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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시작하기 (왕상 19: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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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기 (왕상 19:9~18)


<낭패에 빠진 인생―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어렸을 때 강변이나 해변에서 모래 쌓기 놀이를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몇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집을 만듭니다. 그래서 그 모래 집안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지요. 그런데 갑자기 파도가 밀려와 집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아니면 장난기 많은 친구가 모래집을 무너뜨릴 때도 있지요.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기울여 만든 집이 폭삭 무너지면 참 허탈합니다. 꽤 속이 상해서 허탈한 마음을 감출 길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학교 선생님이 과제물로 공작을 만들어 오라고 해서 오랫동안 준비를 하고 온갖 노력을 다해서 말이나 소 같은 형상의 공작품을 만듭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학교에 가지고 가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보여준다는 기대에 부풀어 올라있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로 아랫동생이 까불다가 공작을 깨뜨려버립니다. 그런 순간에는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하고 참 찹작한 심정이 됩니다. 너무나 오랜 준비와 노력 끝에, 무엇보다도 내가 땀 흘려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그 상실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도 깨지고 무너져 내리면 다시 시작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의 가정이나 사업이 갑자기 깨지고 무너져 내린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고통과 상실감은 필설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감히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망연자실(茫然自失)이라는 표현 그대로 그저 멍할 뿐입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좀체 재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폐인이 되고 우울증에 걸리고 인생을 비관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12·12사태 때 부하들의 하극상으로 큰 수치심을 당한 장군들이 있습니다. 군대생활을 함께 하며 길러냈던 부하들이 갑자기 총을 들이 대고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협박과 감금을 당하고 수치스러운 고문까지 당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을 겪은 장군들 중에는 그 날로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하고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제 설교의 제목은 '다시 시작하기'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잘 나가다가도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누가 보더라도 건강해 보였던 가족들 중에 한 분이 갑자기 불치병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창창하게 잘 나가던 사업이 IMF와 같은 경제 불황을 만나 곤두박질 칠 때가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행복해보이던 가정에 불화와 반목이 생겨 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다시 시작해야 하겠지요. 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다시 시작하고 어떻게 재기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 영적 교훈을 얻어 보고자 합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엘리야―그 출구는?>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지자를 한 사람 들라면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주전 700년경에 활동한 선지자였는데 바로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이사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졌는데 이름 그대로 엘리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엘리야의 시대는 우상숭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창궐했습니다. 아합왕이 바알신을 섬기던 시돈 나라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함으로써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습니다(왕상 16: 29-34). 아합왕과 이세벨 여왕은 바알의 신전을 만들어 바알신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을 뿐 아니라 아세라 신상을 만들어 온 백성들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예비해두셨고 엘리야는 아합왕과 이세벨 여왕은 물론이고 바알신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대결하면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말씀에 보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400명 등, 총 850명의 이방 우상신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했습니다(왕상 18: 16-40). 뿐만 아닙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엘리야가 기도했더니 소낙비가 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왕상 18: 41-46). 

이렇게 엘리야 홀로 고군분투(孤軍奮鬪)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칭찬을 하거나 격려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뭇 백성들은 임금의 눈치나 보면서 누구 하나 엘리야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다가 아합왕과 이세벨 여왕이 엘리야에게 극도의 증오심을 품고서는 무조건 죽이겠다고 사냥개처럼 군사들을 풀었습니다. 이제 엘리야가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하는 일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엘리야는 자기 한 목숨을 건지고자 정처 없이 유랑을 떠나는데 열왕기상 19장 말씀이 바로 이러한 엘리야의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형편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왕상 19: 3절 말씀을 보면 엘리야는 아합왕과 이세벨 여왕이 자기의 목숨을 노린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이스라엘 땅을 떠나 유다 땅 브엘세바로 도피합니다. 이렇게 힘들 때면 자신의 종에게 의지할 법도 한데 사환은 거기 브엘세바에 그냥 남겨놓고 혼자 하루 종일 광야길을 걸어갑니다. 사람이 힘이 들어 극도의 우울증에 빠지게 되면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역시 철저히 고립되어 혼자가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뜨겁고 척박한 사막 광야길을 걸어가다가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성지 순례를 가보니까 사막의 로뎀나무라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처럼 큰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한 1미터 정도 되는 관목이었습니다. 뜨거운 뙤약볕에 간신히 신체 일부만 가려주는 아주 키 작고 바짝 마른 나무일뿐이었습니다. 그 로뎀 나무 아래에서 엘리야는 선지자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 될 발언을 합니다. 

19: 4절을 보세요.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차라리 죽여 달라는 말이지요. 전후문맥으로 보건대 엘리야는 실제로 burn-out이 되었고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이라도 할 기세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구약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 모세와 엘리야가 다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민 11: 15절을 보세요.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고기를 못 먹어 기력이 떨어진다고 불평해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수백만 명이 먹을 고기를 자기가 어디서 구하겠느냐며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 위대한 모세와 엘리야도 burn-out, 탈진 상태에 빠졌고, depression, 극도의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와 같이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울부짖던 엘리야가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어루만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엘리야는 다시 힘을 얻어 40일을 밤낮으로 걸어가 하나님의 성산 호렙산에 도착합니다. 

