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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브닌나의 우상 (삼상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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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닌나의 우상 (삼상 1:4~11) 
 
 
❚자식 우상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이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그 교회 사택에서 기거를 하는데 거기 여 전도사 한 분이 외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닷새 동안 집회를 했습니다. 옛날에는 다 이렇게 오래 부흥회를 했지요. 집회를 다 마친 후 그 교회 담임 목사님, 부목사님 두 분, 원로 목사님, 장로님 등 30여 명이 모여 감사 예배를 드렸답니다. 

김용기 장로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여러분 앞에 우상이 있으니 우상을 치워야겠습니다” 하고 말문을 여는데 모두 깜짝 놀라며 어리둥절하였습니다. “다른 분들은 모르지만 여기 이 여전도사님은 우상이 분명 있으니 우상을 치우도록 하십시오.” 그 여전도사님이 깜짝 놀라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항변합니다. “장로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 친아버지도 목사님이요, 우리 시아버지도 목사님이요, 우리 남편도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인 남편이 아들 하나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제가 개가도 하지 않고 평생 전도사로 봉사하며 이렇게 사는데 우상이라니요?” 그러자 김 장로님이 대답합니다. “전도사님, 내가 5일 동안 사택에 있으면서 보았더니 식사 때마다 전도사님은 서울 시내 좋은 대학 다니는 아들에게 밥을 떠서는 밥 많이 먹어라, 반찬을 집어서는 꼭꼭 씹어 먹으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 아들 얼굴을 12번이나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밥을 먹다가 말고 나가서 아들의 구두를 닦아서 돌려놓았고, 겉옷을 입혀주고, 가방을 들고 대문까지 배웅을 나갔습니다. 제가 보았더니, 전도사님은 아들의 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 들어왔고, 저녁이 되면 미리 마중을 나가서 또 저녁 먹을 때 12번씩 쳐다보더군요.” 그러면서 이렇게 충고를 합니다. “전도사님, 죄송합니다만 진지 잡수실 때 예수님을 얼마나 생각하십니까? 이 교회 목사님들 구두는 한 번이라도 닦아보았습니까? 교회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보다도 아들을 더 사랑하니 그 우상이야말로 정말 치우기 어렵습니다.”

❚라이벌 : 한나와 브닌나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우상 되기 쉬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자식입니다. 저도 아비요 두 자식을 키우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자녀는 귀한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도 자식 귀한 줄은 다 압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요 내 분신과도 같으니 어찌 귀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부모나 다 자식 잘되길 바라고 자식 잘되기 위해 부모는 무엇이든지 하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내 모든 것을 투자하고 희생하고 심지어 자식 위해서라면 내 생명까지 아까운 줄 모르고 내 주려는 마음까지 갖습니다.

특히 성경에 보면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127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그러므로 안 믿는 분들도 자식이 귀하지만 특히 예수 믿는 분들에게는 자식이 그저 육신의 열매요 내 분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기에 더욱 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것은 우상이 되기 정말 쉽습니다. 돈이 귀하니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안 귀하다, 돈이 별로 필요 없다고 한다면 절대 우상 안 됩니다. 그런데 돈이 귀하고 좋으니까 우상도 되는 것입니다. 명예나 권력도 좋으니까 우상이 되고 세상에 귀하고 좋은 것은 모두 우상 될 가능성이 참 높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귀한 자식도 우상이 될 위험이 그만큼 높은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몇 사람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먼저 본문 앞에 있는 사무엘상 1장 1절을 봅니다. 한 남자가 등장하지요?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이라는 동네에 에브라임 (지파) 사람 엘가나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2절에 보면 두 여성이 등장합니다. 바로 앞서 소개한 엘가나의 두 아내입니다. 

당시에는 두 명 이상의 아내를 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 두 부인의 이름은 한나와 브닌나였습니다. 한나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을 보니 아마 한나가 먼저 결혼한 아내였나 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에요? 바로 그 다음에 나오지요?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큰 문제지요. 

