이라고 천편일률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사자는 받아들이기에 예민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가진 육체의 가시는 무엇입니까?  육체의 가시를 해석하는데, 많은 학설이 있습니다.  저는 목에 가시가 들어서 시내 백병원에 가서 빼낸 적이 있습니다.  손가락 끝에라도 적은 가시가 박히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가시란 말은 ‘스콜롭스’라고 하여 뽀족한 것, 뾰족한 막대기, 말뚝, 가시나무 그런 말입니다.  육체의 가시란 ? 

1) 성적인 유혹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중세의 유명한 학자들 토마스 아퀴나스. 아거스틴 라이트프트 같은 석하들의 주장입니다.  사람은 이 이성의 유혹이란 죽을 때까지 조심해야 합니다.  

2) 두통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유명한 감독으로 라틴성경을 번역한 제롬, 로마의 터튤리안, 펠라기우스 같은 학자도 바울을 고롭히는 것은 두통이었다고 합니다. 

3)  말라리아였다고 합니다.  풍토병으로 당시에 만연된 질병이었습니다.  바울은 전 세계를 여행하다보니 지방의 풍토병은 말라리아에 취약했을 것으로 봅니다.  유명한 학자 람세이, 프럼 같은 학자들이 주장입니다. 

4) 안질이라고 하는 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사도바울은 눈이 나빠서 모든 성경을 대필을 시켰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칭찬하면서 너희들은 나를 위하여 눈이라도 빼어주었을 것이라는 말씀도 합니다.  많은 주경학자들이 안질환을 육체의 가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파라, 리인, 프럼트레, 이상근박사 같은 분들이 안질이라고 합니다. 

5) 간질이라는 분들도 의외로 많습니다. 간질은 정말 무서운 질병입니다. 옛날에는 간질병이 많았습니다. 간질병은 의사를 대동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거 사도바울은 의원 누가를 대동하고 다닌 것 같습니다. 한번 발동하여 쓰러질 때는 너무나 고통스러원 자기의 혀를 물어버립니다. 그러면 혀가 잘려나갈 지경입니다.  

간질이 일어나면 막대기를 가져다가 입에 물려야 숨을 쉴 수 있고 혀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몸부림을 칠 때에 물에 넘어지기도 하고 불에 넘어지기도 합니다. 육체의 가시가 간질이었을 것이라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파인들리, 호프만, 지글러, 크렌클 같은 주경학자들은 간질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곽선희목사님은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50여 페이지 정도의 연구한 결과간질이라고 단언한 적이 있습니다.  간질하는 사람은 마치 사탄의 사자와 같습니다. 미친 사람 같습니다.  이방 문서들을 보면 간질은 마귀가 가져다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사자였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병을 무기로 하여 인간을 노예화하려고 합니다. 주의 복음 전파를 방해합니다.  육신이 건강하면 자신감에 넘칠 터인데, 육신이 약하고 보니 자심감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일들이 타격을 받습니다.  

간질하는 사람은 한 15분간 허우적거리며 거품을 흘리는데, 누군가가 와서 빨간 보자기로 자기를 감싸가지고 끌어가려고 하니 그것을 물리치느라고 허우적거린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갈4:14)라고 했습니다.  이런 표현을 보면 간질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그의 몸에서 떠나기기를 세 번 주께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질병을 놓고 떠나기를 간구합니다.  세 번이나 같은 제목을 놓고 기도하는데, 사도바울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까?  바울의 기도는 정말 탄원의 기도로 간구의 기도였습니다.  간절하다는 말로 그의 기도의 열정을 보게 됩니다. 

9절은 응답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과 하시려는 일을 나에게 주어진 최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이 좋은 신앙입니다.  우리는 병고쳐주심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은 고쳐주시지 않았지만, 의미를 부여해주셨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이 말씀은 나의 약함이 결코 약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약함에 불구하고 그 약한데서 온전하여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사도바울이 가진 위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때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병을 고쳐주심을 믿고 기도하였는데, 고쳐주셨다는 하면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주신 건강을 가지고 주님 앞에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고 바르게 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생명 걸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쳐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내가 약할 때에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병고쳐주실 때보다 더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약하기에 하나님은 더욱 강하게 역사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부족함의 은혜입니다.  내가 부족하기에 하나님의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고쳐주심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비록 약하나, 우리주님은 강하시기에 약한 나를 들어 강하게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가시가 가져온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깨달아야 하는 은혜입니다.  

1)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합니다. 

육체의 가시는 우리로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합니다.  7절 말씀에 “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비우고, 겸손과 낮아짐의 깊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에게 육체의 가시가 떠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시면류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고 마지막에 가시면류관을 받으면 그것이 제대로 믿은 것이요, 그래야 주의 종의 길을 잘 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가 그를 믿는다고 하면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실 것입니까?   가시면류관이 없는 신앙, 십자가 없는 신앙이 무슨 신앙입니까?  영광만 바라보고, 축복만의 기독교라면 그것은 사이비 이단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 겸손해져야만 합니다.  이렇게 자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는 은혜는 가시가 가져온 은혜였습니다.  

2) 기도하는 은혜였습니다. 

8절 말씀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만능의 열쇠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여기 사도바울은 그의 소원을 간구하였지만, 안 된다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그것도 응답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감동적인 설교자였습니다.  그가 학식을 가지고 설교한 것입니까?   그가 엎드려 기도하였기에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기도하였기에 끝까지 쓰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3)  온전해지는 은혜입니다. 

9절 말씀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약한 사람에게 나타나고,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것입니다.  

나는 심히 약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크게 하십니다. 온전하여진다는 말은 성숙해진다는 말인데, 성숙한 신앙은 가시를 끌어안고 삭이면서 그 아픔을 아픔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시가 찌르는데,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라고 하니, 때로는 약이 오르고,  분함을 삭일 수가 없습니다.  나의 능력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자기가 약하다는 사람에게만 온전히 임하시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약하지 않았다면 그런 엄청난 계시는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약하였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확신과 능력을 주시려고 계시를 받게 하셨습니다.    가시는 계시를 받게 합니다.  가시와 계시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가시를 가진 사람이 계시를 받습니다.  은혜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큰 은혜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은혜를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까?  남이 알까보아 부끄러운 일들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시면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은밀한 계시를 주고, 가시는 온전한 신앙을 가져옵니다.  온전한 신앙은 가시를 가진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4)  주님의 능력으로 머물게 합니다. 

9절 하반절 말씀에 “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에게 머물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할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능력으로 감당할 것입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능력이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10절 말씀에서 사도는 결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은 것이 아니라, 버리지 않고 사용하시려고 하는 은혜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 그리스도의 능력의 사람으로 쓰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끝까지 기도하면서 매어달리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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