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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 (창 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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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 (창 8:20~22)


독일의 한 중년의 성도가 한 대학병원의 수술실에서 혀의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취 주사를 손에 쥔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막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말은 이것이 최후의 말이 될 것입니다. 
간호사, 조수, 견습 의사들,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심각했고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곁에 있는 모두가 다 저마다 만일 나라면, 만일 내가 한마디 할 수 있는 말만이 남아 있다면,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드디어 입이 움직이고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더니 다음과 같은 말을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불평이나 불안한 생각이 가득 차 있으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도 좋은 말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차고 만족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입에서는 진정 은혜와 감사의 말들이 나올 것입니다. 

또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사람이 시간과 물질을 드리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를 해 주었는데도 상대방이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아마 이 사람은 일은 많이 했어도 그 진실한 마음이 상대방에게 통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서로 통해야만 서운함이 없이 좋은 일만 있게 됩니다. 

사람들끼리도 이러한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면서 나름대로 충성을 다했다고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음 주일 우리는 맥추 감사주일로 드리게 됩니다. 이 날에 우리가 어떻게 예물을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예물을 기뻐하시는가 입니다.
홍수가 끝나고 난 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행한 일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홍수를 내려 세상을 멸하려고 작정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하나님이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방주를 짓는 120년 동안의 고통이라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대단했습니다. 먼저 그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이건 상상이 안 될 정도입니다.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그마치 120년이었습니다. 또 그 비용도 천문학적인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주위 사람들의 비난과 비웃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마음에 어둔 그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가 미친 짓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전혀 듣도 보도 못한 홍수가 와서 이 세상을 다 물로 채워 멸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서도 정말 그럴까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홍수는커녕 그때까지는 비도 없었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실 때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따르지만 확실히 무엇인지는 알지를 못합니다. 그랬던 그가 눈이 크게 떠졌던 날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처럼 온갖 짐승들이 쌍쌍이 몰려와 방주로 들어갈 때였습니다. 

이윽고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시고 난 다음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나중에는 하늘의 궁창이 열리고 폭포수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창문을 통해 내다보는 노아의 마음은 너무도 떨렸을 것입니다. 온 세상이 캄캄한 가운데 비가 내리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물이 차올라 방주가 물 위로 떠오르는 순간 노아는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홍수가 진행되는 동안 어찌 보면 답답할 수밖에 없는 방주 안에서 노아는 뜨거운 감동과 감격을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했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 가운데 창문을 통해 비쳐지는 햇살을 보며 어찌 보면 몹시 답답하고 밖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을 때는 그토록 고생스러웠던 방주였지만 그 방주를 통하여 노아는 온 세상에 가득한 홍수 가운데서도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반주 안에서 지내는 답답한 시간들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마 눈물 가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홍수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순종한 결과는 눈으로 보며 몸소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홍수가 끝나 방주에서 나오게 됐을 때 어찌 감격스럽지 않았겠습니까? 한 번도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이 세상을 멸하시고 모두가 비웃었던 미련한 방법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더니 그 방주를 통해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렇듯 온 세상이 악으로 가득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던 노아는 먼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섬겼으며 또 다시 하나님 앞에 먼저 제사를 드림으로 그의 삶의 중심이 바로 하나님 신앙인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자신과 그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게 됨은 자기의 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향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드린 제사를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이는 단지 노아가 드린 제물만을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 아니라 노아의 정성과 그 제사 드리는 믿음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제물을 드린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니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제사라면 그것은 드린 사람의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고 이사야서 1장 13절에서는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자세가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도록 정성 가득한 예물을 주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이요 나 자신을 살펴서 과연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화해와 축복을 이루며 주님 앞에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하는 마음이나 예물을 드리는 마음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하고 그렇기에 거기에 정성이 깃들어야 하며 성도 간에 서로 화해함으로 교제하고 서로 축복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음에도 없는 그 예배와 예물을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으며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 교통하게 하신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축복하지 못한다면 어찌 그 가운데 주 안에서의 교통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레위기 10장 1절로 2절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고 했습니다. 

다른 불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다른 불을 드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서로 화목하며 축복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화해와 축복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 먼저 자신이 믿음으로 드려져야 할 뿐 아니라 서로 화목하며 축복하는 가운데 예물도 온전히 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을 무엇이어야 합니까?
이사야서 56장 7절은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시는 곳이 나의 성산의 기도하는 내 집 나의 제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구약 시대는 성산 예루살렘의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요 오늘날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는 제물은 아무데서나 쉽게 드리고 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도하는 내 집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곳에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신명기 16장 10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했으며 16절로 17절을 통하여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감동을 따라 정성 어린 예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결코 하나님 앞에 인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임을 먼저 우리가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소유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가 결코 인색할 이유도 그것을 가지고 갈등할 이유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심는 그대로 거둔다고 했으니 우리가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심으면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받으셔서 100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러한 하나님의 감동을 무시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주신 감동대로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다 드리고자 했지만 곧바로 그 마음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다 드리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살지?” 그들이 감동대로 재산을 팔았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생각이 저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의 생각도 일리는 있습니다. 