당시에는 자식이 없는 것은 큰 문제요 수치로 여긴 때였습니다. 그래서 야곱도 두 부인을 두었는데 두 부인인 레아와 라헬은 비록 자매지간이지만 자식 때문에 얼마나 서로 경쟁하고 시기합니까? 하물며 이 엘가나의 두 아내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물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다는 것 빼고는 모든 조건이 괜찮았습니다. 남편 엘가나가 브닌나보다 한나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지요. 제사를 드릴 때도 브닌나와 자녀를 위해서 준 제물보다 한나에게 갑절을 더 주었습니다. 엘가나는 비록 자식이 없어도 한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8절에 보면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말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 남편이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정말 감격할 것입니다. “여보, 비록 당신이 아들을 못 낳았지만 대신 내가 있지 않소? 내가 당신에게 열 아들보다 더 낫지 않소.” 이렇게 자상하고 배려가 깊은 남편이 어디 있어요? 이렇게 아내를 위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어디 있어요? 정말 브닌나 따위는 하나도 안 부러울 정도로 남편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나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아니, 편치 않을 정도가 아니라 정말 못 살 지경이었습니다. 6절에 보면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힙니다. 너무 괴롭혀서 한나가 심히 격분(激忿)했다고 하는데 엄청난 분노와 고통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가 남편의 사랑을 그토록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은 늘 고통과 분노에 휩싸여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브닌나는 어떤 여자일까요? 6절에 브닌나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너무 짧은 구절이라 브닌나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지만 이 짧은 구절만으로도 우리는 브닌나가 어떤 여성인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한나를 ‘적수’(敵手), 즉 라이벌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어성경에는 라이벌(raval)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레아와 라헬은 자매인데도 남편이 하나다보니 서로 라이벌이 되어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려고 서로 경쟁하지 않았습니까?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아내들끼리 서로 경쟁자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지 모릅니다.

둘째, 그런데 라이벌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뭐겠습니까? 뭔가 나한테는 있는데 저 사람에게는 없는 것을 찾아야지요.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TV가 있는데 쟤네 집에는 없어요. 그럼 게임 끝나는 겁니다. 경쟁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집에는 있는데 쟤네 집에 없으면 그 애는 더 이상 내 경쟁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브닌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나한테는 있는데 쟤한테는 없어요. 뭡니까? 남편 사랑도 한나가 더 받아요. 모든 조건에서 한나보다 나을 것이 없는데 딱 한 가지 정말 상대가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자식입니다. 그것도 아들 말입니다. 그러니 이 게임 역시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식이, 아들이 있고 없고는 정말 엄청난 차이인 것입니다.

셋째, 자, 그럼 내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을 찾았어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져야죠. 걔만 만나면 만날 TV 얘기만 하는 겁니다. 시도 때도 없이 “어제 TV에 보니까 ‘웃으면 복이 와요’ 하더라” 하는 겁니다. 젊은 분들은 무슨 얘기 하는 지 잘 모를 거예요. “웃으면 복이 와요.” 저도 여러분이 모르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지렵니다. 

“어제 TV 보니까 웃으면 복이 와요 하더라. 너 비실이 배삼룡 봤어? 이기동 봤어?” 하고 놀리는 거예요. “어제 TV 보니까 드라마 ‘여로’ 하더라. 너 영구 알아, 영구?” 하고 틈만 나면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저 애는 완전히 기죽는 겁니다. 나보다 공부도 잘 하고 싸움도 잘 해도 TV 얘기만 꺼내면 완전히 기죽는 거예요. 완전 KO승이지요 뭐. 누구 얘기일까요? 바로 제 얘기입니다. 

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TV 있었거든요. 진공관 TV요. 자, 이런 식으로 브닌나도 라이벌 한나를 완전 기죽인 것입니다. 밥만 먹으면 아들 얘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한나는 완전히 기죽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것입니다. 아들 얘기, 자식 얘기 할 때마다 속된 말로 뚜껑 열리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격분시켰을까요? “아들도 없는 년이...” 했겠지 점잖게 “아드님도 없는 분이...” 그랬겠습니까? 그러니까 한나는 멀쩡하다가도 이 “아들도 없는 년이...” 소리만 들으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남편이 사랑해줘서 좀 위로를 받는 듯싶다가도 이 “자식도 없는 년이...” 소리를 들으면 정말 살맛이 안 나는 그런 상황이었다는 말입니다.

❚브닌나의 우상

자, 그건 그렇고. 그럼 여러분께 묻습니다. 이 브닌나에게는 아들이 어떤 존재인가요? 라이벌을 완전 제압할 수 있는 무기? 내 자랑? 내 체면? 내 자랑스런 재산? 아무 것도 없는 내가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존재지요.

제가 어떤 어머님에게 들은 말이 있습니다. 그 분이 그러시더군요. 제가 그 분 말 그대로 옮깁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알다시피 저 아무 것도 없는 년이잖아요? 집안도 가난하고 남편은 별 볼 일 없고요. 하지만 내 자랑은 오직 아들 하나뿐입니다.” 정말 그 아들 잘 났거든요. 가난한 집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만날 술 먹고 행패 부리고 하는데 아들은 정말 반듯하게 자라서 공부도 잘 하고 인물도 좋아요. 잘 나갑니다. 