<엘리야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세미한 소리> 

오늘 봉독한 말씀은 엘리야가 호렙산에 도착한 다음에 일어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엘리야는 지금 극도로 피폐해져 있습니다. 심신이 다 지쳐 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은 물 건너 간 일처럼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장면은 이렇게 절망에 처해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재기시키는 방법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모세가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전수받은 거룩한 산 호렙산에 와 있습니다. 홀로 와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일을 하시는 거룩한 장소에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복잡한 곳에서는 하나님을 대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 많고 소란스럽고 욕심 많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대면하기 어렵습니다. 호렙산과 같이 거룩한 곳으로 가서 홀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해야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뒤라야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호렙산 동굴에 홀로 들어와 숨어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묻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러분도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으면 이런 질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 여러분도 엘리야처럼 여러분의 답답한 심정을 주께 토로하십시오. 

10절을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께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열심히 하느라고 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내쳤고 자기 홀로 고독에 빠졌으며 이제는 자신의 생명까지 빼앗으려 한다는 푸념이요 불평이었습니다. 

이제 11-12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푸념하고 불평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갑자기 동굴 밖으로 나가서 서라고 명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낙심하고 실망할 때 가장 쉽게 재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임재만 경험하면 됩니다. 뭔가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정말 살아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만 하면 새힘을 얻을 수가 있지요. 그래서 엘리야도 잔뜩 기대를 품고 뭔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놀라운 체험을 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엘리야 앞에 제일 먼저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셨으나 그 바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바람이 지나간 후에 '지진'이 있었으나 그 지진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지진 후에 불이 있었으나 그 불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과 지진과 불은 모두 자연적으로 굉장한 사건들이지요. 그런데 그런 굉장한 사건들 속에서는 주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실의와 좌절에 빠진 우리도 뭔가 하나님께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과 같은 놀라운 사건을 통하여 어떤 계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면 금방이라도 재기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에도 바람과 지진과 불이 지나간 후 아주 '세미한 소리'(still small voice, gentle whisper)가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바로 그 세미한 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니까 엘리야는 그 세미한 소리를 듣고서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동굴 어귀에 섰습니다. 영적으로 긴장하며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말이지요.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러한 세미한 소리, 우리의 양심 깊은 곳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이 속삭이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아무리 실망스럽고 절망스러운 환경 속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재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미한 소리는 고요한 환경 속에서 내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한 바람이나 지진 소리, 큰 불길이 움직이는 소리는 아무리 소음이 심하고 복잡한 환경 속에서 복잡한 마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지만 세미한 소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 홀로 서 있는 곳이 거룩하고 고요해야 할 뿐 아니라 내 마음이 복잡하지 않아야 합니다. 맑고 깨끗하고 단순해야지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이지요. 

15-18절 말씀을 보면 이제 엘리야가 해야 할 새로운 사명을 하나님께서 직접 일러주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은 연후에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재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엘리야는 무서워 도망쳤던 아합왕에게 다시 돌아가 그 대신 예후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습니다. 바알신을 섬기던 우상의 본거지 아람 나라의 왕을 폐하고 하사엘을 새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서 엘리사를 발탁해서 그에게 기름을 붓게 됩니다.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서는 다시 시작한 것이지요. 

<다시 시작해보세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장영희 교수님의 유고집인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보면 '다시 시작하기'라는 제목의 수필이 있습니다. 80년대 중반에 장교수님이 뉴욕의 주도(州都)인 올버니에 있는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겪은 체험담입니다. 6년 동안 고생고생해서 학위 논문을 거의 마무리 짓고 심사만 남겨놓은 때였습니다. LA에 사는 언니네 집에 다녀오기 위하여 짐을 대충 꾸려서 자동차 트렁크에 실은 채 여행을 갔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차 트렁크를 열고 장교수님의 짐꾸러미를 몽땅 훔쳐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짐꾸러미 속에는 2년 동안 온갖 정성을 기울여 쓴 박사학위 논문의 최종본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가 대중화되기 전인지라 모든 작업을 전동타자기로 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오늘처럼 다른 곳에 저장을 해서 다시 프린트 아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지요. 2년 동안 힘들게 작성한 그 복잡한 내용의 박사학위 논문을 순전히 기억을 되살려 다시 복원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장교수님은 도둑맞은 소식을 듣자마자 기절을 해버렸고 사흘 동안 방문을 꼭 걸어 잠가놓고 전화 코드도 빼놓은 채 식음을 전폐하며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닷새쯤 되는 날 장교수님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괜찮아. 디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껏해야 논문인데 뭐. 그래. 살아 있잖아…. 논문 따위쯤이야." 

이 세미한 음성을 들은 장교수님은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정확히 1년 후에 잃어버린 논문보다 더 훌륭한 학위논문을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장영희 교수님은 박사 학위 논문 맨 앞쪽의 헌사를 쓸 때 "내 논문 원고를 훔쳐 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 직장에, 사업에 큰 어려움이 있습니까. 거룩한 곳으로 가서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십시오. 고요히 마음을 정리해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할 일을 깨닫게 하시고 새로운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을 돕습니다. 다시 하면 됩니다. 한 순간의 실수나 실패가 끝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신 후 곧바로 다시 시작해보십시오. 

두 개의 항아리에 각각 쥐 한 마리씩을 넣은 뒤 빛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밀봉했습니다. 다만 한 쪽 항아리에만 바늘구멍을 뚫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똑같은 조건 하에서 완전히 깜깜한 독안의 쥐는 1주일 만에 죽어버리지만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독안의 쥐는 2주일을 더 산다고 합니다. 그 바늘구멍만한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언젠가 독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되고, 그 희망의 힘이 생명까지 연장시킨다는 사실이지요. 

그렇습니다. 희망을 가집시다.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믿읍시다. 다시 시작합시다. 예전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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