전혀 대책 없이 다 하나님께 드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나 하는 그 마음의 흔들림이야 누군들 없겠습니까? 문제는 그 집을 팔 때는 하나님의 감동을 따랐는데 이제 와서 하나님의 감동이 아닌 내 생각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물을 드릴 때만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고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감동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노아처럼 풍성한 생명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르박 과부가 순종함으로 엘리야를 섬겼더니 가뭄의 때를 견디고 살아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아들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순종하여 섬기는 자에게 생명을 보장할 뿐 아니라 그 삶도 책임져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입니다. 그 분 앞에서 인색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이 양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내 입장에서의 많고 적음입니다. 부자의 많은 돈보다도 과부의 두 렙돈을 더 많이 드렸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따라서 부담을 가지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담아 정성껏 주님께 드리는 맥추절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무너질 것 같은 다리를 위태롭게 건너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주시면 백만 원을 기부할게요.” 
그리고는 다리를 무사히 거의 다 건너갔을 무렵 그는 다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백만 만원은 너무 많아요. 없던 걸로 해 주시면 어떨까요?” 라고 기도를 하는 순간 갑자기 다리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급하게 기도하기를 “어이구 하나님! 농담인데 뭘 그리 노하십니까?” 

우리는 위기의 상황에서 아니면 조금 곤란한 지경에 빠져서 하나님께 이 문제를 수습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공적 사적으로 약속한 일들은 없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문제가 풀리고 수습이 되었지만 그 약속한 것을 이행치 않고 지내는 경우는 없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한 시도 주님의 은혜로서가 아니고서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가지 우리가 더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 위에 공의와 정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21장 3절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는 외적인 증거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많고 좋은 제사를 드렸어도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10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 사랑은 용서와 용납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하면서 어찌 하나님 앞에 용납되기를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보고 잘못됐다고 그러니 나는 너와 함께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 눈에 들보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주님은 그러한 자와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과 함께 친구로 지낼 수 있는 사람의 사람인지 이 시간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너희가 참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사랑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나는 부정한 제물과 같아서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가 없습니다. 모마서 12장 1절로 2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 사랑의 대상인 이웃은 온전하고 깨끗한 사람만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외면하고 돌아서지는 않습니까?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면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것이 다 소용이 없어지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누구를 외면하게 되면 그 마음이 편합디까? 결코 아닐 것입니다. 가족 가운데 누가 마음에 안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을 나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서로 불편할 것입니다. 아니면 너는 마음에 안 드니까 나가서 들어오지 마 그럽니까? 잠시는 나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정말로 집을 나가면 마음이 편해집니까? 잠깐은 안 보이니까 눈꼴사나운 것 안 보니까 마음이 편하게 느껴질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 보세요. 결코 편치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인데 사랑 안에 있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겠으며 하나님이 내 안에 안 계시면 내 마음에 어찌 평안이 있으며 평안 없이 내가 어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흔드실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했던 사람 애써 내가 외면했던 그 사람이 자꾸 마음에 쓰여서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안 보고 살면 된다고요? 그럼 하나님 나라는요? 생각하십시오. 

내가 죄인일 때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고 나를 위해 죽어주셨습니다. 의인을 위해 죽으신 것 아닙니다. 죄인이기에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그 은혜로 나도 다가갈 수 있어야 하고 품에 안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서의 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면 다른 사람 역시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결코 누구를 죽이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우리의 마음이 이런 화해와 축복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드리는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예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증표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자에게 작은 것이라도 선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마음이 이렇듯 즐거워야 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된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가득한 예배를 주님께 드리는 귀한 시간이 항상 이어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 일본 그리고 한국 이렇게 세 사람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다가 그만 야만인들에게 붙잡혀 곤장 100대씩을 맞게 되었는데 다행히 야만인 추장은 이들에게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로 미국사람이 "제 등 뒤에 방석 6장을 올려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추장은 소원을 들어 주었고 곤장 100대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방석이 너무 얇아 70대째에 다 찢어져 나머지 30대를 맞곤 아물아물한 정신으로 "그래도 미국인은 창의력이 뛰어난 민족이야" 라고 중얼거리고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일본사람은 "제 등위에 침대 매트리스 6개를 올려 주십시오." 추장은 일본사람의 소원을 들어 주었고 곤장이 시작됐습니다. 

일본사람은 100대를 맞는 동안 줄곧 웃기만 하다 일어났습니다. 
역시 일본 사람은 세계에서 머리가 제일 똑똑하다 누가 우리의 뛰어난 머리를 따라올까 어림없는 소리지 하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야만인 추장은 한국 사람을 향해 말했습니다. 자 네 소원은 무엇이냐? 한국 사람이 씨익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 일본사람을 제 등 뒤에 올려 주십시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때로는 아프고 힘들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한국인의 기지와 웃음을 가지고 살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누가 내 대신해서 매를 맞도록 하라는 뜻이 아닌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땅은 다른 말로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땅의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땅의 흙은 에레츠입니다. 이 땅을 경작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 경작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에레츠를 아담으로 하여금 아다마 즉 경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으로 사람 되도록 경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경작하는 일에는 수고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거둘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용서하고 용납한다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스럽기에 사랑으로 하나 되는 기쁨은 더욱 큰 것입니다. 
모두가 힘들어 하는 이 때 그렇기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한 고린도 교회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귀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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