그러니까 이 어머니가 “내게는 아들 하나뿐”이라고 할만도 하지요. 그러면 이 어머니에게 아들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아들 하나의 의미가 아닙니다. 단순히 자식이 아닙니다. 처음 소개한 예화에 나온 그 여전도사님처럼 그 아들은 이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아들 하나 보고 삽니다. 아들 없으면 못 삽니다. 아들이 유일한 꿈이고 남들에게 내세울 것 하나도 없는데 아들 얘기만 나오면 신나고 자랑하고 싶어 못 견딥니다. 

내 라이벌과 주변 사람을 모두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바로 우상 수준입니다. 왜? 방금 제가 그랬잖아요? 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것 하나 보고 삽니다. 그것 없으면 못 삽니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꿈이고 남들에게 내세울 것 하나도 없는데 그것 얘기만 나오면 신나고 자랑하고 싶어 못 견딥니다. 내 라이벌과 주변 사람을 모두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이게 바로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브닌나에게 자식은, 아들은 다름 아닌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닌나는 자식이라는 우상을 섬기면서 그 우상을 통해 위로 받고 라이벌을 기죽이며 그 맛에 산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부모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이 자식 우상 섬기는 부모들을 많이 봅니다. 물론 자식 귀합니다. 아들도 귀합니다. 하지만 자식이 내 유일한 희망이 되고, 자식이 살맛 이 되고, 자식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심지어 신앙도 양보할 수 있다면, 자식이 신앙생활 게을리 하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이유가 된다면 그  자식은 이미 나의 우상인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주일을 범하고, 자녀 때문에 악과 타협하고, 자녀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도 한다면 이미 그 자식은 나의 우상입니다. 내 마음 속에 단 한번이라도 하나님보다 자식이 먼저였다면, 자식의 자리가 하나님보다 앞서 있다면 그 자식은 나의 우상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자녀는 무엇입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브닌나처럼 나의 우상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상 제일 싫어하시는 것 잘 아시지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브닌나처럼 자식을 우상으로 삼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내 자녀의 앞길을 절대 책임져 주시지 않습니다. 절대 그 길을 열어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내 자녀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잘 될 수 없습니다. 절대 잘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상을 제일 싫어하시는데 어떻게 그 우상에게 축복하고 함께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이삭이 누굽니까? 100세에 얻은 금쪽같은 자식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천금주고 바꾸겠습니까, 자기 생명하고 바꾸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식인데 그 자식을 내놓으랍니다. 하나님이 제정신으로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아니, 주신다고 기다리라고 하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놓으랍니까? 

이제 와서 내 손으로 죽여 제물로 바치랍니까? 나는 그렇게 못 합니다. 차라리 날 죽이십시오.” 이렇게 나와야 정상이지요. 그런데 만약 아브라함이 이렇게 나왔다면 이삭은 정말 우상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순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섬기거나 우상 만들지 않는 사람이구나,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자식이 귀하더라도 절대 우상 안 삼고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습니다. 하지만 나아가 우리뿐 아니라 우리 자식이, 바로 내가 우상 안 삼고 바치려 한 그 자식이 복을 받습니다. 그 자식뿐 아니라 그 자녀에 자녀 대까지 천대에 걸쳐 복을 받게 됩니다. 어떤 복일까요? 다같이 신명기 28장을 보십시다. 1절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나뿐 아니라 우리 자녀와 자손을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그렇습니다. 이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너무 사랑하고 위한 나머지 자식이 우상이 되고 하나님은 두 번째, 세 번째가 되면 하나님은 절대 우리 자녀와 함께 하지 않으시지만, 절대 자녀에게 복을 주지 않으시지만 이 우상 숭배의 유혹을 버리고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면,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은 우리 자녀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는 복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믿으십니까? 

❚한나에게 우상 될 번했던 아들

마지막으로 한나 이야기를 하고 마치지요. 브닌나가 이렇게 자식이 우상이 되어, 아들이 우상이 되어 자랑하고 한나를 격분시킬 때 한나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정말 죽을 지경이지요. 그래서 한나는 기도합니다. 보세요. 브닌나 같은 사람이 있으면 화는 나고 속상하지만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브닌나 같은 사람도 필요한 겁니다.

한나는 너무 속상하고 마음 아파서 9절부터 보면 실로의 성소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뭐라고 기도했어요? 물론 “하나님, 아들 좀 주세요” 하고 기도했겠지요. “아들만 주신다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했겠지요. “아들만 주시면 제가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했겠지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한나도 자식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비록 겉모습으로는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아들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브닌나와 똑 같은 자식 우상을 섬기는 셈입니다. 그럼 하나는 어떻게 기도했나 볼까요? 11절입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물론 한나도 아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괴롭고 억울하고 속상해서 아들만 주시면 소원이 없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남들과 다른 하나가 더 붙습니다.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머리에 삭도를 안 댄다는 말은 평생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삼손 같은 나실인으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즉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 평생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서원기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낳은 자식입니까? 얼마나 귀한 자식입니까?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이삭보다 더 귀했으면 귀했지 덜하지 않은 자식입니다. 이런 귀한 자녀는 대개 어떻게 될까요? 정말 우상 되기 쉽습니다. 나도 아들 생겼다고 브닌나에게 달려가 뽐내야 마땅합니다. 그럼 그 아들은 내 자랑거리요 내 무기가 됩니다. 

이런 자식은 처음에 나온 예화처럼 그 엄마가 절대 포기하지 못합니다. 내 겁니다. 내 소유입니다. 내 우상입니다. 이런 아들은 어렸을 때 내 품안에 있을 때뿐 아니라 나중에 커서 결혼 시켜도 며느리의 남편이기 이전에 내 아들입니다. 한나도 충분히 이렇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이것을 극복합니다. 우상 숭배를 극복하고 자식 우상을 만들지 않은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녀를 “내 자녀”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 것입니다. 자녀를 하나님이 주셨기에 내 것이라 우기지 않고 하나님께 도로 바친 것입니다.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한나도 브닌나 때문에 얼마든지 브닌나 같이 자식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될 뻔 했지만 신앙으로 극복하고 자녀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엄마의 좋은 아들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좋은 아들이 되었고 나중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정말 내 아들, 내 딸이 잘되기 바라십니까? 정말 내 자식이 성공하고 인정받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그 아들을, 그 딸을, 그 자식을 내 것으로 삼지 마세요. 내 뜻대로 내 원대로 만들지 마세요. 그 자식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 좋은 학교 들어간 사람, 취직 잘 한 사람, 시집 장가 잘 간 사람 만들기 전에 제일 먼저 좋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내 아들을, 내 딸을 정말 위대한 사람 만드는 법은 바로 그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 아들, 내 딸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입니다. 여기서 실패하니까 자녀교육도 실패하고 부모의 큰 기대나 희생과 아낌없는 투자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다른 길로, 잘못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고 말씀을 마치지요.

어떤 장로님이 성지순례 때 경험한 일을 들었습니다. 함께 성지순례를 간 일행 가운데 다른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를 하는 젊은 신학생 한 분과 또 그 어머니인 권사님이 있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이 지긋한 권사님이 젊디젊은 아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더랍니다. 아들을 부를 때도 꼭 “전도사님”이라고 부르고요. 처음에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한참 함께 여행을 하다 보니 젊은 사람이 나이 지긋한 장로님들 권사님들 일하고 짐 나르는데 손 하나 까딱 않더랍니다. 

게다가 젊은 전도사의 짐 가방까지 어머니가 끌고 가더라네요. 며칠 지난 뒤 참다못한 장로님이 한 마디 했답니다. “전도사님, 젊은 분이 그러면 안 되지요. 다른 장로 권사들 다 짐도 나르고 하는데 꼼짝도 안 하고, 게다가 나이 든 어머니가 짐 가방까지 끌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랬더니 그 젊은 교육전도사 하는 말이 “아니, 장로님, 어떻게 주의 종에게 그런 말을 합니까?” 하더랍니다. 

게다가 아들에게 그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더 흥분하더랍니다. “어디 주의 종에게 그런 말을 하냐”며 한참을 따지더랍니다. 하는 수 없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꾹 참고 있었는데 성지순례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는 것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이 권사님은 아들을 너무 ‘숭배’한 나머지 정말 버릇없고 잘못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먼저 사람부터 되라”고 한 대 쥐어박았을 겁니다.

여러분, 신앙과 인격이 먼저입니다. 아무리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목회자나 중직자라도 이 문제에서 실패하면 저 대신 하나님이 쥐어박으실 것입니다. “아니다 이놈아, 순서가 잘못 되었다. 목회자 되기 전에, 성공한 사람 만들기 전에 먼저 사람 만들어라, 먼저 하나님의 사람 만들란 말이다”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도 자식 문제는 자신이 없습니다. 누구도 장담 못합니다. 어떤 부모도 자녀 문제를 장담할 수 없고 책임도 못 집니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반드시 우리 자녀를 한나의 아들 사무엘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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